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부뚜막/장석남

也獸 2009. 5. 21. 21:56

부뚜막

           -장석남

 

부뚜막에 앉아서 감자를 먹었다

시커먼 무쇠솥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솥 안에 금은보화와도 같이 괴로운 빛의 김치 보시기와

흙이나 겨우 씻어낸 소금 술술 뿌린 보리감자들

누대 전부터 물려받은 침침함,

눈 맞추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도 없이 목을 늘여가며 감자를 삼켰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감자를 삼킨 것인지

무쇠솥을 삼킨 것인지

이마 위를 떠도는 무수한 낮별들을 삼킨 것인지

 

눈물이 떨어지는 부뚜막이 있었다

어머니는 부뚜막이 다 식도록, 아궁이 앞에서

자정 너머까지 앉아 있었다 식어가는 재 위의 숨결

내가 곧 부뚜막 뒤의 침침함에 맡겨진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치마 끝단을 지긋이 한번 밟아보고 뒤돌아설 뿐이었다

 

마당 바깥으로 나서는 길에 뜬 초롱한 별들은

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지긋이 누른다는 것이

이후의 내 상식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장이 꺼멓게 그을린 부엌 찬 부뚜막에 수십 년을 앉아서 나는

고구려 사람처럼 현무도 그리고 주작도 그린다

그건 문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서룬 사랑이다

그것이 나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學說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詩로 알고 그리고 있다

—『한국문학』가을호

 

*해설

이 시는 그을음빛 바탕에 돼지비계빛이 종주먹처럼 다문다문 박혀있는 그런 이미지이다.

시간은 어둑신한 무렵부터 자정 무렵 까지고.

이 시가 환기해 끌어 올린 생각은 두 가지다. 성경 이야기로 - 사냥을 주로 다니던 ‘에서’와는 달리 어머니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던 ‘이삭’이라는 아이 생각, 그리고 어릴 적 원체험으로 부뚜막 위에 있던 흙빛의 행주가 생각난다. 그것은 이 시가 불러일으킨 나의 이미지, 당시는 양회가 귀해서 고은 황토 부뚜막 그대로 였다.

생솔가지를 태워 지핀 불은 굴뚝이 잘 빨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낸 연기는 부엌 천장에 머무르다 부엌문과 처마 아래로 난 통풍구, 그리고 뒤란으로 난 문으로 빠져나가던 연기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무쇠 솥은 컸으나 먹을 것이 없어서 걸근거리던 그 시절. 기형도의 ‘아흐, 칼국수처럼 풀어지던 어둠’이란 독백은 이 분위기와 들어맞는다.

‘물도 없이 목을 늘여가며 감자를 삼키’는 모습도 선명하지만 ‘어머니의 치마 끝단을 지긋이 한번 밟아보고 뒤돌아설 뿐이’라는 이미지가 깊고도 넓게 울린다. ‘초롱한 별들은/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지긋이 누른다는 것이’은 그 확장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부뚜막’은 ‘부뚜막’이라 이름 하는 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지금은 싱크대에 묻혀 잊혀진 이름인 부뚜막, 불 들인 부뚜막에 걸터앉으면 따듯해져 오는 궁둥짝의 촉감만큼이나 그리운 이름이다.

토마토를 소금 찍어 먹는다는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다. 감자도 그러한데, 소금을 찍어 먹는 농작물에는 어떤 슬픔의 기미가 묻어 있나 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詩로 알고 그리고 있다’는 고백에서 보자면 이 시는 시인의 시론시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굴뚝과 감자는 어떤 친연성이 있다. (부주간_윤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