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모음
《2006년 봄호 계간 시평》 -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⑤
1
시가 어렵다고, 더 쉽고 투명하게 노래할 순 없느냐고, 말하지만
독자여, 그러기엔 이 세상엔 너무 많은 흐린 비가 내리고,
(김상미,「담쟁이덩굴」부분)
위 시에는 시인이 독자와의 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고민이 담겨 있다. 이는 독자가 창작자인 이와 같은 시인의 어려움을 긍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시인이 독자와의 소통을 내세워 쉽게 쓴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 현대시는 난해한가? 왜 이해하기 쉽게 쓰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은 대체로 시 이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한 문학 독자의 입에서 나오기 일쑤다. 현대시가 어렵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 자체를 즐길 줄 모르는 처지에 있다>고 독자의 문제를 지적한 유종호의 말이 있는 반면에 <시에는 화자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뿐 의미전달의 대상인 청자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의 자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고 시인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숭원의 말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렇다면 독자와 시(시인)는 왜 이렇게 양극단화 되었는가?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보르헤스가 그의 『불한당들의 세계사』 서문에서 언급한 독자는 지금의 우리 시에도 존재하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장르로는 영화 쪽으로 기울었으며 기호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바일로 이동했다. ‘좋은 독자’는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것을 찾는 존재로 변이해 갔다. 여기에는 시인도 한 역할을 했으니 그 바탕에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아니, 성장케 한다.(김수이)>는 자학에 가까운 독자 포기가 있었다. 교환가치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 많은 시인들에게 ‘해체’와 ‘균열’은 이상적 상태를 전제로 한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그저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 여기며 <좋은 시가 지닐 수 있는 당대성이란, 당대의 현실을 뛰어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학 인구들에게 강력한 ‘매혹’이나 ‘거부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장욱)>는 믿음을 가진 시인 일군들에게 독자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도 못 되었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과제가 있으니, 그렇다면 이제 누가 시의 독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시인들이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여 독자층이 넓어질 것 같지도 않다. 엄정하게 따져 보면 시의 독자는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 시를 쓰는 사람들, 시를 평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시인 지망자의 양적인 규모가 좋은 시를 알아보고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 시를 부축하는 양질의 독자층의 유지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최원식)>라는 진단에 이르면 독자의 문제는 수용과 소비에 있어서 더욱 비관적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독자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는 시인 본인들이 독자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그 자리는 커졌다. 여기서 발생하는 독자의 문제가 또 있으니 시인 독자 내부의 분열과 서로간 불인정이 그것이다. 식상하다고 폄하되기 일쑤인 기존 서정시풍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인들’ 혹은 ‘실험성의 시들’이라 명명되어지는 ‘난해성’의 시들이 다른 한편에 있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시인 독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불소통의 시라는 문제와 더불어 이해받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불소통이 목적이라는 면에서 문제라면 그 반대편의 시는 안이하다고 말하여질 수밖에 없는 형식과 내용이 문제다. 여기서 불신과 불화는 서로를 독자로서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이 동업자이자 독자인 관계(시인 독자)는 고전적인 독자 관계와는 달리 그 거리가 줄어들 수 있고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가 그나마 존재하기에 다소간 희망적이긴 하나 그 골이 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젊은 시인들’은 박형준의 다음 글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낭만적 상상력은 대개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된 감상의 산물일 때가 많다. 이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의 시와 자신들의 시를 구별해 내 독자적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잎과 가지만을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키치든 문화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시인이 그것에 대한 ‘중독자’이자 ‘반성자’(김현)가 되지 않으면, 그 양자간의 거리에서 빚어지는 ‘긴장의 시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적 가치도 태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 감정에 가까운 반감을 가진 시인이라 생각하면 권혁웅의 다음 글을 참고하면 좋다.
……그래서 젊은 시인들은 앞의 비판을 이렇게 고쳐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풍요롭다, 그들은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은 존재론적인 통찰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추(醜)와 불협화음은 처음부터 미의 범주였다……미적 형질의 변화를 그들은 비평이 정식화하기에 앞서 실현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2
삼거리에 용달차가 멈춘다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
액자 속 사진에서 머리칼이 휘날린다
저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
함부로 단정지어본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
주기적으로 새순과 어린 나무들이 실려오고
아무도 그들의 생일을 기념하진 않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의 손질과 이동을 도울 뿐이다
시절이 새초록해지면 아이들이 소풍을 온다
도시락을 흔들며 목련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삼거리를 건너온다
아이들은 나무를 흔들고 꽃을 쥐었다 놓지만
나는 내버려둔다
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
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
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
—김성대, 「일월식물원」, 『창작과비평』겨울호
이 시는 생이 극히 부정적인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희망을 읽어내고 있다. 여기서 생이 부정적인 상태에 있다함은 화자와 주변인의 모습들이 그러하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라는 독백에서 보듯 화자는 스스로를 대단찮게 여기고 있다. 소도시의 삼거리에는 이사 전용 차량이 아닌 ‘용달차’가 오는 곳이며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에서 보듯 포장이사가 아닌 짐 등속이 훤히 보이는 날림 이사를 하는 이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게다가 자주 보게 되는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함부로 단정지어’도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는 부류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정’이 들어맞었던 사람들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화자이다.
이 시가 돋보이는 것은 세상을 읽는 코드의 새로움 때문이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는 진술에는 생의 단조로움과 별것없음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모험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적인 일상이 끌어낸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라는 회의는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세계 인식을 거쳐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고 단정하는 준엄한 자기 검열에 이른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화자가 보잘것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비록 소도시의 작은 식물원이지만 그곳은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 곳이다. 따라서 화자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닌 ‘도울 뿐’인 존재다.
여기서 화자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계관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천적’ 개념이다. ‘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그것도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삶에 쫓겨 주기적으로 이사를 하는 그들도 사실은 세상의 천적들이 그들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의 다른 말이 된다. 이러한 인식은 아이들에게로 이어지는데, 꽃을 쥐고 흔드는 아이들을 내버려두는 데까지 이른다. 분명 아이들의 체온이 꽃에게는 고통이겠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꽃을 강하게 해준다는 말도 된다. 역설적으로 아이들도 강한 존재가 된다. 그러한 인식은 아이들에게나 이사하는 사람들에게 한발 물러선 긍정을 가능케 해 준다. 여기서 ‘일월’식물원은 인생을 말하는 변형된 이름이다.
천적들은 서로를 닮게도 하는데,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니 궂은 일을 겪었거나 복된 일이 있은 연후에는 달 한번 볼 일이다.
두 평 반 방에 두 평 반 볼트의 형광등 불빛
내 음부까지 환하게 밝힌다
창 밖 은행잎이 은행, 은행 하고 떨어진다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른다
이름이 나나가 된다
내 이름 가운데 너를 깨뜨려본다
우리라는 Hommelette
나이프로 나를 잘라 포크로 너를 찍어올린다
시간이 같이 찍혀올라와 간간이 씹힌다
방의 노른자위로 빛나고 있는 불빛,
을 흰자위로 흐물거리는 내가 먹고 뚱뚱해진다
두 평 반 킬로그램의 나, 나나
사각으로 사각거리는 사각의 방
사각의 나나, 나
모서리가 날카로워진다
시간이 내 몸을 사각으로 갉아먹는다
사각으로 지워지는 나, 나
점멸하는 형광등 불빛
방의 각도가 기울어진다
내가 기울어진 채 깜빡인다
기울어진 시간이 방금 전에 멈춰 서 있다
—장희정, 「두 평 반의 나나」, 『문학동네』겨울호
이 시를 보면서 김남주 시인이 시구가 떠올랐다. 독방에 갇히면 가지고 놀 것은 제 자지밖에 없다는 말. 이 시에서도 두 평 반 방에 유폐된 자의 특징이 ‘내 음부까지 환하게 밝힌다’로 드러나 있다. 갇혀서는 외적으로 관심을 가질 것은 그것밖에 없다. 유폐시킨 자는 도망갈 곳 없이 가둔 이상 감시해야 하므로, ‘방의 노른자위로 빛나고 있는 불빛’을 설치하게 마련이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매저키스트적 성격 혹은 매저키스트적 사고의 공통된 특성은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관심 밖에 있는 힘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데 있다. 유폐된 자들의 특징이야말로 그렇다. 화자는 ‘창 밖 은행잎이 은행, 은행 하고 떨어진다’는 진술에서 보듯 밖을 내다보는 것까지만 허용된 갇힌 존재이다. 그에겐 달리 호명할 대상이 없으며 따라서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르’는 지경에 이른 자이다. 그는 자신을 처벌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도록 설득하며 그 고통을 즐긴다.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르’며 그렇게 하면 ‘이름이 나나가 된다’고 믿는 상태에 있다. 즉 음부를 가지고 노는 식상을 넘어선 곳에서 내면의 자해로 들어간다. ‘내 이름 가운데 너를 깨뜨려본다’는 말은 소중한 어떤 것을 분리하여 제거한다는 면에서 소외의 극단을 뜻한다. 또 ‘나이프로 나를 잘라 포크로 너를 찍어올린다’는 진술은 사실상 나를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명체로서 존재를 포기한 극단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같이 찍혀올라와 간간이 씹히’는 지경에 이르면 이는 현재의 육화인 과거까지 부정하는 극단의 행동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인식을 하건 그는 갇힌 존재이며 그렇기에 ‘먹고 뚱뚱해지’는 실존재이기도 하다. 또 오랜 갇힘은 ‘사각으로 사각거리는 사각의 방’에서 ‘사각의 나나, 나’로 변이 ․ 분화 되며 ‘모서리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인식하는 자이다. 갇히면 모서리만 보인다.
이 시를 보면 최승자의 시를 평한 엄경희의 평문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축소하고 분해시키는 이 같은 사랑의 방식(매저키스트적)은 부조리한 세계의 폭력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무가치해진 주체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다.
시 「두 평 반의 나나」에 나타난 화자의 의지는 회복하려는 어떤 의지가 아니다. 방의 각도가 기울어지고 시간이 멈춰 선 비극적 현재이다.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다만 말할 뿐이다.
3
오늘은 자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의 허구 많은 사람의 자식 중에
유독 제 자식을 지목함을
부디 용서 하십시오
오늘따라 생의 쓸쓸함이
별스러운 폭풍으로 그에게 덮치고
앞뒤 출입문 막혔습니다
저의 허물로 제가 유전시켜 과민, 더하여
감상보따리를 메고 사는 일이
출생 이래의 지병입니다
차마 보고 있지 못하겠습니다
비오니 제 자식을 구해주시고
저의 죄값을
두 몫으로 셈하소서
—김남조, 「자식의 일」, 『시와정신』겨울호
가족은 모든 인간에게 일차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삶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최초의 경험들이 여기서 이루어지며, 참된 행복의 꿈 또한 가족에서 출발한다. 가족은 타자가 아니다. 막무가내에 가까운 정서적 동일체이다. 따라서 가족이 흔들리는 것은 자신이 흔들리는 것이며 자신의 뿌리가 위협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의 일일 때 정서적 동일성은 너무 가까운 것이어서 맹목적이기조차 하다.
기도문 형식의 이 시는 독자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대가의 풍모다. 시가 어렵고 쉽고의 문제를 떠나 고백이냐 묘사냐를 떠나 감동이냐 발견이냐를 다 떠나, 그냥 시가 좋다. 울린다. 쉽게 이해된다고 해서 가볍지 않으며 또 자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하여 ‘감상’으로 떨어진 신파도 아니다.
