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정임/ 윤관영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 *문창2008년가을호
윤관영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문창2008년가을호
흙속에서 캐낸 싱싱한 이미지
김정임(시인)
윤관영 시인의 첫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이 출간되었다. 시인의 시편들은 생을 향한 힘찬 에너지가 끓어 넘치면서 긍정적이고 따스하다. 젖은 흙에서 방금 캐낸 듯한 싱싱한 이미지들을 활용하였기에 시인의 시는 건강하고 정직하게 읽혀진다.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농촌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농촌의 소박한 풍경과 지난한 삶을 쫀득쫀득하게 반죽해서 흠잡을 데 없이 잘 빚어, 한편 한편 완성품으로 시집에 올려놓은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시를 빚어냈으면 터지고 삐뚤어진 작품 하나 없이 이렇게 고루고루 잘 빚어냈을까. 그리고 솜씨 좋게 빚어놓곤, 시의 행간에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화두처럼 던져놓곤,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번 찾아가게 만든다. 노동을 통한 삶의 진정성과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존재의 이유들이 숨은 보석처럼 박혀 있다. 하루를 사는 일을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 시집에 있다.
시의 색채가 대체로 밝은 빛이다. 툭툭 혼자 내뱉는 말 “내 살가죽을 포로 떠어?”(「방앗간,랩 포장」) 엽기적인 이 말투가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온몸이 근질근질한 한 개구쟁이 소년이 연상된다. 그러나 밝다고 하여 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베인 살에서 핏방울 돋듯/ 그렇게 뒷덜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오늘 하루 잘 살았다」)처럼 그렇게 몸을 던져 시를 써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의 성숙과 완숙의 과정은 삶의 고통과의 부단한 싸움과도 같다.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밀고 왔기에 그 울림은 더욱 깊어 보인다.
“엉덩이가 곱작 담기는 어둠 속에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소리가 있었네” (「스텐 세숫대야」) 젊은날에 대한 향수와 순수함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일부러 시를 위해 도회지를 떠났는지 그 이유까진 모르지만 시인은 몇 년 전부터 고향인 충북 단양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담배 한 대 피우려고 바깥에 나가면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고 온 사방이 숲이다” 시인이 사석에서 한 이 말은 “턱만 들면 눈에 꽉 찰 들녘”(「추일서정」)과 일치한다. 시인으로선, 천혜의 환경이다.
좌대座臺에 올려져 있다
그냥, 있다
살의, 살
먼지를 닮아가는 살색
눈도 없는 단두斷頭의 몸이
정면을 보고 있다
단수, 단족의 단세포
밋밋한 가슴, 도시 핑계거리를 주지 않는다
무언에 무표정, 무반응,
맨가슴
이러언―
똥똥똥 치면
빈 속의 말…
이걸 그냥 ,
패대기치고 싶은―
그걸로
넌, 날, 끈다
―「그냥 있는,」 전문
상반신에 양팔, 다리가 잘린 채 먼 곳을 바라보는 토르소를 보면 시인은 무언가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를 그러한 표정 때문에 기가 죽는다. 사랑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허무의 모든 표현을 대신하는 토르소. “그걸로/ 넌, 날, 끈다” 시인은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네가 나를 사로잡는데 이유 같은 것 있을 수 없다. 그냥 나를 끌어들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서 있으면 된다.
그런데 “똥똥똥 치”고 싶다니, 시인의 호기심은 유별나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 큰 가지 하나
부러진다
넉가래 자루를 턱에 괴고
다들 그 나무를 본다 그게 어디
늘 푸르러 버릴 줄 몰라서만 이리
젖은 눈은 넉가래에 붙어서도 잘 털어지지 않는다
다, 봄이 가까운 탓
봄맞이도 저만은 해야지 싶다
―「춘설春雪」 부분
마을 입구에 모여 동네 주민들이 눈을 치우는 농촌의 서정이 쉽게 연상된다. “회관 스피커에 나오는/ 노래에 맞춰 넉가래질을 한다” 그러다가 소나무 큰 가지 하나 부러지는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꽂힌다. 늘 푸른 소나무는 부러질 줄도 모르는, 피도 인정도 없는 것으로 알지만 소나무도 어떤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가슴으로 몸으로 실리면 무너지고 만다. 피가 돈다. 감성에 꺾일 줄 안다. 봄을 오는 것을 몸이 먼저 아는 것이다.
“봄맞이도 저 만은 해야지 싶다” 가슴 속에 용암처럼 뜨거움을 안고 살아가는 소나무가 봄을 향해 먼저 달려 나가고 있다.
