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책/정준영
也獸
2009. 6. 5. 22:29
책
정준영
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밑줄을 긋는 곳은 특히 마음에 든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엔
밑줄을 긋지 않는다
표시를 하지 않는다
몰래 쳐다본다
누가 들춰 봐도 알지 못하게
엉뚱한 곳에 표시를 한다
나의 책은 누가 볼 리 없다
나의 책은 누가 볼리 없지만 누군가가 볼 수는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맡줄을 긋는 것은 마음에 드는 구절일 수 있지만 진심을 들킬 수 있으므로 밑줄을 긋지 않거나 표시를 하지 않고 다만 몰래 쳐다본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엔 누가 들춰봐도 알지 못하게 어뚱한 곳에 표시를 한다. 왜, 들키기 싫을 뿐더러 들키면 안되니까. 그만큼 소중하니까 그렇다.
그러나 그 소중함은 화자에게만 그렇다. 왜냐? 나의 책을 누가 볼 리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게도 그런 위악이 있다,는 지점이 이 시가 끄는 매력이다. 서정주의 시 중에 제주도 해녀도 가장 귀한 전복은 님 올 때 주려고 안 따고 둔다지 않던가.
정준영의 어떤 시, 팥죽더러 팥죽이 아니라 하면 그 붉은 빛을 어디다 감추나 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짧지만 명치를 한 방 맞은 듯 얼얼하다. 왜, 내게도 그런 위악이 있음을 이 시를 통해 들켰으니까, 그렇다.
나의 이 잡글을 누가 볼 리 없다. 다만 이 시는 짧아서 좋고 더 좋다.
<정표 예술 포럼/꽃이 바람의 등을 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