‘저의 허물로 제가 유전시켜 과민, 더하여/감상보따리를 메고 사는 일이/출생 이래의 지병입니다’라는 고백, 즉 시인은 이런 지병을 안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비 오는 날 아버지는 전자오르간을 만지시네
벽돌 나르던 손으로 샤시를 하던 뭉툭한 손으로 아버지, 그것은 音樂이 아니어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지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뽕짝이 나는 싫었네 영동대교에 밤비 내리던 날에 나는 휴학계를 쓰고 강원도 절에 갔었는데…… 아버지, 비 오는 날은 동생이 手淫하는 날이어요, 내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시를 쓰는 날이어요
왜 장마철에는 남동생이 야위어갈까요, 내 방에는 쓰다만 詩들이 벽돌조각처럼 구겨져 있을까요, 너는 내가 만든 창문이오 베란다요 현관이요
동생을 데리고 나는 비 오는 오락실에서 테트리스를 하고 아아, 쓰다 만 건축자재처럼 떨어지는 블록들 끼워 맞추며 우리들의 집을 지었네 짓고 또 짓고 또 지어도 다시 지어야 하는 어두운 테트리스의 거리, 지나서
아버지 전자오르간이 멈춘 집에는 죽음보다 막막한 고요가 집안 구석구석 도배를 하네 오얏꽃 활짝 핀 벽으로 기어들어가 나, 옷걸이용 못이 되고 싶었네
아버지 작업복을 목에 걸고서 나,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었네
—박진성, 「아버지의 전자오르간」, 『시작』겨울호
김남조의 시가 ‘자식’의 일을 다루고 있다면 박진성의 시는 ‘아버지’를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어하는 화해의 염원이 담겨 있다. 자식(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경로는 다양할 수 있으나 그 출발은 제 삶의 질곡에서 나온다. 그 질곡이 제 삶을 반추하고 아버지의 삶을 유추하게 하고 동일시해 보게 한다.
‘비 오는 날’은 막일하는 아버지가 쉬는 날이다. 그런 날 아버지는 자신의 꿈인 ‘전자오르간’을 만진다. 아버지의 꿈은 양식이 될 수 없기에 연주할 손으로 ‘벽돌 나르’고 ‘샤시를 한’다. 화자의 생이 아직 질곡이 아니었던 시절에 아버지의 연주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뽕짝이 나는 싫어’ 경멸 받았던 대상이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는 일의 특성상 장마철에는 피치 못하게 쉰다. 따라서 가족 모두가 질곡인 계절이 장마철이다. 동생은 수음을 하고 나는 시를 쓴다. 동생은 야위어 가고 나의 시는 구겨진다. 철이 들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도 그것은 이해에 그칠 뿐, 나는 별다른 수가 없어 가상 공간에서 집을 지을 뿐이다. 그마저도 ‘지어도 지어도 다시 지어야 하는 어두운’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버지는 그 천박한 전자오르간 소리마저 내기를 멈추었다. 꿈을 완전히 닫은 것이다. 한때 가족이 환하게 좋았던, ‘오얏꽃 활짝 피’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아버지 작업복을 목에’ 거는 옷걸이용 못이라도 되고 싶은 나는 지금의 죽음보다 막막한 고요가 견디기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더불어 동일시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해진 감각이다. 그 이해는 꿈에 대한 이해까지 치달아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이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 온전한 합일이 된다. 시인의 지병이 아버지에 대한 전면적 이해를 불러왔다. 타자에 대한 이해보다 제 꿈에 빠져 눈 돌릴 틈 없는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흉내내어질 수 없는 그 만의 개성이 되겠다.
배롱나무 꽃도 벌써 지고
헐거워진 교정의 녹음 속에
단 하나 붉은 포인트
넓적한 푸른 잎사귀 위로 솟아
긴 대궁 끝에 달린 꽃은
싸릿대에 묶어 매단
파르티잔의 마지막 적기 같다
한때는 영광이었으나
한때는 패배였으나
비바람처럼 격정은 가고
이제는 단지 순정만이 붉어
가슴속 잔잔히 눈물은 배고
가을 하늘 기울어가는 어깨 위
칸나가 붉다
—윤재철, 「가을 칸나」, 『문학판』겨울호
이 시를 보았을때, 격렬한 색 바탕과 굵은 선을 특징으로 하는 <조르주 루오>의 그림이 떠올랐다, ‘헐거워진 교정의 녹음 속에/단 하나 붉은 포인트’처럼.
후일담 시 같으면서도 그 영역을 녹여 버리는 확장이 이 시에는 있다.
계절 꽃은 피는 순서가 있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 배꽃, 자두, 살구꽃, 목단, 박태기, 벚꽃, 불두화, 무궁화, 능소화, 장미, 배롱나무가 필자가 아는 개화 순서다. 배롱나무는 그 이름처럼 백일 동안 피는 듯 오랫동안 여름을 장식한다. 왠지 고맙게 생각되는 나무가 그래서 배롱나무다.
배롱나무가 견딘 자리는 크다. 방학 내내 물이 고였다 마른 운동장은 거뭇하고 정구장 바닥을 미는 로울러도 녹이 슬어 붉다. 구름은 그림자를 만들어 게으르게 운동장을 지나가고 정구장에는 풀이 그득하고 멀리 열린 한 학급의 창문 틈으로 커튼이 비어져 나와 흔들린다. 그런 세월을 함께 한 배롱나무가 진 자리는 쓸쓸하다. 그 자리를 칸나가 메운다. 온통 푸른데 단 한 점이 붉다. 이것이 단 하나의 이미지, ‘싸릿대에 묶어 매단/파르티잔의 마지막 적기 같다’는 서정을 불러온다. 물론 이 서정은 화자의 상태- 현재화 된 과거 -가 불러온 것이다. 그런 그것은 ‘격정은 가고/이제는 단지 순정만이 붉’어 ‘가슴속 잔잔히 눈물’을 배게 한다. 그런 칸나는 <조르주 루오>의 그림처럼 저 멀리 서서 화자인 나를 건드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4
절에서 사는 개야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개야
어쩌다 절밥을 먹게 됐다 이건데
그래 고기 한 점 없는 절밥, 맛 있냐 맛 없냐
그래도 공양이란 거 싹 싹 비울 만하냐
어떻냐
아직 멀은 것 같다
밥을 먹다 말고도 숲속 저 편으로
귀를 바짝 세우질 않나 짖지를 않나
사람만 보면 몸을 기며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하는 것이
아직 멀었다.
가소롭다
개가 이리뛰고 저리뛰고 할 때마다
몸쪽 어디선가 풍경風磬 소리가 나오는데
아마 처마 끝 종에 달린 물로기라도 낼름 삼켰을라구
그랬을라구
다만 개야 나는 네가 오래오래 개이기를 바라겠다
—신현정, 「공양供養」, 『시인세계』겨울호
신현정은 모든 시에서 1행 1연 형식을 고수하는데, 그런 고정화된 습관이 그의 시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느리게 돌아가는 화면처럼 1행 1연의 시 구성이 들어맞는다.
이 시를 보면 절에서 본 개가 떠오른다. 풀어진 개가 있었던 곳은 강화 청련사였고 개가 묶여 있던 곳은 칠장사였다. 묶여 있는 곳의 땅을 파, 그 먼지를 뒤집어써서 누르스름해진 하얀 개가 떠오른다. 하도 문댄 흙은 반질반질했고 개밥그릇도 비워져 테두리가 반질반질했다. 그러고 보니 짖지를 않는 것이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육식이 없던 탓에 밥그릇은 늘 비어 있었던 것 같다.
개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절집의 개가 되었을까. 그냥 그 정도의 의문이면 좋다. 시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거나 의미를 찾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그냥 절에서 개를 보고 화자가 자문자답하는 풍경이 이 시다. ‘다만 개야 나는 네가 오래오래 개이기를 바라겠다’는 진술이 이 시를 살렸고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절에 사는 개는 절에 사는 ‘사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오탁번, 「春日」, 『시안』겨울호
시를 선정할 때 홀릴 뻔했다. 함께 발표한 앞의 시 「폭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시가 재미있다는 사실은 소중한 미덕이다. 독자를 전제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볼수록 빛나는 이 시는 손때 묻어 잘 단련된 다듬이 방망이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기도 하다. 좋은 그림이 다시 볼 때마다 전에 못 느끼던 어떤 것을 떠오르게 하듯 이 「春日」은 다시 보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시는 봄날 한때의 정경이다. 1연은 ‘안개 낀 봄산’으로 정지된 모습인데 반하여 2연은 ‘쌀강아지’가 뛰는 동적인 모습이다. 3연의 ‘왕겨빛 햇귀’는 靜中動이다. 春日이 원경의 여백 속에서 빛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시에서 주목할 사실은 ‘언어’에 관한 운용이다. 시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그 인위성이 드러나 오히려 시가 그 위의를 잃기 쉬운데, 짧은 시행 안에 낱말 하나하나가 이미지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낱말들의 걸맞음에서 나오는 조화에 작품의 성질이 의존된다>는 말처럼 낱말이 녹아들어 부조처럼 입체감을 주고 있다.
1연의 봄산이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것은 그 색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젖은 안개는 잿빛으로 무겁다. 2연의 쌀강아지는 흰빛으로 동적이다. 게다가 공간을 가로지르는 소리 이미지의 떨림이 정경을 감각화하고 있다. 3연은 정지된 채 움직이지 않는 안개를 홑이불을 호듯 밀어올리는 것이 햇귀다. 왕겨빛 햇귀는 젖어있는 봄을 밝은 이미지로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시인이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생각나게 하는 이 시는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부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름 저녁 집 앞 골목에서
강호동 머리만한
왕수박을 한 통
휘청거리며 들고 오시는
옆 집 할아버지
오른쪽 어깨 때리며
손자들이 온데요, 하시네, 만세!
땀 철철 붉은 얼굴로
뒤돌아보며 또 한 마디
8,000원이라우! 하시는
세상에! 저 보름달보다도
자랑스런 목소리라니, 만세!
10,000원짜리 수박 없으니,
만만세~!
—박의상, 「8,000원 수박 할아버지 만세!」, 『리토피아』겨울호
좋은 시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물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시가 모두 좋은 시인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가 제시하는 풍경은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의 풍경은 아름다우며 또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 글을 쓰는 아침 신문 기사에 생계수단을 잃은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읽다 버린 폐지를 줍는데 하루 종일 100kg을 주으면 7,400원을 번다는 기사가 나왔다. 8,000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상에! 저 보름달보다도/ 자랑스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인의 귀이다. 다른 것으로는 감탄으로 쓰인 ‘만세’의 적절성과 수박을 들고 즐거우면서도 힘들어 하시는 할아버지를 드러내는 시 형식의 변화가 주목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만세’를 부를 수 있는 낭만성은 이 화자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개성이 확보된 자리도 ‘만세’ 바로 이 자리가 아닌가 싶다.
이 시는 ‘8,000원 수박 할아버지 만세!’인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10,000원짜리 수박 없으니,/ 만만세~!’에 이르면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씁쓸하지만 따스한 웃음을 준다.
5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당숙은 죽어서 산새가 되었다.
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윤제림,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 『문학마당』겨울호
시 참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그 전언은 새소리처럼 끊임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당숙’이라는 말도 묘한 울림을 준다. 앞의 ‘당’소리가 울림소리로 길게 이어지다 ‘숙’에서 ‘수욱’으로 길게 폐음절로 끝나 묘한 여운을 준다. 좀 정답다.
‘당숙’이라 하면 호칭하는 사람에게는 육촌 아저씨 뻘이고 그에게는 조카가 된다. 그러면 왜 당숙은 ‘한 소리 또 하고/또 하고’ 그랬을까? 죽어서도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그것은 둘 중의 하나지 싶다. 하나는 그 조카의 상태, 즉 집안의 여러 일들이 어떤 안쓰러움과 더불어 연민을 불러일으켜 당숙으로 하여금 볼 때마다 잔소리라 해야 마땅할 - 하나마나 한 소리라야 마땅할 - 한 소리를 또 하고 하고 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당숙 자신의 삶의 질곡으로 인해, 제 삶으로부터 유추해 그 위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조카에게 지겨울 정도의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했을 수 있다.
살아서는 잔소리꾼이라야 마땅할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는데, 그것도 <죽어서야> <산새>가 되었다. 이제는 역설적으로 그 소리가 그립고 그것을 좋게 들을 줄 아는 화자가 되었다. 시에서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소리는 들리는 게 이 시다. 당숙은 보이지 않으나 당숙이 보이는 게 이 시다. ‘한 소리 또 하고’를 환기 시키는 삶의 어떤 결곡함이 이 시에는 있다.
새소리는 밤에 들을 때 더욱 잘 들리며 슬프다. 이 시는 제목에서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 선언할 때부터 이미 시가 되어 울린다. ‘한 소리’는 죽은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노래’가 되었다.
