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그리고 피딱지의 모자이크(송종규)/ 글 : 윤관영
녹, 그리고 피딱지의 모자이크
-송종규
하나 있는 아들에게 화낼 거리 아홉을 참다가도 한 번의 화풀이에 아홉을 다 쏟뜨리는 사람이 나다. 열패감이 크다. 이런 태생적 한계는 나의 대척점에 있는 어떤 사람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매한가지로 시에 대한 내 자질의 한계는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시인을 선망하게 만들었다. 그 대척점에서 나를 고무시키는 이가 송종규 시인이다. 그를 존경한다. (존경해야만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다, 하하.)
‘맹세는 빗나가고, 나는 전봇대를 꺾어/방문 앞에 심었다’는 무지막지를 힘들이지 않고 감행하는 게 그며, ‘오늘 내 독서의 시작과 끝은 역사 밖에서 기록된 한 마리 개의 울음소리였다’고 말하는 게 그다. 異質의 착종이 발랄하고 서슴없으며 자유자재인 게 그다. 그의 시가 가볍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시는 뭐랄까, 마치 피가 멎어, 굳은 수많은 상처와 같다. 피가 다뿍 흐르고 고름이 엉키어 있는 형국은 아니지만 상처의 과정을 보여주는 마른 피딱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케치 같으나 그 상처는 깊으며 발랄한 것 같으나 거기에는 깊은 울음이 있다. 다만 그는 그것을 들키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나는 언젠가 그런 송종규 시인의 시의 특징을 ‘주관적 객관성’이라 이름한 적이 있다.
송종규 시인과 나는 무슨 사이인가? 통 털어 세 번 만났고 밥 두 끼 먹었다. 원서문학관에서 한번, 시와반시 송년회에서 한번, 대구 시내에서 한번 보았는데, 그것도 여럿 속에서 끼어 보았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반한 시는 「떡집 여자」였다.
「詩人」이란 시에서 ‘그는 한 됫박의 피와 살을 흙과 물과 청동에 쏟아 붓는다/우레와 함께 그의 몸은 고꾸라진다’고 그의 詩觀을 드러내고 있다. 겁난다, 그래서 그가 더욱 좋다. 그의 시에 ‘풍금소리’라는 말이 보이는데, 참혹을 이기는 어떤 이미지로 여겨진다. 나의 태생적 한계는 또 과감하게 그 풍금소리 속에는 나도 들어있다고 여기고 만다.
<시안 여름호 / 줌렌즈>
-글/윤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