어쩌다, 내가 예쁜

국수 詩가 좀 되네요/윤관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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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詩가 좀 되네요/윤관영

也獸 2012. 11. 8. 16:39

 

 

국수를 삶는

윤관영

 

 

국수를 삶는 밤이다

일어나는 거품을 주저앉히며

창밖을 본다 滿開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젓다가 찬물에 헹군다

누가 아들과 아내 떼어놓고 살라 안 했는데 이러고 있듯

벚꽃은 피었다

기러기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

비빈 국수 냄비의 귀때기를 들고

저 벚꽃나무에 뛰어내리고 싶은 밤이다

저 별에게 국수를 권해 볼까

국수가 풀어지듯

소주가 몸 속에서 풀리듯

국수를 삶는 내가

벚꽃에 풀리고 있다

 

국수가 에부수수

벚꽃처럼 끓는 밤이다

 

 

 

  시의 씨앗이 머리 속에 들어오면 나의 경우는 계속 그 정황이 머릿속에서 놀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시의 형식이 어떤 것이 걸맞을까 잡히고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어떤 경로를 거칠까 잡히게 된다. 그러니까, 운률로 가는 시냐, 이미지로 가는 시냐, 아니면 의미천착으로 가느냐 뭐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시적 전략도 있게 마련이다. 뭐랄까 최소한 난해냐 감동이냐가 정해진다고나 할까, 그런 거다.
  이 시는 생활의 반영이었기에 화자의 자리를 중심으로 꾸역꾸역 디테일화 한 작품이다. 한 시의 씨앗이 들어오면 時空을 시인이 장악해야지 형상화에 무리가 없다. 억지가 아니되도록 푹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 시는 익은 시점을 파악하는 게 중요했고 그 나머지는 일사철리로 쓰여졌으며 탈고가 방점을 찍었다. 시를 써 놓고 이 시처럼 마음에 드는 시가 없었다.
  내가 탈고를 하면서 이 시는 되었다라는 지점은 <국수가 ‘부글부글’은 아니니까> 동작의태가 어느 것이 맞을까 하는 지점이 화룡점정처럼 중요하게 되었다. 시가 평이하니까, 더욱 그랬다. 그래서 끝내 남은 두 단어가 ‘자란자란’과 ‘에부수수’였다. ‘자란자란’은 의미상으로 들어맞고 또 운률에 끌리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곱고 또 자장자장 만큼이나 조용했다. 따라서 낙점된 것이 ‘에부수수’였다. 한숨 같기도 하고, 또 거칠기도 하고 거품이 떠오르는 듯도 하고, 그래서 선택하고 보니, 이 시는 되었다 하는 느낌이 그 하나로 확 왔다.
  그러니까 시가 내게로 왔다. 그리고는 이 단어로 인해 완성되었다. 시 쓰는 즐거움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윤관영>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

윤관영

 

 

  혼자 먹어도 좋은 게 국수다

  상심한 사람들은 국숫집에 간다 불려, 국수를 먹는다 울기를 국수처럼 운다 한 가닥 국수의 무게를 다 울어야 먹는 게 끝난다 사랑할 땐 국수가 불어터져도 상관없지만 이별할 땐 불려서 먹는다 국수 대접에 대고 제 얼굴을 보는, 조심히 들어올려진 면발처럼 어깨가 흔들린다 목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를 좋아한다 국수 같은 사랑을 한다 각각인 젓가락이 국수에 돌돌 말려 하나가 되듯 양념국수를 마는 입들은 입맞춤을 닮았다 멸치국수를 먹다가 애인이 먹는 비빔국수를 매지매지 말기도 하고, 섞어서 먹는다 불거나 말거나 할 말은 사리처럼 길고 바라보는 눈길은 면발처럼 엉켜 있다 막 시작한 사랑은 방금 삶은 면과 같아서 가위를 대야 할 정도의 탄력을 갖는다 국수는 그래서 잔치국수다 (라면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곱빼기인 사람들은 국숫집에 간다 손가락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서야 그 빈 그릇이 빛난다

 <시와경계> 가을호

 

 

국수 : 인간학을 대위하다

 

  한편의 시로 마음속에 존재의 아르다운 여율呂律이 흘러넘칠 수 있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시인의 운명을 살아낸 것은 없으리라. 시인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 현실공간을 어렵사리 건너가고 있겠지만, 시인은 그 고통의 넒이와 깊이만큼 이 세계의 아픔을 포월하여 숭고한 시의 위의를 세우게 된다. 섬세한 마음의 결이 시말 위를 질주하고, 사랑과 이별과 환희가 아름답게 탄주되고 변주된다. 시인에게 시란 단순하게 말이 조어되는 운용의 묘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가진 양력과 부력을 인륜성으로 고양시키는데 있다. 특히 윤관영 시인의 시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은 소시민의 삶시간세계를 주밀하게 살피면서, 이 세계의 인간학적 표정을 시말화하고 있다.