어디선가 새소리를 들으면 ‘당숙’이라는 낱말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보통 때는 잘 모른다
땅에 돈 떨어진 것 발견했을 때
내가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 놓을 때
참다 참다 말 안 듣는 자식 등짝 몇 대 후려칠 때
망설일 것 없이 왼손이 스프링처럼 확 튀어 나간다
아버지 앞에서 오른손 부들부들 떨며 숟가락질 배운 탓에
ㄱ, ㄴ, ㄷ, … 오른손 덜덜 떨며 완고하게 구부려 쓴 탓에
지금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오른손으로 밥 먹고 살지만
위기가 닥칠 때 맨손으로 버티는 것이 왼손의 근성이다
유년 시절 한 봉지의 과자를 훔치던 손이 성공했더라면
어느 하산 길 왼손이 나무뿌리 부여잡고 피 흘려주지 않았더라면
내 생의 지도는 극도로 우회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왼손의 쓸모를 수시로 빌려 쓰고 있다
바느질 할 때, 돈 셀 때, 생선 지느러미 가위질 할 때, 친정 이불장 사이에 봉투 찔러놓고 올 때
왼손이라야 더 날렵하게 끝을 낸다
상처의 칼집인 왼손이
생활의 현장 속으로 손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십 년 넘게 교육 한번 받지 않은 왼손이
—김나영, 「왼손의 쓸모」, 『시와정신』겨울호
‘시가 생활의 절실한 반영이면 된다’고 말한 것은 김수영이지만 이 시는 생활에서 그 구체적인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다. 뭐라고나 할까, 생활의 세세한 근거가 시에서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화자는 왼손잡이다. 그런데 3연에서 보듯 아버지의 완강한 교육으로 그의 왼손은 무시되고 기능이 떨어지는 오른손이 바른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때는 잘 모르’다가도 ‘땅에 돈 떨어진 것’을 줍거나 ‘내가 내 멱살’잡이를 하거나 ‘참다 참다 말 안 듣는 자식 등짝 몇 대 후려칠 때’는 왼손이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다. 교육과 정상이라는 말은 화급과 분노 앞에서는 죽고 본능이 일처리를 하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아주 초보적인 충고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작품의 발표가 아닌 작품 자체에 대해 생각하라고. 발표를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독자를 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픽션을 쓰려거든 진지성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쓰지 말라고. 단지 놀랍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들을 쓰지 말고, 자신의 상상이 용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쓰라고. 그리고 문체에 관해서는 어휘의 풍요함보다는 어휘의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문학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도덕적 흠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허성>입니다. 내가 비록 그의 재능이나 천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루고네스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의 글쓰기에서 어떤 공허함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2005년 겨울호 계간 시평》 -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➃
시에 있어서,
감각의 깊이란 결국
삶의 구체성에 대한 실감이 아니면
무엇일까?
(김현)
『시인세계』가을호 Zoom-in에 소개된 이성복 시인과의 대담은 유익하고, 또 유쾌했다. 시인의 근황을 알 수도 있었고 시인이 가진 현재적인 고민,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여러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의에 대한 답이 인상 깊었다.
“문학이란 뭐냐. 첫째,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모두 허위가 되는 것, 그러나 얘기해버리면 추문이라 스캔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뜻해. 둘째는 얘기하기 전까지는 별 볼일 없었는데, 얘기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 셋째는 그것으로써 얘기할 수 없는 다른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야. 다시 말한다면, 언어가 들어가지 않는 부분을, 언어를 통해서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게끔 해주는 것이지. …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잘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딴지를 거는 것이지. …
…젊은 사람들의 난해한 시 모르겠고, 활자를 크고 작게 하거나, 행 갈이를 이상하게 하는 것은 혁명이라기보다 혁명의 제스처로 보여. 더 나아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도발적으로 파괴한다든지 하면 납득이 안 가. 내 취향이 그러하니 보수라해도 할 수 없지 뭐.”
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보수’를 감수하면서까지 젊은 사람들(시인)에 대해 한 말은 음미할 만했다. 물론 여기에는 모순이 있기는 하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 염증을 내고 읽지 않는 이가 이성복 시인인 것이 사실이고, 그렇게 만든 것 또한 젊은 시인들의 시다.
젊은 시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징후로 들 만한 것으로 『시와사상』 〈내일을 여는 시〉 코너에 ‘나의 시를 말한다’가 아닐까 한다. 나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독자에게) 이 코너에 있는 젊은 시인들의 글은 외려 시에 대한 이해를 해치는 듯하다. 산문이 이해의 분명한 전달을 목표로 하는 글임에도, 분명히 이해된다는 이 전제가 불쾌하다는 듯한 기분을 푹푹 풍기면서 글을 비틀고 뒤집고 패대기 치고 있다. 시와 산문이 구분이 안 되고 있다. 더욱이 읽을 때는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네 명의 시인이 쓴 글이 읽고 난 후 편편이 구분되지 않고 대동소이하게 느껴졌다. 내용 중 ‘자궁’ 쪽은 이제 진부함을 넘어 지겹다.
시평을 쓰는 일이 즐거운 일일 수는 없다. 그나마 좋은 시를 발굴하는 느낌이 들 때가 좋고, 그 시의 좋은 점이 막 상상이 되어 머리 속에서 글이 되어 나갈 때가 좋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평을 쓰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괴롭다.
좋다고 여겨지는 시가 있어도 시는 그 시 하나로 완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김선우 시가 그랬다. 시를 형상화 하는 방법으로 사물의 이름을 변주하면서 시에 육체성을 입혔는데, 이 번 시도 그랬다. ‘나생이’를 ‘나새이’로, ‘무꾸’가 ‘무우’에서 '무’로, 이 번에는 ‘오르가슴’이 ‘오, 가슴’으로 말법이 바뀌면서 관능으로 나아갔다. 만만치 않은 형상화 능력에 찬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의 ‘관능’도 습관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 시가 리뷰된다면 선자들이 안이하게 선택한 결과이거나 시인의 기세에 눌린 측면도 무시 못하게 있으리라 본다. 뽑다보면 그런 힘을 발하는 게 시고 저항하고자 하는 게 選者다. 이것이 그 힘든 시평을 쓰게 하는 즐거운 이유이기도 하다.
시평이 길어지는 것도 방지하고 부분평을 남발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을 피하기 위해 열 편 정도로 엄격하게 한정을 하다보니, 아쉬운 시들도 있다. 옮겨놓고 시간을 두고 보면 아무래도 좀 객관화 되긴 한다. 아쉬운 시들은 다음과 같았다.
박지웅(「빗속의 기록」, 『시와반시』05가을호)의 시는 상황과 그 상황에 서 있는 (막말을 하며 문짝을 걷어차고 나가버린 저녁/그녀도 저렇게 막이 벗겨진 얼굴로 내 뒤에 서 계셨다) 화자의 진정성은 잡혔지만 좀 단선적이었다.
송기원(「꽃향기」, 『문학나무』05가을호)은 이 번 가을호에 20여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고 있다. ‘사방천지 꽃향기 가득한 봄날, 그대와 나도 이승저승을 떠나 꽃향기를 먹으며 배부릅시다.’는 이 권면은 넉넉해 보였다.
문성해(「어떤 장사」, 『문학나무』05가을호)의 시는 「외곽의 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시에 비해 깊이가 좀 떨어졌다.
이장욱(「불놀이야」, 『시선』05가을호)의 시는 재미있다. 상상력의 비약이 자유스럽다. 재미있지만 오래보니까, 애드벌룬이 들어올리는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다루는 사람(시인)이 같이 허공에 뜬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유로운 상상도 그 패턴이 유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정병근(「옥상」, 『시선』05가을호)의 시시한 것에 대한 관찰이 돋보였다.
‘꽃이란 무엇인가/백주 대로의 섹스처럼/염치도 수치도 모르는 꽃/세월이나 가난 따위는 더더욱 모르는 꽃’
차한수(「티눈」, 『미네르바』05가을호)의 시는 여행시나 산행시는 이만은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가 아닌가 싶다.
‘다시 수태를 뒤집어쓰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하늘을 담은 콩잎 만한 새끼(자라)들과 함께 자꾸 하늘이 콩잎이 되고 있었다’
분홍돌고래 보뚜를 아세요? 아마존 강에 사는 보뚜는 분홍빛 갑옷으로 치장한 돌고래의 이름이지요. 밀림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분홍 가슴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돋아있고요, 새의 부리 같은 분홍색 긴 입을 뾰죽 내밀고 있지요. 분홍 보뚜는 눈이 멀었죠. 하지만 보뚜는 천리 밖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밝답니다. 보뚜는 물 밖으로 걸어 다닐 수도 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의 일이랍니다. 보뚜는 물 밖으로 나오면 흰옷을 입고 모자를 써요. 모자를 벗으면 다시 돌고래가 되지요. 강 밖으로 나온 보뚜가 어여쁜 소녀나 멋진 사내로 변신해서 외로운 사람들을 홀려 황홀한 수중도시인 엥깡찌로 유괴해간다거나 거북이 등딱지도 뚫을 수 있는 무서운 이빨로 잡아먹는다는 건 아마존 강가 마을에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보뚜가 아마존 밀림에만 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멍하니 벤치에 앉아 분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훌쩍거리는 소녀가 있다거나, 낮술에 취해 비틀대는 청년을 보았다면 그건 분명 보뚜와 사랑에 빠진 거죠. 가엽지만, 보뚜에게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죠. 늦은 밤 지하의 낡은 클럽에서 황홀한 춤을 추며 살짝 웃는 소녀가 있다면, 주말 오후 공원에서 황금빛 다리 근육을 뽐내며 축구공을 차던 청년이 땀을 닦으며 말을 걸어온다면 조심하세요. 그건 바로 분홍돌고래 보뚜예요.
하지만하지만! 너무 무서워하지만은 마세요. 분홍돌고래 보뚜는 영혼이 맑은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니까요. 자신 있으면 부딪쳐 봐도 돼요. 인생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보뚜에게 잡아먹히는 게 두렵지 않거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엥깡찌로 납치되는 게 두렵지 않다면요.
보세요. 분홍돌고래 보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따라 오세요.
엥깡찌에 가서 가볍게 술 한 잔하며 얘기 나눠요, 우리.
—김요일,「분홍돌고래보뚜」전문, 『애지』05가을호
『시인세계』가을호에는 정끝별 시인이 《시와 여로》코너에서 ‘울산’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 서두에 분홍 돌고래 보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동화적 사실이 전제된다고 해서 이 시의 재미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시에 주목한 것은 〈사랑에 대한 낭만성 부여〉다. 같은 사랑을 말하더라도 비극적인 것이 대다수인 반면에 이 시는 사람을 아주 편케 하는 위무의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속도’와 ‘경쟁’이 전부인 세상살이에 치이고 찌든 영혼들을 위로하는 맑음이 이 시에는 있다. 동화가 주는 푸근함이 있고, 모험적인(살벌하지 않은) 도전이 있다.
분홍돌고래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분홍)는 편안함을 주고, 가슴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돋은 것이나 새의 부리 같은 긴 입을 가진 것은 수륙의 동물이 결합된 데서 오는 이질성과 더불어 어떤 새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눈이 멀었어도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또다른 경로로 다가온다. 여기서 변신의 이미지는 모자와 흰 옷!
‘용궁’이라는 익숙한 이미지에 ‘엥깡찌’라는 수중도시는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또 익숙한 잉어 이미지에 돌고래 ‘보뚜’는 새롭다. 무엇보다 말의 울림, ‘엥깡찌’라는 말과 ‘보뚜’라는 말의 울림도 좀 남다르다. ‘보뚜’라는 발음에는 뱃고동 소리 같은 울림이 있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이별하고 절망하는 세상에 보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니까, ‘분홍돌고래 보뚜’는 존재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실재이다.
밤의 꽃이 바다 위에 피었다 몸으로 난 모든 길이 열렸다 어둠에서만 만개하는 꽃. 바다는 어디를 건드려야 꽃의 문이 열리는지, 씨방이 부푸는 꽃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었다 물결무늬를 해변에 새겨놓고 멀리 나가 있는 바다 별들이 푸르게 빛나는 밤, 북극성은 그 날 우리의 머리 위에서 어디론가 가 버리고 무덤에 엎어져 있던 흰 조개껍질들 나선형 궤적을 따라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릿한 냄새에 무너지고 하늘에서는 바다보다 더 바닷내음이 풍겨나왔다 별을 향해 교신의 줄을 긋는 폭죽들 황금호랑가시나무 이파리 타다닥 불꽃막대에서 피어나고 핏물도 가지시 않은 하현달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갈 때,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났다.
