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아르투루 쇼펜하우어

也獸 2008. 8. 17. 11:47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아르투루 쇼펜하우어, 김미영 옮김, 책세상


 이 책은 참 힘들게 읽었다. 진도가 안 나갔다. 당연, 그간 철학 책을 멀리해온 탓이다. 운동권 시절, 조악하게(그러니까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객관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막시즘을 공부하고 염증을 느낀 탓이기도 하다.

 이 책도 읽던 것을 받았는데, 책도 인연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내게 동정심이나 연민이라는 단어는 머리에 입력이 잘 안 되어 있었고, 개념도 원개념과 많이 다르고 주관적이며 자의적이었다. 동정심은 조금 더 배우고 더 가진 자가 상대를 낮추어 보면서 베푸는 시혜이기에, 건방짐을 전제로 하기에 타기해야 할 악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민은 상대를 안타깝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도 악덕이라고 생각해 왔고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이라는 말도 솔직히 따지고 보면 나를 졸래 매는 갑갑한 관습이나 알량한 양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원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동정심’과 ‘연민’은 도덕의 기초로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근원적 도덕인 셈이다.

 나는 독서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줄치고 모은 글들은 내가 어떤 글을 쓰는데 적절한 인용구가 될 것이다. 그런 와다음이 좋다.

 철학책을 꾸준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서 좋다. 쇼펜하우어가 칸트를 비판하는데 칸트의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어서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좀 도움이 된 것은 앞의 책 ‘倫理’에서 고진의 생각이 칸트의 철학에 힘입은 바 많다고 해서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기초에 대해서, 생에 있어서 기본인 도덕에 대해서, 그 기초에 대해서 무지했고 알려고도 아니했다.

    


도덕의 기초인 동정심이 일어나는 근거를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는데, 산스크리트에서 빌려와 “이것은 너다”라고 표현한다.


“도덕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모토다.


그는 철저한 분석과 독창적 사유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무한한 이기심과 그것을 감추려는 교묘한 노력들을 폭로한다. 도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이 사실은 이기적 근거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치지도 않고 설파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선천적 도덕 원칙도 보편적 도덕감도 없으며, 종교적 가르침도 친정한 도덕적 행위를 일으킬 수 없다는 증명이 가져올 결과를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유인의 모습으로, 진리만을 따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인간 행동의 내면에 숨은 동인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이와 같은 폭로의 목적은 부정과 체념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참된 도덕적 동인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가 도덕성을 가르칠 때, 그것을 도덕성 자체에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근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도 윤리학적 기초는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어떤 한 형이상학, 즉 세계와 현존재 일반에 관한 주어진 설명에 근거하고 의지해야 한다.


플라톤이 “너는 세계 전체의 본성을 알지 못한 채, 영혼의 본성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두 주머거을 노고와 허영으로 채우는 것보다 한 손을 고요함으로 채우는 것이 낫다”는 콜레트(Koheleth)의 격언을 상기하는 일뿐이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고 본 아우구스티누스


윤리학에서 추론은 쉬워서 저절로 되므로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판단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윤리학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윤리학을 행복주의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 칸트도 윤리학에서 행복주의를 겉으로만 추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선에 관한 그의 이론에 덕과 행복 사이의 신비로운 연결을 여전히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행복은 덕이다-동일률, 행복은 덕으로부터 온다-이유율


당위 일반이 단순히 강요에 기인할 수 있는 반면에, 의무는 책임, 측 의무를 떠맡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자기 의무라는 제목으로 흔히 제시되는 것은 처세술이거나 섭생법 수준의 지침들로서, 이들 모두 본래적 도덕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약품을 사용한 후, 거의 모든 병에 같은 약을 처방하는 의사를 때때로 본다.-쇼펜하우어의 칸트 비판 예 - 가면무도회에서 저녁 내내 가면 쓴 미녀의 사랑을 얻으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 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챌 때까지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남자 말이다.


인간 밖의 이성적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체 밖의 무게 있는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기주의는 모든 의지 작용을 위해 언제나 준비돼 있고 근원적이며 살아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규범이다.


우선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므로 상관적이고, 또 그것이 그에 따라 평가되는 어떤 다른 것과 비교되므로 비교적이다.


이기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충만한,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이기주의를 숨기려고 친절함을 고안해냈다.


반면에 ‘명예’라는 암호가 첨가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어길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주된 근본 동인은 이기주의다. 그것은 현존재와 행복에 대한 갈망이다. - “나를 위해 도는 것을, 남을 위해 아무것도.” ‘ 이것이 그의 모토다. 이기주의는 엄청나다.


괴테-이 세상에서 무관심과 혐오는 참으로 본래적인 것이다.


옳거나 선한 행위에 이기적 동기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언제나 남아있다.


행위는 동정심에 기인하는 한에서만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동정심이 작용하는 처음 단계는, 나에게 내재하는 반도덕적 힘의 결과로 나 자신이 타인에게 초래할 고통을 저지하고 그에 대항하여 “멈춰!”라고 소리치는 단계이다.


그가 보호해야 하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공격하고 훼손한다면 이중의 불의가 발생한다.


칸트는 그 특별한 노력을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을 비난하는 것에 쏟았어야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것이 본래적인 악마적 악덕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동정심에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동정심은 도덕적 가치를 갖는 행위들의 유일한 원천이다. 다시말해서 동정심은 어떤 이기적인 동기도 없는,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 내적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들의 유일한 원천이다.


기독교의 도덕은 동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결점을 갖는다.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여 너의 행복을 이룩하라’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품게 하는 것이 연민이다.


쇼펜하우어의 정의관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다. 타인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 정의의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