꼴 같잖은 이 축대는 세월이 힘이래유, 철사야 사그러지먼 그만이지만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로 바랭이가 집을 짓고 맘마꾸 홀씨도 날아와 뿌렁가지 박고 낭구 이파리도 쎄이구 하다 보믄 잔낭구도 지절로 자라서 지덜끼리 꽉 아물어 세월이 갈수록 딴딴해진다니께유, 비바람에 추우 더우 해 달 별 머시다냐 그것들이 다가 힘이래유,
(…중략…)
축대야말루 뭉그러져바야 지대로 알지유
―「축대築臺」 부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뿌리내리고 어우러져 단단한 생의 축대를 쌓아가는 민초들의 이야기. 인위적인 기교대신 “돌멩이 사이”로 “홀씨”가 싹을 틔우고 “해 달 별”이 모두 힘이 되는, 굴곡진 인생에도 꽃이 피고 해와 달이 뜨며 제 길을 만들어간다. 무생물인 돌멩이도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려는 의지가 있다는, 실존하는 것들의 섭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충청도식 부드러운 사투리가, 육성으로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해 달 별 그게 힘이 되어 잘 무너지지 않는 축대, 시인에게는 시를 향한 열정이 힘이 되어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축대가 된다.
피로가 썰물 파도 치듯
발톱눈으로 빠져 나간다
저린 발이 풀리는 것마냥
발바닥이 펴지면서 알싸하다
하지감자를 캔
흙살과의 해종일
베인 살에서 핏방울 돋듯
그렇게 뒷덜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샤워 샤워 샤워)
수제비 반죽을 떼어 던지듯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니스 바른 듯하던 땀
안경다리에 소들소들 소금기
지독한 땀 내는 향수 내와 같다
누운 지금, 피로가
발톱눈으로
검은 피 빠지는 듯하다
―「오늘 하루 잘 살았다」 전문
참 기분 좋은 시다. 슬라이스 얼음을 넣은 아이스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는 듯, 간혹 작은 얼음덩이가 입 속에서 간지럽고 상쾌하게 바스라지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드는 시이다. 하루를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흘린 꿀같은 땀방울. 피같은 땀방울. 얼마나 달고 맛있을까. 가만히 앉아서는 얻을 수 없는 노동의 비싼 값. 시인은 하루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해 끝내고 자족감의 시를 또 덤으로 얻는다. “발톱눈으로 검은 피 빠지는” 하루를 잘 산 시인이 스스로의 모습을 배추밭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배추잎이 오그라들면서
끝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꿀통이라 한다
(…중략…)
같은 비료 같은 농약에 한 주인일 텐데
이런 꿀통들이 왜 있을까
뿌리째 뽑아서 들이켜고 싶은 꿀통들
꿀은 스스로 간을 맞춘
소금이 필요 없는 존재
이 꿀통에서는 시인의 냄새가 난다
저 죽는지 알면서도 끝내 못 놓는
그 하나, 썩어
간이 되는 그…
몸통으로 칼 받는 그…
―「꿀통」 부분
꿀통인 줄 알면서 시를 쓰지 않고는 못 사는 시인. “저 죽는지 알면서” 인내와 정성을 가지고 작품을 물고 늘어져 끝을 보고야 마는, 시인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인고의 시간끝에 얻어지는 시. 득도한 것처럼 환희에 들떠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달리 그리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지만 우리는 그냥 몰입하고 또 몰입하는 거다. 그저 절실한 삶의 노래를 혼자 조용히 부를 뿐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할 것이다. 좋은 시는 좋은 영혼과의 만남을 뜻한다. 이번 시집에선 많은 시가 농촌의 서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지난한 농촌의 풍경이 시인의 손끝에서 신성한 우리들의 마음 속 고향으로 다시 태어났다.
“처녀 시집이지만 내게는 시선집이다.” 시인의 말처럼 시선집인 시. 인고의 시간으로 오래 뜸을 들인 만큼 허튼 시 없이 차돌처럼 단단했고 시인의 가슴에서 오랫동안 데워져 있어서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따뜻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언어를 사유하고 표현했다. 맺히고 뒤틀린 곳이 없이 쓸쓸한 마음도 순하게 읽혀졌다. 시인이 가진 내공의 힘일 것이다.
무덤덤하게 사는 인간사의 쓸쓸함과 허망함대신 오로지 현재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궁극을 지향하고 있었다. 경박한 허세도, 잠언도, 까닭모를 관념, 화려한 수사도 개입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