—윤정옥,「을왕리 밤바다에서」전문, 『창조문학』05가을호
‘분홍돌고래 보뚜’의 사랑이 동화 속의 사실이라면 ‘을왕리 밤바다’의 사랑은 현재적이며 (당시 뿐일지라도) 완성된 사랑이다.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난 것이 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시는 사랑의 감정이 충만된 화자의 상태가 역으로 이미지를 불러온 듯한 느낌을 준다. 시를 쓰다보면 이미지가 치고 나가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떤 충일한 상태가 그 이미지의 조합을 휘어잡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선 후자에 해당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어떤 충일한 상태- 사랑에 대한 감정의 고조 -가 ‘을왕리 밤바다’에 대해서 재해석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밤의 꽃이 바다 위에 피었다 몸으로 난 모든 길이 열렸다 어둠에서만 만개하는 꽃.’ 다소 생뚱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런 갖다 붙임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사랑으로 가득찬 화자의 상태가 끌어낸 진정성’이랄 수 있겠다. 이것은 이어지다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릿한 냄새에 무너지고 하늘에서는 바다보다 더 바닷내음이 풍겨나왔다’는 부분에서 한 번의 전환점을 이루고, ‘별을 향해 교신의 줄을 긋는 폭죽들 황금호랑가시나무 이파리 타다닥 불꽃막대에서 피어나고 핏물도 가지시 않은 하현달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갈 때,’ 바로 이 상태가 절정을 이루어낸다.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났다.〉는 이 고백이 가능하게 하는 절정! 이 시는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능력보다도 진심이었던 사랑의 과정이 불러온 시라 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 뽕짝풍의 각설이 타령이 들려왔다
어딘가 이 촌스러움이, 오래된 서글픔이 마음에 들었다
탄불에 끓는 소라와
뽕짝소리를 종이컵에 담아 파는 아저씨, 땀을 닦으며
쥐포를 굽는 아줌마의 노동 앞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뽕짝노래가 메들리로 이어지면서 울려 퍼졌다
내 구두처럼 무겁게 흰 갈매기가 날면서 울었다
바닷가에 서면 왜 몸을 흔들고 싶어질까
깊은 바다 속 문어처럼 스무스하게
팔다리를 흔들고 춤추고 싶을까
바닷가에 서면 뛰어오르는 물고기같이 싱싱해져
끝 모를 슬픔의 깃발을 집어 던지고
자유롭고 호기심에 찬 시선이 방파제처럼 길게 뻗어갔다
천박하게 울어대는 뽕짝이
비치보이스의 노래보다 기분 좋을 때
바닷바람과 가을과 가을 타는 사람들이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신현림,「바닷가에 서면」전문, 『시작』05가을호
이 시는 접어놓고 긴가민가 했는데, 볼수록 괜찮았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에 대한 어떤 편견(?)마저도 이기게 하는 힘이 있다. (이건 모든 시에 다 적용된다. 뭐랄까. 편식을 뒤집는 맛 같은 것이랄까?)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고, 바다 이야기이면서 육지 이야기고, 무거운 이야기(‘내 구두처럼 무겁게 흰 갈매기가)이면서 가벼운 이야기(’춤추고 싶을까‘)이고, 천박하면서 고풍스럽고 화자와 주변의 정황이 가까우면서 멀다. 결국은 내 이야기면서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여행 중이면서 정지 중(선착장)이다. 삶의 고단함(’서글픔‘)을 이야기하나 발랄하고 경쾌하다.
시의 구성에 있어서도 (대충) 한 번에 내려쓴 시 같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소품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소품만은 아니다 싶은 느낌을 다른 한 편으로 주는데, 암튼 월미도 선착장을 떠오르게 했다. 사람을 ‘물고기같이 싱싱’하게 하는 힘이 이 시에는 있다.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난다 돋아나 깔깔거린다 기쁨을 잃은 살갗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측간에서 할미는 빗자루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중이 괴기 먹는디야 중이 괴기 먹는디야 까슬한 빗자루 지나간 자리마다 꽃모가지들 툭툭 져내렸으나 내 등은 깊게 패이고 패인 살이랑 사이로 다시 무섭게 돋아나 깔깔거리던 꽃모가지들 중이 괴기를 먹어도 중이 괴기를 먹지 않아도 먹구렁이처럼 감겨드는 어둠 잘라 짓찧어도 꽃물 한번 들지 않고 기쁨을 잃은 살갗 내가 죽고 죽어도 골백번 고쳐죽어도 여태도 온밤내 돋아나 깔깔거리기만 하는 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김 근,「밤마다 축제」전문, 『시와사상』05가을호
이 시는 좀 감정의 과잉이다. 톤이 높고 감정의 절제가 덜 되어 있다(‘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화자의 목소리가 더 시끄러운 듯하다. 그러나 화자에게 내재된 어떤 상태가 그를 그냥 내두지 않는다.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상태, 돋아나서 깔깔거리는 상태, 그래서 살갗은 기쁨을 잃은 상태다. 여기서 ‘시끄러움(청각)’은 ‘가려움(촉각)’과 같은 상태인데, 가려움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닌다.
빗자루로 내 등을 쓸어내리는 것은 왜 할미일까.
‘중이 괴기 먹는디야’의 반복이 치는 한 번의 전환과 ‘중이 괴기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로 다시한번 치는 재반복이 삼겹살의 기름띠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그 반복의 내용이 주는 의미 여부는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육체적인(‘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혹은 정신적인(내면의 반영이 육체로 나타난 것일 수 있기에), 그래서 개인적인 억압의 상태는 가려움을 넘어 주변의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정도이다. 대충 가려움을 제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등이 깊게 패이고 패인 살이랑 사이로 다시 무섭게’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상태니까, 더 악화되기만 하는 정황이다.
일회적인 처방으로, 혹은 정기적인 처방으로도 가시지 않는 아픔이 이 시에는 있다. 그것이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것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이 부분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아쉬움도 있다. ‘내가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도’가 식상하고 ‘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이 남의 얘기처럼 들리는 측면이 있다.
난해와 서정 사이의 거리가 이 정도면 적당하지 싶다.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린다
숨겨둔 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
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었다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고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렸다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
종가의 대소사를 활대질로 다 받아주면서
얼마나 울어서 지운 것인가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마루에서 주무신다
봄볕은 모로 누운 어머니를 마루로 여기는 듯
축 늘어진 젖통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걸레질로 지운 나이테가 파문처럼 옮겨 앉은 몸은
걸레를 쥐어짜듯 뒤틀려 있다
모로 뒤척이는 몸에서 훔친 자국 같은 그림자가 밴다
닦을수록 어두워지는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마루의 속을 이제야 알겠다
걸레의 잠이 끝나면 마루 또한 잠들 것이다
제 그림자로 숨겨둔 현 지울 때까지 울어재낄 것이다
—차주일,「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전문, 『시작』05가을호
오래된 시골집 대문은 바람을 받으면서 나이테를 중심으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오랜 시간 바람과 길항하면서 더 단단한 부분은 남고 약한 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간 결과다. 이 때 대문은 마르면서 깨질 정도로 단단해져 있다. 드러난 옹이 부분은 말라붙은 송진이 호박처럼 굳어 근사한 문양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대문이 바람을 받아 나이테를 중심으로 돋을새김 되는반면 물과 더불어 걸레의 면이 나이테를 건드림 받는 마루는 나이테가 없어져 간다. 흐릿해져 가는 것도 들어맞을 터인데 이에는 물때가 한 몫하지 싶다. 암튼 이 때도 마루는 오랜 시간 젖으면서 말라가는 가운데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릴 정도로 바싹 마른 상태를 유지하며 동시에 ‘숨겨둔 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어둔 것같은 상태가 된다. 발 딛기에도 미안한(조심스런) 어떤 상태를 체험했다면 그런 상태라 보면 된다.
이 시는 상당히 세밀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런 상태로부터 묘사로 간다. 나이테는 옹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나이테 자체가 휜 것은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았기 때문이며 그 문양(옹이)은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려 퍼지는 형국이다. 문제는 그런 것이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종가의 대소사를 활대질로 다 받아주면서’ 걸레질을 한 어머니가 ‘울어서 지운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머니는 마루와 더불어 걸레로 살아오신 분. 그렇기에 마루에서 누우면 그 자체로 마루가 된다. 그래서 봄볕조차도 어머니를 마루로 여겨 축 늘어진 젖통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이미 걸레로 살아온 삶은 쥐어짠 걸레처럼 뒤틀려 있는데 그 나이테의 파문은 어머니의 몸으로 옮겨앉았다. 뒤척이는 몸에서 훔친 자국 같은 그림자가 배는 것도 이 때문.
마루를 통해 어머니의 생을 이해한 화자는 ‘닦을수록 어두워지는/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마루의 속을 이제야 알겠다’는 단정적 깨달음에 이르고 ‘걸레의 잠이 끝나면 마루 또한 잠들 것이다/제 그림자로 숨겨둔 현 지울 때까지 울어재낄 것이다’는 그 하나됨과 속성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그것은 나이테가 없어질 정도의 세월이 전제된, 이미 걸레와 같아진 어미가 있기에 가능한 절정의 상태다.
현관에 놓여 있는
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
남편의 검은 구두
겉은 멀쩡한데
더 이상 출항이 정지된
먼 바다 폭풍을 헤치고 온
군함 같은 검은 그것을
바로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전에 병들어
염전이 보이는 바닷가 요양원에 있을 때
그 염전에서 보이던 수평선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걸까
남편의 구두는
그때보다도 더 말끔하고
그때보다도 더 반짝이는데
현관문을 등지고 묵묵히 안방을 향해 있는
막 지나가고 있는 오늘을
담고 있는
검은 구두가
검은 구두를 놓고 있는 현관이
왜 이렇게 고요하기만 할까
배추요 무요 양파요 라고 외치는
행상 트럭의 뒤를 따라왔듯이
내일을 따라왔는데
오늘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내일이
차창에 부닥쳐오는 빗방울처럼
왜 이렇게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흘러내리기만 하는 것일까
—최정례,「검은 구두」전문, 『황해문화』05가을호
차주일의 시가 ‘마루’와 ‘어머니’가 시적 소재였다면 최정례의 시는 ‘현관의 구두’와 ‘남편’이 시의 중심에 있다. 그게 꼭 남편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지만 아내나 남편을 다루는 시는 이만해야 하지 않나 싶은 전범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서정, 암갈색의 톤이 잡히는 시다.
서정은 ‘현관에 놓여 있는/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남편의 검은 구두’로 인해 출발된다. 화자는 그것을 ‘겉은 멀쩡한데/더 이상 출항이 정지된/먼 바다 폭풍을 헤치고 온/군함 같은 검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한 화자의 인식은 그 구두를 바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구두 속에는 남편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흔적이 있기에 그렇다.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구두는 병들어 염전이 보이는 바닷가에 요양했던 때를 떠올리게 하고, 다시금 쳐다보는 구두가 더 반짝이고 더 말끔한데 왜 더 외로워 보이는지 자문하게 한다. 다시금 현재적 상태. 구두는 말이 없다. (남편도 구두처럼 말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방문과 현관 사이의 거리는 짧지만 검은 구두가 흡수한 고요가 두렵다. 고요가 엄습해온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상황이다. 이제 안방의 남편은 먼 존재다, 구두로 인해. 거기서 구두를 벗고 있는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배추요 무요 양파요 라고 외치는/행상 트럭의 뒤를 따라왔듯이/내일을 따라’온 자신을 발견하고 ‘오늘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내일이/차창에 부닥쳐오는 빗방울처럼/왜 이렇게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흘러내리기만 하는 것일까’ 회의하는 근본적인 자각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구두는 말이 없을 테고 …… 화자가 구두가 있는 현관에서 안방이라는 그 먼 거리를 건너 가 남편에게 건넬 첫마디가 자못 궁금해진다.
