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북경엽서_최진화

也獸 2008. 1. 2. 12:15
 

북경엽서


최진화



열여섯 아들의 첫사랑이

홍역처럼 지나가고

붉은 열꽃이 뜨거워

집게에 물린 듯

내 마음도 잠시 정전되었다


네 넓적한 손에 내 손을 얹고

우리는 겨울이 가까운 북경으로 갔다

내 몸이 쏘옥 안길만큼 커 버린 남자여

어떻게 내 속에서 이런 네가 나왔니


안개로 시작하는 북경의 아침

붉은 자금성 하늘 위로 겨울 철새들 날아간다

사랑에 가슴 베인 남자여

솟구친 처마 한 끝에 그 마음 걸어두자

몇 십 번 저 철새 오고 간 후

비바람 견디어 새 살 뽀얗게 돋아 있을지

다시 와 만져보자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

사랑한다는, 살고 싶다는 기쁨을 가르쳐 준

최초의 남자여

네 마음 걸린 처마 옆에 그 옛날 걸어둔

한 여자의 마음

다시 붉게 펄럭이고 있다.

—『문학나무』겨울호



사랑은, 아니 사랑의 아픔은 유전된다. 북경에서 날아온 엽서가 하는 말이다. 그 엽서는 그림엽서, 해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솟구친 처마 한쪽이 도드라져 있다. 거기엔 잘 마른 무말랭이 같은 사랑과 이제 막 매달아 놓은 생간의 미끌거리는 붉은 빛이 함께 매달려 있다. 붉은 노을보다 더 붉은 이미지의 북경 엽서다. 그 엽서가 배달되었다.

사랑은 왜 유전되는가. 어미는 그 아픔의 크기와 깊이를 안다. 사랑이 완전해진다는 말은 상대의 상태와 같아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랑을 잃은 아들의 아픔은 이제 나의 아픔이다. 그건 어미로서만 나서서는 치유가 되지 않는 것! ‘최초의 남자’로 승격시켜야 사랑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

따라서 ‘최초의 남자’에 대한 근원적 인식에 들어간다. ‘내 몸이 쏘옥 안길만큼 커 버린 남자여/어떻게 내 속에서 이런 네가 나왔니’라는 인식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이 치유의 통과제의의 정점엔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사랑한다는, 살고 싶다는 기쁨을 가르쳐 준/최초의 남자여’라는 고백이 있다.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왔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살고 싶다는 기쁨을 가르쳐 준/최초의 남자’에게 고백하기 위한 나에 대한 나의 말이다. 사랑 앞에 여인은 부끄러움을 감수하기 마련이다. 이제 아들은 첫사랑의 홍역을 넘어서서 아들이자 남자로 어미 속에서 거듭나고 있다. 

이 시의 작은 맛 중의 하나는 ‘내 몸이 쏘옥 안길만큼 커 버린 남자여’로 ‘아들이여’를 피해 간 아슬아슬함과 더불어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로 역설이 주는 확장이, 그 진폭이 깊다.

북경 엽서 속에는 ‘그 옛날 걸어둔/한 여자의 마음/다시 붉게 펄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