  흐드러지게 분주한 시장통 어느 한쪽 구석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한가로이 국수를 먹는다. 얼굴의 표정이 각각 다르고 느낌 또한 판이하다. 세세한 삶의 모습이 국수 가락에 얹힌다. 시인에게 국수는 단지 허기를 때우는 하나의 음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을 대위시키는 이 세계의 전언을 표상하고 있다. 따스했고, 온기가 훈훈하게 흘러넘친다. 때론 사랑의 지대를 내밀하게 바라보면서, 때론 상처의 심연을 세밀하게 부조시키면서,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은 우리네 서민들의 삶의 표정을 낱낱이 읽어내고 있다.

  다채로운 삶의 향연이 벌어진다. 한쪽 구석에선 상심한 사람들이 슬픔의 국수를 먹고, 다른 한쪽에선 애인멸치국수비빔국수를 나누어 먹으며 밀어를 즐긴다. 풍요롭고 행복한 오후의 한때가 노을빛에 물든다. 분주하고 왁자지껄할 것 같은 넉넉한 오후의 시간이 활기차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리 지고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울고 부대끼고 사랑하면서 가끔은 이별의 슬픔을 되뇌이는 바로 그 지점에 삶이 있고, 인간학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국수 면발에 대위된 인간학인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시인의 내밀하고 따스한 시선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바로 국수 가락 하나하나에 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미어져 있는 까닭에 그러하다.

  너무도 차갑고 냉혹한 자본의 시대를 따스한 감정의 전언으로 건넌다는 것은 시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다. 철저하게 개이니화되고 타인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시대에 윤관영 시인의 시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은 사람 냄새 진하게 배어있는 인륜적 가치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하겠다. 설령 디지털 기계문명이 21세기를 뜨겁게 달구어 문명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사랑과 이별과 슬픔이라는 인간학적인 실물을 담백하지만 진솔하게 그려낸 시인의 그것은 시만이 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향기롭게 뭉게뭉게 피어올라 이 세계를 안온하게 감싸는 것 같다. 참으로 따스했고, 풍요로웠다. (김석준|문학평론가)

미네르바겨울호

 

 

중첩된 시간은 고체가 되어간다

윤관영

 

 

 

밥을 닮아가고 있는, 밥만 데우는 밥통

 

숨에서 김이 나오는, 국수를 먹는 긴 손가락들

 

24시 국수를 삶는 솥은 나문재 뻘밭 같다

 

어떤 다짐 같은, 사리를 풀어헤치는 첫술 풀리는 깨소금

 

육수만 내는 들통은 멸치가 되어 가고 있다

 

국수를 쥐는 손가락은 국수처럼 풀리다가 사리처럼 감아들기도 한다

 

행운목 뿌리 같은 개숫물망

 

솥 손잡이 朝光엔 김이 섞여 있고

 

국숫집엔 젓가락도 국수를 닮아간다 수저 쓰는 양손질

 

국수 먹는 모습은 뒤에서 볼 때가 좋다

 

 

 

 

詩上萬事, 萬化方暢

 

 

이 코너는 좀 엄숙하고 현학적입니다. 코너에 시가 선정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쓸까 궁리하다 보니, 잘 써야 된다는 압박감에 부담 곱빼기더라구요. 무지한 걸 들키기는 싫고, 괜히 아는 척하다 보면 더 확실한 바닥이 드러날 것 같고, 원고 마감은 청탁 즉시고, 해서 전전긍긍이었습니다. 걱정 끝에 이 코너의 앞에 글 쓴 분들의 글을 찾아 읽어 보기도 했습니다. 답은 없더라고요. 해서 다소 거칠 수 있지만, ‘무지하지만 제 생각에 하는 나름의 생각을 중덜중덜 쓰기로 했습니다.

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면식이 없는 분이 절 뽑아 주셔서 우쭐했습니다. 남들 실린 시 보고 질투만 하고, 질투 끝에 제대로 읽지도 않았었는데 달라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래 이 시의 초고 제목은 풍경5’였습니다. ‘중첩된 시간은 고체가 되어간다는 제목은 외피 없는 우산대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경5’는 비 오는, 비 내리려는, 비가 올동말동한, 비 내리는, 비 그쳐가는 등등의 어떤 정황을 보여주는 제목일 수 있습니다. 긴 제목에 비해 외려, 깊고 함의하는 바가 많을 수도 있는 제목이라 생각합니다. dry하죠. 시치미 떼는 측면도 있고요. 그렇게 했으면 아마 제목을 읽지도 않고 내려간 분들이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未堂(공부는 직사하게 하지 않고 末堂이라고 떠들고 다녔더랬습니다. 지금이사 그분의 전집 1권을 곁에 두고 살지만요) 선생은 무제라고 제목을 달아도 사람들이 그 제목을 고민하면서 읽겠지만 말입니다.