지리산 아래 가채 마을에 사는 김판개 씨는
오늘도 제 몸에 밧줄을 묶고
절벽을 탄다
벼랑 끝에 매달려
바위의 귀때기를 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절벽 끝에 매달린 김판개 씨
틀림없다, 꼭 바위에 한 쪽 귀때기 같을 거다
먹어본 적 있는가, 오독오독 씹히는 귀때기 무침!
커다란 양푼 속
시커먼 바위의 귀때기들을
주물럭주물럭 양념을 하고 무치는
김판개 씨 아내의 솥뚜껑만한 손이여
저 절벽 저 바위덩어리들도 궁금하긴 궁금했나봐
해마다 해마다 귀때기 내미는 걸 보면
이 세상 한 소식 듣고 싶긴 듣고 싶었나봐
외로움과 침묵과 묵언정진이
저 바위덩어리한테도 참 어렵긴 어려웠나봐
—유홍준,「石耳버섯」전문, 『시안』05가을호
나희덕은 유홍준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휴홍준(劉烘埈)은 기억을 ‘즐기고’ 있다기보다는 기억과 ‘싸우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축조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흐름을 통해 스스로를 방기한다. 고통을 직설적으로 발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섬뜩하다.
이 시는 나희덕이 말한 유홍준의 시의 특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섬뜩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다감함마저 엿보인다.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사도 분명하다. 서사의 주인공은 김판개 씨 부부, 진짜 주인공은 바위덩어리. 따라서 다음의 추측에 이른다.
‘해마다 해마다 귀때기 내미는 걸 보면(석이버섯으로)’ ‘저 절벽 저 바위덩어리들도 궁금하긴 궁금했나’보다는 추측. ‘이 세상 한 소식 듣고 싶긴 듣고 싶었나봐’ 하는 추측. ‘외로움과 침묵과 묵언정진이/저 바위덩어리한테도 참 어렵긴 어려웠나봐’하는 추측에 이른다. 그 추측을 가는케 하는 것은 김판개 씨 부부가 제공한 귀때기무침 때문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더 가능해진다. 물론 그 전에 그가 바위의 귀때기처럼 매달려 따는 모습도 있기는 하지만. 귀때기 무침에 소주가 그리운 시간이다, 시절이.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 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 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 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부챗살처럼 늘어난다.
사정없이 목을 잡아당기는 개줄에 저항하면
네 다리는 갑자기 하나가 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며 아스팔트에 끌린다.
아무리 달려도 서 있을 때처럼 조용한 바퀴 옆에서
심장과 허파를 다해 헐떡거리는 다리.
오토바이 굉음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헐떡거림.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종종거려도
도저히 둥글어지지 않는 네 개의 막대기.
느슨해지자마자 팽팽해지는 개줄.
—김기택,「오토바이와 개」전문, 『문학과사회』05가을호
김기택이 발표한 시 중에서 (내가 아는 한)「어느 날, 혀는」, 「교통사고」, 「잎새들」 3편이 계간평에서 다루어지거나 리뷰되었다. 「잎새들」선정은 공감이 되었지만 「교통사고」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큰 새로움이 없는 것을 다루었고 「어느 날, 혀는」은 지나치게 길었다. (내용없이 짧은 것도 지겹지만 시가 긴 것도 큰 흠이라고 생각한다.) 형식에 있어서도 산문식으로 3덩어리에서 5덩어리를 이루는 그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았다. ‘시는 사유 이전, 혹은 사유 이후’라고 한 것은 김현이지만 그의 사유의 특징(형상화)은 사유를 정황으로 환치해 묘사해 들어가는 능력에 있다. 그 묘파는 세밀에 세밀을 더하지만 증폭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의 묘사에서 증폭의 힘을 갖는 것은 상황에서 나온다. 화자는 절대 시인이 아니지만, 대체 ‘개새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정황이 성립에서부터 휘청거린다. 그 것은 또 말 한 마디의 상황이 아닌가.
그러한 아쉬움을 두고 보는 김기택의 이 시는 형식과 내용에도 새롭다. 정황 자체가 섬뜩함을 담고 있어서 담담한 묘사가 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시야말로 김기택 다운 시가 아닌가 한다. 시를 대한 맨 처음, 야 나도 본 적이 있었는데 하는 반성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오토바이처럼 시가 굴러가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그래서 시에서 따로 진술이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좋은 시다.
쟁기가 멍에를 잡아채자
소의 목덜미에 주름이 잡힌다
맨 처음 멍에를 얹었을 때
그 쓰라린 예닐곱 개의 주름은
한 개 혹 속에 갇혔다
글 쓰는 이가
펜혹으로 세상을 두드리듯, 소는
멍에터에 묻힌 어린 주름살의 힘으로
대지 위에 초록주름을 잡는다
하늘의 짝이 된다
제 목덜미에 무덤을 얹은 채
쇠방울을 흔드는 젖은 눈
밀이며 보리며 벼의 뿌리는
멍에터에서 빠져나간
일소의 터럭을 닮았다
—이정록,「멍에」전문, 『애지』05가을호
이 시는 좀 진부하다. 비육우나 있지 일소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기에 멍에터가 있는 소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렇고 펜혹이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의 세상이기에 그렇게 말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가 현재적 사실로 육체성을 입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환기하는 힘이, 또 그 기억에 존재하는 진정성이 이 시의 힘이다. ‘쟁기가 멍에를 잡아채자/소의 목덜미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다. 그래서 여물을 먹는 소의 목덜미를 빗어주고 궁둥이를 쇠빗으로 긁어주고 그랬던 것이다. 코를 뚫고 소금을 붓는 것을 본 사람의 눈에 ‘맨 처음 멍에를 얹었을 때/그 쓰라린 예닐곱 개의 주름’이 잡히는 것을 못 보았을리 없고 그것이 끝내는 ‘한 개 혹 속에 갇’히는 사실을 모를리 없다. ‘멍에터에 묻힌 어린 주름살의 힘으로/대지 위에 초록주름을 잡는다’는 인식까지는 많은 사람이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 목덜미에 무덤을 얹은 채/쇠방울을 흔드는 젖은 눈’이라는 인식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앟다. 게다가 ‘밀이며 보리며 벼의 뿌리는/멍에터에서 빠져나간/일소의 터럭을 닮았다’는 선언은 쉽게 나올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 지점이 개성이 확보되는 자리라 여겨진다. 전제에서 다소의 진부함이 있더라도 형식에서 교과서적인 시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이 시의 강점이 누구러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너무 같은 형식으로 시를 쓰고 있다.
피사의 斜塔만큼
地球儀 기울기만큼
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正名이나 無名보다는 斜名이 마땅하다 싶어
사람과 귀신 사이 도깨비처럼
하늘이나 땅보다는 반공중을 떠다니듯이
목디스크 아닌 허리디스크로 기울어진 듯이
떨떠름한 눈길로 삐딱하게 꼬나보며
옥의 티가 아니라
티 있는 옥돌이 마땅하다 싶어서
視角은 저절로 삐딱해져버렸다
기울어져 돌아가는 지구에 붙어살자면
최소한 지구처럼 23.5도쯤이라도 기울어져야지
중심잡기 위해서 기울어져야 했을 피사의 탑처럼
삐딱할수록 바르다고
반듯하게 돌아가는 삶이라고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준다
—유안진,「斜視로 본다」전문, 『시안』05가을호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자는 게 뭐 그렇게 새롭겠나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마지막 행에서 설득을 당했다.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주니 좀 삐딱하게 사는 게 어떠냐는 설득에 다시 시의 앞 행으로 갔다.
‘피사의 斜塔만큼/地球儀 기울기만큼/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왜냐? 더 기울어지면 그예 자빠지니까, 그래서 ‘만큼’이다. 그것이 ‘斜名’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온다. ‘삐딱하게 꼬나보다’가 ‘視覺은 저절로 삐딱해져버렸’는데 이 ‘삐딱해진 것’은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니,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는 것은 삐딱하지 않아서이지 싶다. 〈신발밑창〉이 그렇다고 말한다니 안 믿을 도리가 없다. 나도 斜視로 보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시평을 마치면서 떠오르는 말이 두 개 있다.
“나의 의지, 그것은 인간에 매달린다. 그리고 사슬로 내 자신을 인간에게 묶어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초인을 향해 위쪽으로 낚아채이고 말 것이다. 내게 또다른 의지가 있어 초인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짜라투스트라)
수다의 밑에는 공포심이 숨어 있다.(김현)
《2005년 가을호 계간 시평》 -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③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③
윤관영
나는 난해성이 목표가 될 때,
그것은 가장 타기할 만한 악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현
신인을 등단시킬 때 빠지지 않는 선자의 評語가 있다. ‘실험정신’, ‘패기’가 바로 그 것이다. 역으로 ‘안정’, ‘능숙’은 터부시 된다. 옳은 말이다. 문제는 개성적인 드러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경우다. 시평을 쓰기 위해 문예지를 읽다 보면 모든 시가 <튀기 위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나, 소통을 위한 흔적이 안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소통을 위한 어떠한 무엇은 개성을 죽이는 독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月刊詩誌에 발표된 20여 명이 넘는 시인의 시를 읽겠다는 의도는 그래서 대단한 결심을 요한다. 주목을 난해로 받으려는 시도들이 넘쳐난다. 시가 길어지고 산문이 난해의 형식처럼 간주되고 있다. 김현 선생이 말한 ‘악덕’이란 지적이 떠오를 정도다.
‘시의 애매성은, 그것이 의도된 난해성이 아닐 때,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시의 흐름의 결과일 때, 흔히 강력한 시적 환기력을 갖는다.’
김현 선생의 이 지적은 그래서 유효하다. 아니 절실하다. 의도가 읽히는 난해는 난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난해를 빙자한 무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철학적으로는 ‘정직’의 부재에서 오며 기질적으로는 ‘독선’에서 오지 않나 싶다. 관념이든, 상상이든, 몽상이든, 체험이든 시적대상을 최소한 일반화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무대포 정신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이 무대포를 개성이라 믿어야 막무가내가 가능하긴 하다.) 여기서 ‘정직’이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무엇에 대한 무엇인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김수영 시인에게는 과도할 망정 자신의 무엇이 소스였다. 나의 무엇이 아닌 것에 대한 발언은 멀리, 그리고 다양하게 펼칠 수 있지만 그것을 회수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를 의미한다. 정직의 부재는 여기서 나온다. 정직의 부재는 사실상 긴장의 부재를 의미하고 긴장의 부재에서는 정직이 자리할 틈이 없다.
난해에도 예쁜 난해가 있다. 김현 선생은 ‘어쩔 수 없는 시의 흐름의 결과’를 그 잣대로 삼았지만 화자의 긴장의 끈이 잡혀야 난해도 힘있는 난해가 된다. 그런 면에서 박형준의 지적(창작과비평)은 다시한번 음미해 볼 만하다.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낭만적 상상력은 대개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된 감상의 산물일 때가 많다. 이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의 시와 자신들의 시를 구별해내 독자적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잎과 가지만을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키치든 문화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시인이 그것에 대한 ‘중독자’이자 ‘반성자’(김현)가 되지 않으면, 그 양자간의 거리에서 빚어지는 ‘긴장의 시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적 가치도 태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긴장의 시학! 좋은 말이다.
먼저 서정과 난해 사이에 그 줄타기를 하고 있는 시를 보기로 한다. (이번 호부터 출전과 시인은 尾註로 처리한다. 시에 대한 편견을 다소나마 줄여보려는 나름의 의도이다.)
1)_「만남의 광장」
내가 오른손을 들자 당신의 왼손이 마술처럼 올라간다.
당신과 나는 가까워져.
아지랑이, 아지랑이,
우리는 하나의 現場을 이룩했는데, 우리는 왜 점점 무능력해지지? 당신은 꿈속의 악어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한가한 남자이기를 그쳤네. 당신은 도주할 수 없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 수 없지.
우리는 모여들었다.
나는 예의 바르게 살아갈 것이며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주시하지만
내가 실루엣이 되어 당신의 동공을 점령하자 드디어,
당신의 낡은 입술은 열렸다.
안녕.
나는 최후까지 당신의 첫마디를 떠올리지 못하리.
트로트 리듬과 함께 테러리스트의 마지막 눈동자와 함께 타타타 떠가는 헬리콥터와 함께,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지.
광장이 宇宙船처럼 떠오르자,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내가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는 순간
당신의 왼손은 아지랑이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전래의 서정과 다르게 이 시는 무엇을 구축하고 있는가.
