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

최준 시인의 시집 서평/다층

也獸 2008. 10. 13. 18:00

아픔과 능청 틈새에다 지은 집

― 윤관영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

 

최 준

 

 눈 지그시 감고 뒷산 중턱 너럭바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어깨를 좌우로 슬슬 흔들어대며 이 뭣 같은 세상과 거리를 좀 두고 살거나, 자신이 마치 우주 운행의 한 축이라도 되는 양 세상의 중심에서 팔짱끼고 떠억 버티고 살거나, 사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그러한 자신이 어쩌다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문득 이뻐 보이는 순간이, 그 때가 행복한 거 아니겠냐고, 윤관영 시인의 첫 시집은 반복해서 묻고 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밀교(密敎)의 주술사가 어둑신한 사원 뒷마당에서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만 같은 이 반복은, 묘한 매력의 주술성마저 적잖이 지니고 있어서, 시집의 시들을 읽어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마법에 걸려들고 말아,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입술 사이로 실실 삐져나오는 정체 모호한 웃음을 웃게도 되고 만다.

 이 웃음의 정체는, 시집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돌아보면, 야유회 가서 둘러앉아 하는 단체 놀이에 끼어들지 않고 물가를 어슬렁거리며 딴전을 피우거나, 아니면 심각한 현실적 의제로 고민들 하고 있는 회의석상에서 혼자 달관한 듯 천연덕스럽게 벽에 걸린 산수화를 기웃거리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나 다름없는 건데, 거기엔 양념으로 소금 같은 삶의 슬픔도 간 배어 있고, 청양고추의 톡 쏘는 혀 아린 맛도 느껴볼 수가 있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심심하지 않고, 잠시도 지루하지가 않다.

 시인답게, 아주 짤막하게 쓴 시집 서문에서 그는 “처녀시집이지만 내게는 시선집”이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그의 이 말 속엔 ‘시간’과 ‘선택’, 혹은 ‘발췌’라는 의미가 다 들어 있지만, ‘시간’은 시를 써 온 ‘세월’이며, ‘선택’, 혹은 ‘발췌’는 시에 대한 ‘자기검열’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듯 그 또한 자신의 시업(詩業)에서 무수한 난산(難産)과 좌절을 겪었을 것인데, 삶에 정직한 그는 시에도 너무 정직해서 그의 시들에서는 삶과 시에 대한 모종의 결벽성마저 느껴진다.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그는 마치 ‘삶이 곧 시’라는 명제를 퍽 오랫동안 끈질기게 끌어안고 살아온 듯하다. 드러나 있던 드러나 있지 않던 시의 화자는 예외 없이 일인칭이며,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소재로 빚어낸, 알밤처럼 옹골찬 시편들로 시집이 채워져 있다. 그 일인칭 화자는 곧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이 경험한 삶이다. 이 삶의 조각들이 서로 아귀를 맞물려서 빚어내는 풍경은 눈물 나게 아름다운 삶의 무늬들인데, 화자는 체를 치고, 깨를 볶고, 빈집을 헐고, 질통을 짊어지고, 국수를 삶는 노동의 일상을 살았고, 그런 자신이 어쩌다 이뻐 보이기도 하는, 따스한 자기 긍정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다.

 그렇다고 화자는 도사나 선사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담그고, 결국은 자신인 거울 속의 풍경을 기웃거리며, 세상에 대한, 삶에 대한,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이 천진난만 속엔 모종의 장난기와, 현실의 궁핍과 고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고집도 아울러 들어 있다. 더운 여름날 한낮에 찬밥을 찬물에 한 대접 말아 텃밭에서 막 가져온 배추로 담근 겉절이를 반찬 해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퍼먹는 그 맛!

 여기, 그의 시집에 실려 있는 첫 시를 보라.

 

평범하기로 쌀이 어떨까

아님,

덜 까진 현미는

턱 허니 가슴패기 열어제친 보리

자꾸

뜨물 게워 내는 보리는 어떨까

제 살 터진 뗑그런 콩

고소한 내 콩은 또 어때

잡것,

온전히 속살 터져 핏물 내는 팥

차라리 팥, 팥은 또 어때

아서라, 내

밥에 쌀눈을 보지 못하는 이들

혼쭐 한번 내주겠다

떡판 뒤집듯 뒤집어 보겠다

오진 꿈 꾸었노라

쌀도 현미도 보리도 좋지만

콩이야 팥이야 말도 많지만

차라리 내 찹쌀이 될란다

날 쳐

날 녹여

남 끌어안는 찹쌀이 될란다

애꿎은 체만 탁탁 쳐대는 시절에

오오

― 「체 치면서」 전문

 

 서문에서 밝히기를,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발표순이라 했으니, 맨 앞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아마도 그의 첫 발표작일 터인데, 서시 같기도 하고, 선언 같기도 하다. 시집 속 시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 시 또한 해설의 친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숙련공이 기교의 손질로 깎고 다듬어 놓은 정원수가 아니라, 야생의 숲에서 자란 한 그루 나무를 마주대하는 듯한 느낌! 이 느낌이 바로 그의 시의 매력이고 강점이다. 애써 예쁜 시로 만들려는 노력의 허망함을, 그 헛됨을, 그는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던 건가.