 

시가 자기딸딸이(自慰)!’는 말이 있죠. 이는 시를 폄하할 때 주로 쓰이는 말로 기억되는데, 이 말이야말로 시를 재는 잣대로 퍽이나 유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무지한 제 생각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딸딸이라 함은 일단 자기 카타르시스가 전제된 셈이고 그 때의 자기 상태가 좋았다는 말인데, 시에서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詩作의 그릇된 한 경향성으로 <주관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시야말로 주관주의의 극치가 아닐까요. 다만 이 극치를 보편화시키는 게 관건인데(저는 외려 보편화시키지 않은 꼴통 같은 주관주의야말로 시가 되면 개성적인 좋은 시가 된다 보기도 합니다만), 그건 아주 고차원이니까 남겨두고, 일단 시는 시작한 시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이 말씀입니다. 제가 좀 무지해서 그런 판단을 내렸지 싶습니다만 발표되는 신작시 중 그 80%가 시가 아니라고 본다면 어찌 생각하십니까? 마치 누룩을 두고 술이라 우긴다고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술은 비싼 술이 있고 싼 술이 있고, 도수가 높은 술이 있고 낮은 술이 있고, 한국산이 있고 외국산이 있고, 일하는 데 먹는 술이 있는가 하면 잔치하는 데 먹는 술도 있고 가지각색, 천양지차죠. 그러나 그것은 누룩이 아닌 술이었을 때의 문제! 그러니 어찌 시인된 자 시를 발표하거나 발표하기 이전이거나 겁먹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요? 전 바르작바르작 떱니다. 겁이 나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그럽니다.

 

望遠조기축구회에 공 차러 갔을 때 일입니다. 체구가 상당히 큰 친구가 공을 차는데 한 열 걸음도 안 뛰면서 공을 차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이 그 친구 발등에 자석의 쇠붙이처럼 붙어들고 정확한 패스로 공을 연결하는데, 그 시야마저 넓어 놀랐습니다. 해서 옆에 사람에게 물었죠. 대학 시절 선수권전에 출전한, 선수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 뛰어요 배는 나오고?”

술 먹고 몸이 망가져서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해서 물었죠.

그럼 술을 줄이고 운동을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듣던 사람이 화를 내면서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더 올라갈 게 뭐 더 있다고 운동을 더 하냐고 하는 거예요. 술 먹고 놀면서 슬슬 하는 거지,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딜레마만 한 힘이, 아니 트라우마만 한 힘이 없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느리고 공을 못 차는 데다, 공 차는 건 좋아하고 해서 남 보다 일찍 나가고, 연습하고, 남이 하는 얘기 듣고, 고민하고는 했습니다. 요즘에는 게임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시합 전날은 술도 안 마실 뿐더러 가벼운 몸놀림을 위해서 살까지 빼려고 그러는데, 외려 핸디캡이야말로 축구로 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최근엔 공을 차다 다쳐서 축구를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겁났었습니다. 그런데 시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이르자 좀 부끄러웠습니다. 아프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거겠죠.

 

최근에 제 고민은 시적 재미란 것에 있습니다. 쓰는 사람이 무슨 낙이 있어야 하듯 읽는 사람(대상으로서의 독자라는 좁은 의미 말고)도 무슨 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를 즐기고 시를 찾아 읽는 사람들 말이죠. 이건 뭐, (fun) - 전 그걸 이라 읽습니다만 - 뻥조차 없는 시들 태반 아닙니까? 왜 재미란 것도 여러 가지 아닙니까? 슬픈 재미, 난해한 재미, 고독한 재미, 웃는 재미, 심각한 재미, 조용한 재미, 어두운 재미, 가벼운 재미, 쓸쓸한 재미, 억울한 재미 등등 많지 않습니까? 이 시 좋네, 하고 다시 읽게 되는 시가 드물어요. 그래서 저는 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죠. 내 시의 재미는 무엇일까. 내 시에는 시적 재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시적 재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시적 재미란 무엇일까. 어떤 지점에서 시적 재미는 구현되는가. 소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숫제 그냥 재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위에서 자기딸딸이 얘길 했습니다만) 전 제 시가 마음에 듭니다. ‘나문재 뻘밭’, ‘행운목 뿌리같은 이미지도 좋고 (내가 발견한 나만의 이미지만 같고), ‘사리를 풀어헤치는 첫술같은 심각한 어떤 지점도 좋고 국숫집엔 젓가락도 국수를 닮아간다’, ‘국수 먹는 모습은 뒤에서 볼 때가 좋다같은 발견도 좋습니다. 우산살 같은, 형식도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 시를 자칭 조리적 상상력이라 명명한 적이 있습니다.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느낀 식의 시가 아닌, 주체 - 행위 당자인 조리사의 상상력, 여기서 제 시의 시적 재미개성이 나오지 않나 감히 말해 봅니다.

 

제가 복이 많죠? 코너에 시도 실리고 이렇게 주절대는 기회도 오고 말이에요. 일 해서 돈도 벌고, 그와 관련해 시도 쓰고, 비전도 그 일에서 세우니 말입니다.

시는 다면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좀 방어적 성격이 강한 말입니다만 맞는 말씀입니다. 시는 다면체입니다. 그런데 좋은 시는 어느 측면에서 보나 좋죠. 부처님 똥구멍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부처님 똥구멍 쪽에 섰을 때야말로 앞쪽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클까요. 부끄러운 제 시도 부처님 똥구멍의 반의반, 아니 반의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무지한 제가 뭘 몰라서 드린 말씀입니다만-

<현대시학>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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