이 시엔 사람을 끄는 분명한 힘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에 접근하는 단서로 그 공간이 ‘만남의 광장’ 이라는 사실을 알고 등장인물이(화자라고 또 딱히 지정하기도 뭣한)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 라는 사실을 알아도 뭔가 확실하게 그 의미가 이해되지는 않는다. 온점에 유의하며 읽으면 시의 흐름과 분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만남의 광장은 현대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장소.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 의미와 장소는 해소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고, 당신은 다수일 수도 있고 남녀 누구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불특정이며 따라서 우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만남의 광장이란 공간에서 하나의 현장을 이룩했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이기도 하지만 그 전체는 제각각의 종합일 수밖에 없다.
손을 들어 접선(괜히 이 말이 타당한 것 같다)하기에 ‘당신의 첫마디를 떠올리지 못’할 수 있지만 ‘안녕.’이란 말은 공히 들어맞는 말일 수 있다. 어쨌거나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나를 포한한)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다른 모든 내용, 나와 당신의 어떤 다름이나 일치는 제각각한 만남의 여러 변용이다.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진술이 많은 만남을 통해 얻은 생철학이라면 ‘광장이 宇宙船처럼 떠오르자,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는 만남의 광장에서 얻은 이미져리다.
자꾸만 읽게 만드는 힘, 분명하지는 않으나 묵직한 힘, 이 시에는 있다.
2)_「발견」
귀에 꽃 꽂은 채
빈방에
먹구렁이처럼 잔다
봄밤에 취해
널부러진 달빛이여
언젠가 골목에서
귀에 꽃 꽂아주고 입 맞추던
소녀여
이런 밤엔 뿌리내려라
허벅지는 수령이 오래된
옹이가 박힌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은 방바닥에 계속 흘러내리다
용암처럼 굳어버려라
술 취해 들어온
중년 사내를 위해
먹구렁이처럼 말고 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비좁은 방바닥
어둠과 빛에 섞인
저 희뿌연 뿌리,
오늘은 봄밤 더위가
백 년 만이라고 하는데
말씀이야
벚꽃이 절정일 때 차를 몰고 외중방리(구단양)에서 선암계곡으로 들어간 일이 있다. 벚꽃은 서로 가지를 뻗어 꽃터널을 이루었는데, 압사당하는 느낌이 들어 어깨를 핸들에 묻고 차를 몬 적이 있다. 그때, 내 옆엔 댓병 소주가 있었다. 이밤사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는 심정이었다. 모든 게 기꺼웠다.
이 시의 ‘봄밤’도 그런 봄밤이다. 그래서 달빛은 널부러지고, 나도 귀에 꽃 꽂은 채 봄밤에 취해 먹구렁이처럼 자는 것이리라. 그래서 중년 사내는 술 취했으며 귀에 꽃 꽂아주고 입맞추던 소녀도 그래서 회억되었으리라.
이런 봄밤엔 대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밤사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는 심정으로 시가 가면 신파가 된다. 그러나 그런 심정에도 이미지는 있다. 이 시에는 빛나는 이미지가 있다.
허벅지는 수령이 오래된
옹이가 박힌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은 방바닥에 계속 흘러내리다
용암처럼 굳어버려라
‘이런 밤엔 뿌리내려라’는 열망이 빚은 이 이미지. 열망이 토해낸 투정 같은 바람이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허벅지가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이 흘러내려 용암처럼 굳다니… 봄밤엔 그처럼 되어도 좋으리라. 다만 당연한 사실이지만 창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활짝, 문이란 문은 몽땅!
이런 분위기는 혼자 있어야 절절히 느낄 수 있고 또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시에는 쓸쓸함이 있고, 축축하다. 뿌리처럼 좀 어둡다.
3)_「신 포도 기제⁰」
포도가 영그는 동안
한때 나는 개였다
한때 나는 늑대였다
한때 나는 고양이였다
포도가 익었을 때
나는 이미 여우였다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어”
너무 높아 딸 수 없는
신 포도를 짐짓 버려 두고
술취한 개발바닥이 되었다가
굶주린 늑대의 침이 되었다가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 눈빛이 되었다가
번번이 뒤집는 여우 혓바닥이 되었다
그 혀에서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다 맛의 분별점이
혀에서 말로 옮겨 간 것은
담장 저편, 다시 포도가 영글어간다
벌써 내 입에는 침이 고인다
담장 이편, 내게 저 포도는 실 것이다
말이 있자 포도알들이 스스로 시어졌다
단맛과 신맛 사이엔 담벼락이 서있고
포도나무는 아무일 없다는 듯
담 너머 넝쿨손을 건네는 그 때
나는 이미 여우였다
⁰기제 - (심리학 등에서) 사람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심리 작용이나 원리
무엇보다 이 시는 재미있다. 골계미, 해학 같은 것이 있다. 더욱이 그마저도 대타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어서 읽는 맛을 더하고 있다. ‘우화적 상상력’이라 이름할 만한 재미가 이 시 속에 있다. 그러니까 우화를 뒤집는 우화라고나 할까. 재미라고는 없는 세상에 재미있는 시는 그 자체로 커다란 미덕을 내장한 셈이다.
능청!
‘능청’이야말로 이 시를 끌어가는 어조이자, 또한 방법이다.
고백!
‘고백’도 이 시를 끌어가는 한 방법이다. ‘포도가 영그는 동안/한때 나는 개였다/한때 나는 늑대였다/한때 나는 고양이였다/포도가 익었을 때/나는 이미 여우였다’ 포도가 영그는(‘익는’이 아닌) 동안 ‘개’에서 ‘늑대’로, 또 ‘고양이’가 되었다가 익었을 때는 ‘여우’가 된 고백이 이 시의 전제다. 뭐랄까. ‘고백적 능청!’, 고백을 빙자한 능청이 이 시의 흐름을 끌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네 짐승의 변주가 이 시의 특징이다.
‘포도가 익었을 때’ 도달할 수 없는 열망을 이기려고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어” 하며 화자는 스스로를 위무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열망을 접을 수는 없는 일. 따라서 그(화자)는 ‘술취한 개발바닥’이 되고 ‘굶주린 늑대의 침’이 되고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 눈빛’이 되고 ‘번번이 뒤집는 여우혓바닥’이 된다. 여기서 머무른다면 순환적인 행태에 그치고 말 것이 ‘그 혀에서 말이 나’옴으로 인해 전환된다. ‘맛의 분별점이/혀에서 말로 옮겨 가’게 됨으로써 형질을 달리한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담장 저편, 다시 포도가 영글어’가는 상황은 이제 체험된(완전한 극복은 아니고) 것이다. 그렇기에 ‘저 포도는 실 것이다/말이 있자 포도알들이 스스로 시어졌’고 ‘단맛과 신맛 사이엔 담벼락이 서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낸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비약이 이루어지니 ‘담 너머 넝쿨손을 건네는 그 때/나는 이미 여우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미’가 중요하다.
여우 같이 얄미운, 마무리까지 깔끔한 시. 이 시는 그의 수일한 작품 중의 하나로, 詩論詩로 볼 수도 있다. (친절한 주석은 없는 것이 낫지 싶다.)
4)_「쑥대머리」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恩淑이, 愛淑이, 良淑이, 賢淑이, 京淑이, 南淑이, 蘭淑이, 美淑이, 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했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거지꼴을 한 동박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아니면 마패를 숨긴 어사라도 대면했든지요
이 시가 불러오는 기억이 하나 있다. 가난했던 시절, 말린(사실 말릴 겨를도 없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귤껍질을 주전자에 삶아 찻물로 먹던 그 기억.
이 시도 재미가 있다. 알고보면 다 만들어쓴 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의 맛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한문으로 쓰면서 그 의미에 들어맞게 해설한 것이 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淑’이 ‘쑥’으로 비약된 1차적인 관문이 시를 들어올린다. 내 기억으로도 여학생 이름의 태반이 ‘淑’과 ‘順’이었으며 그 윗세대가 ‘子’가 많았다. 일단 이 시는 그것을 끌어올린 것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장욱이 ‘다른 서정’의 시대를 언급한 것과는 달리 나희덕은 (자신을 변명하는 듯하지만) 전통 서정시를 구축하는 회로로 ‘기억’과 ‘자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는 복잡한 우회로를 감안한다면, ‘기억’과 ‘자연’의 빈번한 채택이 곧 현실의 결여를 낳는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오히려 ‘기억’과 ‘자연’에 대한 제대로 된 되새김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정시의 노화(老化)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억’과 ‘자연’이 현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에 의존할 때 기억 자체보다는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결핍을 ‘기억’과 ‘자연’을 통해 역상(逆像)으로나마 비추기 때문이다〉(나희덕)고 했지만 여기서는 관음에 가까운 이미지를 기억이라는 물꼬를 통해, 전통적인 서정시 방식이 아닌 ‘쑥대머리’ 귀신형용의 모자이크로 형상화하고 있다.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하되 이미지로, - 그리고 새로운 어조로 - 이것이이 시의 한 특장을 구축하고 있다.
정숙이가 야물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서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했겠지만) 여자 이름에 ‘貞’자 만한 억압도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름 뒤에 ‘姬’자는 왜 그리도 많았던지, 여자를 여자라 이름한.
5)_「유물—순간을 기억하는 뼈」
골수암을 앓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을 양지로 옮기려고 무덤을 열었다
팔뼈를 수습하는데
왜 갑자기 자치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
가늘고 흰 손가락뼈를 수습하는데
왜 자꾸만 토끼풀꽃을 꺾고 싶은 것이냐
동생의 귀밑머리가 그리운 것이냐
내 귀밑머리는 왜 이다지도 허전한 것이냐
엄숙하게 들어올리는 해골은 왜 또 경망스레
떼굴떼굴 굴리고 싶은 것이냐
공놀이를 하고 싶은 것이냐
고스란히 두고 간 것이야
지상에서 누린 아름다웠던 순간들
황천에선 여태껏
‘뼈에 사무친다’는 전보가 한 건도 오지 않았어
간혹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는 뼈의 집으로
토끼풀꽃 같은 눈이 송이송이 내릴 뿐이었어
그때마다 동생의 얼굴이 가슴에 사무치고 사무쳤어
이 시를 보니, 생각난다.
“더 좋은 데로 옮겨 드릴라고 하는 거니께 놀라지 마셔유, 조상님. 파묘요!”
큰아버지가 이장을 하면서 묘에다 대고 하셨던 말, 그리고 송판 위에 얹혀져 묶이던 뼈들. 그러나 그것은 나 잘되려고 나 편하려고 날 잡아서 했던 일. 뼈와 아무 연관이 없던, 아니 추억이 없던 나는 무료를 일로 달랬던 것 같다.
이 시를 보면 니체(Nietzsche)가 기억술의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으로 ‘고통’을 들었던 사실이 실감난다. 여기서 시적대상이 화자에겐 동생이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교통사고 등 일순간의 재난에 의해 죽었다면 화장을 하거나 애장터에 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골수암으로 고생만하다 죽은 자식을 그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 그 고통스런 과정 속의 기억을 모두가 내장하고 있으므로 그 고통은 추억을 환기하는 요소가 많고 또 깊을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런 안스러움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죽음에 대한 엄숙주의가 아니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장난스런 방식은 주목받을 만하다. 죽음이 불러오는 그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 죽음 자체에 대한 엄숙한 마음 그 이면에 있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당혹스러운 이율배반적인 엉뚱함—그에 대한 장난끼—에 대한 고백이 이 시에는 있다. ‘팔뼈’를 수습하는데 ‘자치기를 하고 싶은’ 충동, ‘손가락뼈’를 수습하는데 ‘토끼풀꽃’ 꺾고 싶은 충동, 그리고 ‘해골’을 들어올리는데 ‘굴리고’ 싶고 ‘공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 들은 어쩌면 지나친 슬픔이 누른 그 이면이 아닌가 한다. 축제가 사회적 ․ 관습적 억압을 푸는 계기이듯이 여기서 동생의 이장은 그래서 축제 같은 성격을 띤다. 골수암으로 죽은, 그렇기에 지닌 체험이 육화된 죽음을 다시 대하는 것이기에 엄숙으로는 사실상 이길 수 없는 지경인지도 모른다. (시적 방식이면서도 시적 상황이 밀고 가는 자연스런 상황이기도 하다.)