 그의 시집 속 시의 화자는, 아니, 시집 말미 자술연보 속의 시인은, 자기가 잘못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잘못 산 자신의 삶을, 사용한 일회용 컵으로 던져버리거나, 망가진 티브이로 구석에다 방치하지 않는다. 잘못 살았다는 말은 그래서 일종의 엄살이거나, 반어로도 읽힌다. “살아서/살려고 시장에” 가고, “그리고그리고그리고로/이어지던 생은/그런데에서 한방” 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세우고/한 잔하러” 가는 게 시의 화자다. 그다. 고통과 절망 속에 의지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여유도 부리고, 간혹은 생의 옆길로도 흘깃, 눈동자를 굴린다.

 시의 언어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언술들 같지만, 양 미간을 조이고 다시 한 번 읽으면 거기엔 적잖은 사유가, 그 깊이가 느껴지고, 만져진다. 한 권의 시집에 좋은 시 한 편만 들어 있어도 책값이 아깝지 않은 법인데, “국수가 에부수수/ 벚꽃처럼 끓는 밤”에 이 시집을 읽는 일은 내내 행복하다. 현실 삶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따스한 긍정이 있어서 그렇고, 만개한 꽃 한 송이에서도 ‘절정’ 이후를 읽어내는 심안(心眼)이 있어서 그렇다. 그대들은 어쩌다, 자신이 이뻐 보인 적이 있었나.

 

새벽에, 개똥을 두엄더미에 던지며

처먹고 똥만 싼다고 부삽 득득 긁지만,

기분 좋은 투정도 있기는 있는 것이다

투정에 걸리는 밤송이와 도토리집은

부삽질을 부드럽게 한다

저를 열어 제 속의 것 떨어뜨린 것이

바짝 세운 가시를 그대로 두고

무른 안부터 녹아 가면서, 금세

거름빛을 닮아가는 중인 것이다

부삽이야말로 밤송이 까는데 제격이지만

발에 밟힌 밤송이는 이슬에 젖어

눅눅한 것이어서, 가시마저

밤 궁둥이마냥 이뻐 보이는 것이어서,

돌팍을 텡텡 쳐보기도 하는 것인데

눈진한 아침도 이때, 흠칫

이슬을 터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봐도

내가 이쁠 때가 있는 것이다

― 「어쩌다, 내가 이쁜」 전문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이 시에 관해서는, 그리고 이 시집에 관해서는, 빤할 따름일 췌언들 대신에, 오탁번 시인의 시집 표사 말씀을 여기 빌린다.

 “부삽으로 개똥을 두엄더미에 내다버리면서 구시렁대는 시적 화자의 눅진눅진한 어조나 이슬을 툭 터는 가을아침의 맑은 공기가 그대로 코끝에 스미는 듯한 서정의 이 놀라운 힘을 보라! 누룽지 맛, 좀 쉰 찐 감자 맛, 메주 뜨는 퀴퀴한 냄새가 어우러지면서 번져나가는 파문이 마냥 그윽하다. 윤관영은 최근 풋풋하고 섬뜩한 힘을 쏟아내기 시작하더니 고집스러울 정도로 뚜릿뚜릿하게 힘 있는 자기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싹싹하고 학벌 좋은 무척추들과는 달리, 또 노동의 땀을 처세의 도구로 삼는 헛된 것들과도 달리, 언어에 대한 세심한 천착을 내공으로 쌓으면서 독특한 어조로 시를 쓰고 있다. 이제 우리 시단에도 눈뜨고 사는 이들이 아주 없지 않으니 그가 빼어난 시인으로 우뚝 서는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자술연보를 보면 시인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300원짜리 라면을 못 먹던 가난 속에서 고졸 검정고시를 치고, 시장통에서 리어카 짐바리꾼으로 일하고, 계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시를 쓰기 시작해서, 시인이 되었다. 아무튼, 그의 굴곡 많은 파란만장 인생이 이 시집을 이루었다는 사실 하나는, 시를 읽으면 거듭 거듭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은 고통 너머에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따스한 긍정의 세계를, 너스레도 좀 있고, 유머도 섞어 넣어 열어보여 준다. 읽으면서, 드물게 행복한 시들로 알차다.

 시집에 실려 있는 흑백사진 속의 시인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앞에 놓인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다. 일부만 보이는 바둑판에는 착점한 흰 돌과 검은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판세가 어떤가. 진지하게 반면을 살펴보고 있는 지천명(知天命) 시인의 첫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은 하늘 쳐다보며 천명 알기를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에, 세상을 아슬아슬 쭈뼛쭈뼛 가까스로 버텨 온 자신을 비로소 온전하게, 바둑판 판세 살피듯, 대견해하면서 들여다보게 된 한 시인의, 눈의, 마음의, 삶의, 짠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