‘사무치는’ 슬픔이면서도 사무치게 느껴지지 않게, 슬픔이되 슬픔 아닌 것처럼 하기는 쉽지가 않다. 여북했으면 ‘시치미떼기’가 시를 육화하는 한 방식일까. 여기선 시치미떼기라기보다 슬픔을 드러내는 역의 방식, 그러니까 밝음으로 보여주는 슬픔 같은 것을 본다.
6)_「윤중호⁰ 죽다」
그런데 ‘죽’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글자일까
윤중호 석 자 뒤엔 아무래도 낯설다
‘지읒’이 ‘기역’에 가 닿기까지
길가엔 어허이 에하 상두 소리 울릴까
저 산 모양 ‘죽’ 자 날망에는
고봉밥처럼 황토 봉분 외로울까
‘지읒’과 ‘욱’ 사이 나지막한 양지녘
고통도 시름도 이제는 내려놓고
가벼이 문지방 넘어가는 넋은 있으리
‘주’의 복판 웅덩이엔
차마 못다한 말들 썩어 고여 우울하리
우울하여 마침내 긴 주름 아득한 ‘지읒’ 이겠네
‘주’와 ‘기역’ 사이 어느 고샅에
산동네 자취의 날들 있으리
떠나간 아버지와 삭발하는 여동생 있으리
눈물 훔치며 돌아나오던 옛동네도 숨어 있으리
그 고샅 끝에서 새 옷 갈아입고
쌀 세 알 물고
다락 같은 일주문 ‘기역’ 자 문턱에 덜컥 걸려 넘어지면
그대 문득 저승이리
이승엔 왈칵 쏟는 뜨거운 국솥같이 통곡 있으리
기어이 일어나버린 저 ‘죽’ 자의 식은 정강이를 붙잡고
감꽃처럼 툭 떨어진 몸 허물 앞에서
어머니는 우신다
그저 우신다
⁰시인 윤중호는 지난 겨울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집 세 권이 있다.
‘죽음’이 시가 될 때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냐가 중요하다. 죽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것은 화자의 상태에 미치는 영향 정도를 좌우하고 형상의 내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허나, 어떤 죽음이 시가 되려할 때, 시로 육화될 때 화자에게 절박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어떤 ‘죽음’이 시가 될 때는 드러내는 방식이 중요하게 된다.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시가 화자의 절박성만 더해지고, … 영웅적인 요소를 더해야 되고 … 그러나 모든 죽음은 보기 따라서 영웅적이 아니기에 영웅적이다.)
이 시는 간단하다. 제목을 ‘죽다’로 붙이고(시의 제목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다.) ‘ㅈ’과 ‘ㄱ’ 자체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ㅈ’과 ‘ㄱ' 사이, ‘주’와 ‘ㄱ’ 사이, ‘ㅈ’와 ‘욱’ 사이를 변주하면서 고인의 삶에 대해 노래한다. 산 내용은 거기서 거기나 여기엔 분명 화자를 울리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새로움이 ‘산동네 자취의 날들’이나 ‘떠나간 아버지와 삭발을 하던 여동생’이 있던 가계사, 그리고 ‘눈물 흘리며 돌아나오던 옛동네’를 떠난 청년기의 가출, ‘그저 우시는’ 현재적인 어머니—일상적 혹은 과거적 사실이 형상의 옷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 형식의 새로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이 진심이고 존경하는 내용은 많이 보았으나 이러한 형식적 진심은 보지 못했다. 좋은 시다. 그래서 해설이 짧다.
7)_「봄날-주꾸미회」
앵두꽃도 살구꽃도 피었다 일러라
그 사이 복사꽃도 배꽃도 다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앞산을 보고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으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 분홍 불이 붙는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직하게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⁰이 울고 야야, 주꾸미
배가 들었구나,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초고추장을 버물여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마씨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할 환장할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히 뱃고동이 울었다.
⁰왱병:가전 비법으로 대물림하여 내려온 식초의 눈을 살리는 촛병.
그러고보니, 죽음은 맛을 잃는 것. 아니 맛을 보지 못하는 신세를 말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고 ‘밥숟갈 놓았다’라고 하나 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을 두고 말함이다.) ‘니 할마씨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하는 그것은 진정한 안타까움이나 그보다는 이 맛을 보는 자들의 미안함이 섞여있는 그리움이다. ‘아버지 주꾸미 한뭇을 사오’신 것도 그래서 일 것.
이 시는 원경에서 내려다 보는 그윽한 맛을 준다. 높이서 보면 갯벌도 보이고 들어오는 배도 보이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떠는 집집이 보인다. 참 편안한 풍경이 천천히, 아니 느리게 하루치 흘러가는 듯하다. 하루치의 봄 서정.
봄날, 화자는 앵두꽃도 살구꽃도 피었다 ‘일러라’ 복사꽃도 배꽃도 다 피었다 ‘일러라’ 하면서 시의 장을 연다. 봄은 또 봄이라 할머니의 등마저 자꾸 간지럽게 하는 것이라서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는 선언을 불러오고 그 선언이 진달래에 불을 붙게 한다. 등이 간지럽고 진달래 불 붙고 늙은 할마씨가 입맛조차 다시게 만든다.
‘달기가 햇뻐구기 소리 같다’는 이 맛에 끌린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아삭아삭 씹히는 맛’ 그 맛을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 시가 환기하는 힘이다.
계절이, 특별한 음식(주꾸미)이 불러오는 죽음의 이미지가 개포가를 내려다 보고 있다.
환장할 환장할 봄날, 주꾸미 얼은 주꾸미 전골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아, 환장하겠다.
음식을 가지고 쓴 시를 여러 편 보았지만 그 중 좋은 시에 꼽힐 것 같은 시다.
8)_「해변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긴 칼 한 자루를 갖고 싶었다
푸른 달빛처럼 빛나는 칼
물결들이 닦아내고
모래알들이 날을 갈아
해변이라는 길고 긴 칼이 완성되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퍼런 날을 가진
녹슬지 않는
바다와 연결된 푸른 몸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새들이 맨발로 날아다니고
위험한 줄도 모르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때때로 길게 드러누운 칼이 빛나곤 하지만
해변은 쏴아-쏴아- 간곡한 음악을 연주할 뿐
몸을 열어 텅 빈 조개껍데기나 부드러운 해조 같은
마음을 토해낼 뿐
저 푸른 칼
바다의 새순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좀처럼 제 무딘 칼날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를 보았을 때, 낙산사에서 낙산비치호텔 쪽을 바라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해변이 어떻게 칼로 태어나는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아, 칼 같은 바다. 하얗게 밀고 밀리는 파도는 칼날처럼 보인다. 무협지로 치면 검이나 도는 아니고, 반월도인데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양손에 쥐고 쓰는, 아니다 복어의 배처럼 길고 투명하게 누운 길고 큰 칼이다.
시에서는 어떤 이미지를 잡으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해도 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해변이 ‘칼’이라는 이미지로 본, 이 사실 하나로 이 시는 완성된다. 나머지는 거기서 거기다. 그만큼 그 이미지의 수일함이 이 시를 끌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칼은 함부로, 쉽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물결들이 닦아내고/모래알들이 날을 갈’았기에 가능한 해변이라는 길고 긴 칼이 완성되었기에 그렇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퍼런 날을 가진/녹슬지 않는’ 칼은 분명 매력적이다. 사실상 녹이 슬어야 갈아쓰고 그래서 더 빛나는 것이 칼이지만 이 칼은 써서 녹슬지 않는 칼이자 제 몸 안에 몸 밖에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유기체이다.
무엇을 베어낼 의도가 없는 칼!
‘저 푸른 칼/바다의 새순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좀처럼 제 무딘 칼날 보여주지 않는다’
이 마무리는 걸린다. 사족 같다.
9)_「상처 4」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 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리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 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구름처럼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의외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인연도 천천히 숲으로 돌아가네.
수박이 잘 익었는지 여부는 일단 색깔로 판명한다. 색 자체가 선명하면서도 다른 색의 부분과 분명하게 구분되면 일단 상품으로 친다. 다음으로는 두드려 본다. 좀 아는 사람은 누르면서 소리를 듣는다. 다음으로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요즘이야 그럴 필요조차 없다. 안 익으면 바꿔주고 또 반 갈라서도 파니 수박이 잘 익었는지 하는 판단이 무용하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대상에 대한 파악이라는 점에서 보면 결코 간과할 일 만은 아니다. 시각과 청각, 후각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 깊이 라는 점에서 후각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상처도 보이는 상처는 작다. 들리는 상처도 작다. 그러나 그 상처가 후각의 형태로 감지될 때는 심각한 상태이기에 가능하다. (심각성을 잘 느끼는 만치 잘 마비되는 후각이기에 인간은 살아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화자를 사로 잡은 것은, ‘나무를 찾게’까지 만든 것은 상처를 냄새로 풍기는 소나무였다. 구부러진 소나무가 멋지게 보인다는 것은 외형을 보는 것이고 사실 그 멋진 부분은 그 나무의 상처였다. 그 상처는 나무가 ‘체액으로/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한 결과이겠지만 당시의 상처는 냄새를 일으켰을 것이다.
문을 만들 때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잘라다 박으면 아주 훌륭한 손잡이가 된다. 전체가 부러진 가지 말고 상처를 입고 줄기에 붙은 부분이 짧게 남아 그 가지 쪽으로 잎이 자라는 발현이 차단될 때 부러진 가지는 상처를 견디는 일만 골몰하게 된다. 이 부분이야말로 썩지도 않으면서 좋은 모양을 낸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그림자에 몸 가리고 구름처럼 살았었네.’
나무는 상처를 가리지 않지만 스스로 치유를 한다. 가릴 수 있을 상처는 아주 작은 상처다. 그 만큼 여유가 있고, 체면을 버릴 정도로 급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가 가려도 그 냄새가 퍼져나갈 정도면, 후각에 감지될 정도의 상처면 심각한 상태다. 다만 인간은 상처를 입되 늘 그 상처를 ‘의외의 피’ 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의외라고 믿어야 시도 되고 살아지기도 하긴 한다.) 그런데 그 상처야말로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라는 고백을 불러오니 상처가 준 그 역이다. 허나 그것은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자의 말. 상처, 상처는 무슨,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상처인 것을. 상처라고 말한다면 이미 엄살일 수도 있다.
10)_「혼몽(昏懜)의 집」
떠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죽음의 링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 보면
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시대의 슬픈 관능 위에서
더불어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觸手)들아
아프고 병든
인간들의 극장에서
맹인가수처럼
우리는 노래했다
세상의 혼란과 사랑의 목마름을
저 완강한 삶의 공허 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인생을, 이별을
이제 목도 쉬고
듣는 이도 없다
나도 들어가 편하게 눕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하마드 알리가
링 위에 누우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
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이 시의 화자는 아직 괜찮다. 엄살도 있다. ‘맹인가수처럼/우리는 노래했다’가 그렇다. 나의 노래가 아닌 ‘우리’라서 그렇다. ‘내’가 아닌 ‘우리’를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이 된다. ‘시대의 슬픈 관능’을 얘기하고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를 얘기한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긍정하는 것은 긴 마라톤을 완주하고 누운 주자처럼 그 극은 분야와 상관없이 같다는 것이다. 특히 목숨을 건 몸의 도박은 더욱이 그렇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 보면/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가 공히 느끼는 접점이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지상의 촉수였던 이들은 지금 삶이 문제다. 생존, 생존 말이다. 그러니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하는 자책은 극한을 추구하다 생의 바닥을 본 자 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어찌 그 만의 말이겠는가. 상처가 냄새가 되어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절망을 맛보지 않은 자, 외치는구나.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저주나 탄식도 여유의 다른 말일 수 있다. 이 시는 엄살이지만 엄살 만은 아니다.
남의 삶을 꺾으려면 회의하지 말고
오직 그 행위의 목적만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삶은 늘 정당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울지니
「남의 삶을 꺾으려면」부분, 조은, 『현대문학 ․ 6』
상처를 입히는 자의 특성은 목적만 생각한다. 당하는 자는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절감 만하며 사는 존재다. 후자는 반성만 많이 한다. 사실, 반성 외에는 별로 할 것이 없다.
동물의 왕국에서
큰 나무 잎새를 말아넣는 기린이
어딘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한번도 그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함부로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길어졌을
목
「기린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부분, 고영서,『愛知』 05년 여름호
기린의 울음을 듣고 싶어졌다. 그 발톱이 보고 싶다. 그러니까 용불용설이, 거꾸로 쓰지 않아서(울지 않아) 목이 대신 길어진 셈? 이 상상력!
거름을 못 얻어먹고 늦되어
이파리들을 다 오므리지도 못하는 봄동은
아무리 얼어도 썩지 않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파리가
얼음장처럼 두꺼워지지 않더냐
그것은 이미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꽃이었던 것을
봄은 알기에 겨울을 밀어낸다
「大寒에 서서」부분, 박형진, 『창작과비평』05년 여름호
이 시엔 모처럼 보는 남성적인 힘이 있다.
봄동 겉절이에 밥 비벼 먹고 싶다, 바가지 밥으로. 어머니께서는 바가지밥 보고 지집 내쫓는다 하셨는데…….
평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김수영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말이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영향력을 미치는 데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거다. 그의 말은 알리가 링에서 누우면서 뱉어낸 말과 같은 ‘절실함’, 그리고 ‘치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내게도 밉다. 달리 인용할 사람의 말이 많지 않아 좀 많이 매달리게 된다.)
‘詩人이라는 혹은 詩를 쓰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큰 부담이 없다. 그런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事物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와진다. 그런데 이 의식을 없애는 노력이란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무척 힘이 드는 노력이다.’
지금 시인들이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힘드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묻고 있다, 당신과 나에게. 그리고 질책하고 있다. 진짜 ‘난해한 시’와 ‘不可解한 시’를 구분하면서(「生活現實과 詩」) 양심이 없이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인들이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難解의 帳幕」)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기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와 나는.
되지 않는, 의도적 난해는 역겹다. 대책없는 서정시(?)는 — 무대책하다고 해야 옳을/형식에 대한 고민이 전무한 — 짜증난다. 이장욱의 말을 인용하면서 평을 마친다.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의 삶과 세계는 전래의 서정적 어법으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이제 후위(後衛)에 남은 서정시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도원(桃源)을 이루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전래의 서정은 마음의 신화를 구축하는 방법이며, 이것으로는 전체나 본질 같은 관념과 무관하게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
윤관영 | 시인_본지 편집위원_ 94『윤상원문학상』등단, 96『문학과사회』첫발표_hasunahm@hanmail.net
1) 이장욱, 『문학과사회』05여름호
2) 박형준, 『문학사상 ․ 6』
3) 채풍묵, 『창조문학』05년 여름호
4) 권혁웅, 『現代詩學 ․ 6』
5) 원무현, 『시와사상』05여름호
6) 김사인, 『현대문학 ․ 5』
7) 송수권, 『愛知』05년 여름호
8) 박서영, 『시인세계』05년 여름호
9) 마종기, 『시안』05년 여름호
10) 김형수, 『시와반시』05여름호
《2005년 여름호 계간 시평》 -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②
—시를 사랑하기 위하여
책에도 인연이 있다. 읽지 않고 내처 둔 책이나 한 번 읽었어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책을 다시 보면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와 닿을 때가 있다. 民音社에서 발간한 책 『金洙暎의 文學-김수영全集別卷』을 읽을 때가 그랬다. 이전에 보았더라면 감동(감격이 맞을 듯하다)이 덜했을 것도 같고, 어설프게 읽고, 그 핑계로 다시 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다소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책으로 인해 읽었던 김수영 시와 산문이 좀 입체적으로 조명 되었는데, 솔직히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한 번 더 숙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 중에서 가장 와 닿은 구절이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반성이 되는 일침이다. 나에게 시평은 시를 제대로 알고 시에게 다가가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다. 시에 대해 공부도 하면서 진심으로 좋아하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러한 노력은 실패를 전제로 하기 마련이어서 시평은 나의 부족과 불성실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부족함과 불성실을 두려워 손 놓고 있으면 시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자기강제가 이런 무모함을 감행하게 했다. 시평에서 일관된 나름의 원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는 정도의 엄정함이 내게는 없었다. 아는 시인이라고 어줍잖게 손들어 평하게 되면 나 자신은 물론 그 평된 시인에게도 큰 결례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다. (김수영의 ‘바로 보마’ 라는 말이 내게 이처럼 와닿은 적이 없었다.) 내 시평은 그래서 의미과잉이었고, 그래서 길었다. 그 반성으로 내용이 많이 줄게 된 것이 저번 호부터였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는 치열한 반성의 반영은 아니었다. (이 평은 더 떨린다. 이런 반성을 전제로 한 것이 이 정도밖에 안되냐는 되물음을 내 스스로 내놓았기에 그렇다.)
봄호에서 열심히 읽고 뽑은 작품은 열일곱 시인의 총 열여덟 편이었다.
(「와리바시라는 이름」_이규리_『다층』), (「살어름」_이규리_『다층』), (「한번 스쳐 흐른」_천수호_『다층』), (「붉새」_신용목_『유심』), (「겨울 삽화」_안도현_『내일을여는작가』), (「어머니의 단층지도」_김평엽_『愛知』),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_박진성_『시작』), (「외곽의 힘」_문성해_『詩評』), (「허리를 구부린다」_허형만_『시인세계』), (「껍질의 본능」_길상호_『시인세계』), (「보랏빛 노래」_하두자_『리토피아』), (「낡은 피아노의 봄밤」_문인수_『창작과비평』), (「순두부에 박수를 보내다」_박지웅_『현대문학 5』), (「무덤 가에서」_김상미_『현대시학 3』), (「대보름, 환하게 기운 쪽」_손택수_『현대시 4』), (「봄날」_김휘승_『문학과사회』), (「기억—, 그 냄새」_함성호_『문학사상 4』), (「숨은 꽃」_김해자_『창조문학』)
여러 차례 읽으면서 최종적으로 10편을 선정했다.
1_「와리바시라는 이름」_이규리_『다층』
젓가락과 사타구니 사이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
그런 구조가 있다
여학교 때 체육선생은
개각(開脚)하는 아이들 등을 꾹꾹 눌러
나무젓가락 가르듯 기절시키곤 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간혹 젓가락이 반듯하게 나뉘질 않고
삐뚤어지거나 엇나가는 건
말 못하는 다리의 저항이
삐끗 다른 길로 들게 했을까
와리바시란 이름 딱지 영 못 떼고
생을 마감하는 불운처럼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이야기,
참 길고 질긴 이야기
시를 선정하면서 동시에 시 두 편이 좋은 경우는 이규리가 처음이었다. 내겐 묘한 체험이었다.
이 시는 시가 왜 이미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젓가락과 사타구니 사이/여자라는 상징이 있다’는 이미지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만 그 가까운 거리가 주는 울림을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여자이야기’ 일반으로 끌어올리는 힘이 이 시에는 있다. ‘참 길고 질긴 이야기’는 여자의 일생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데, 할머니가 되어서도 ‘내외’를 하는 모습이나 관계 후에도 팬티를 꼭 입어야 숙면에 드는 어떤 숙명적인 요소가 여자의 생에는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그런 구조가 있다’는 진술은 아프다. 수컷이 가진 폭력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진술은 ‘와리바시’를 든 존재란 측면에서 보면 남녀 공히 같은 죄의 주체다. 자장면이나 컵라면을 앞에 둔 존재로서 와리바시를 생각하면 ‘따먹는다’는 은어속에 담긴 폭력성이 저절로 와 닿는데, 곧바로 갈라지도록 가운데 홈을 파놓아도 곧이곧대로 갈라지지 않는 와리바시를 보면 나무의 결이 만든, 파놓아도 안 되는 숙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지 싶다.
‘와리바시’란 말이 부른 이미지와 더불어 ‘여자’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 시다.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그런 구조가 있는’ 여자의 일생, 그리고 ‘와리바시란 이름 딱지 영 못 떼고/생을 마감하는 불운처럼’ 여자라는 딱지 영 못 떼고 생을 마감하는 여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참 길고 질긴’ 여성사를 보여주는 시다.
2_「붉새」_신용목_『유심』
함양 상림 떡깔나무 숲을 지나며 바람이 머리를 땋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처녀였을 것처럼
어느 처음엔 한 덩어리였을 바람
강물이 교각 사이를 지나며 물결을 얻듯이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결을 얻는다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저 무늬
오래 거쳐온 것일수록 가늘게 갖는 결을 나는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만났다 붉은 속살이 열어놓은 일몰의 깊이로
빳빳한 허기를 세워 밀어넣었다 세월의 조각도가 음각으로 파내는 어둠마다 나날이 첫 피가 비쳤으니
훗날 어느 저녁의 갈피가 나를 탁본해낼 것인가
묻는 막연 또한 그러나 결로 빚은 숨인 것을 지나간 것들이 모른 듯 긋고 간 만큼씩의 허기를
교각이 강물 둘레에 물이끼를 치듯
서 있는 것들도 제 속에 주름으로 새긴다 자신의 중심을 포박하며 자라는 나이테처럼
시간의 갈비뼈에 붉게 꽂힌 늙은 여자여
먼 함양 상림이 너덜한 치마폭을 펼치는 저녁, 한 그릇 서쪽하늘에 담긴 세발 바람을 비벼먹는 어둠의 혓바닥 처음처럼 붉어
이 시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바람과 나무다. 장소는 함양 상림 떡갈나무 숲. 바람이 나무를 거치면서 가는 결을 얻듯이 나무는 ‘제 속의 주름으로 자신의 중심을 포박하며 자라는 나이테’를 새기고, 늙은 여자와 나 또한 동일한 대비의 한 축을 이룬다. 상호작용은 교각이 강물을 가르면서 물이끼를 거느리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여기서 늙은 여자는 ‘시간의 갈비뼈에 붉게 꽂힌 늙은 여자’로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 붉새 즉, 노을이다.
이 시에서 주체는 ‘늙은 여자’이고 이 시 전체를 밀고 가는 힘은 바로 ‘허기’다. 그것을 보면서 화자는 ‘훗날 어느 저녁의 갈피가 나를 탁본해낼 것인가’고 자신을 뒤돌아 본다. 구체적인 계기는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저 무늬//오래 거쳐온 것일수록 가늘게 갖는 결을 나는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만났’기에 가능했다. 이 시를 보면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그 교직의 페르시아 카페트를 보는 듯하다. 물론 ‘한 그릇 서쪽하늘에 담긴 세발 바람을 비벼먹는 어둠의 혓바닥 처음처럼 붉어’보이는 그림이 있는 카페트지만 말이다.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어 정교하게 이미지화된 이 시는 원색적인데, 묘하게도 밝으면서 어둡고 비극적이면서 반드시 비극적이지도 않다.
‘서 있는 것들도 제 속으로 주름으로 새긴다 자신의 중심으로 포박하며 자라는 나이테처럼’이라는 이미지가 좋다. 갈 수만 있다면 함양 상림에 가보고 싶다.
3_「겨울 삽화」_안도현_『내일을여는작가』
남부시장 정육점 골목에
소피를 파는 집이 있다
소피는 소가 쿵쾅쿵쾅 걸을 때 소의 몸 속을 돌던 뜨거운 것,
이 핏속에는 겨울 아침 언덕길을 오를 때 뿜던 콧김 같은 것도 혹 섞여 있을지 모르는데
못난 뿔처럼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거나
그 흔한 내장들처럼 평생 똥을 주무른 적도 없는
소피가, 지금은 차갑게 응고되어
붉은 고무 바께스에 담겨 있다
정육점 주인은 소의 살과 뼈를 발라내
저울로 일일이 무게를 달아 팔다가
소피는 대접으로 움푹 떠서 판다
한 대접에 천 원이다
‘겨울 삽화’ 라 이름한 제목이 주는 의문이 시에 어떤 이질성을 부여하고 있다. 더불어 ‘선지’라고 하지 않고 ‘소피’라고 한 언어 이미지가 주는 환기력이 있다.
이 시의 출발은 1연의 사실 제시에 있고 소피에 대한 화자 나름의 시적 상상력이 2연에 있다. 소피는 그냥 소피가 아니고 ‘소피는 소가 쿵쾅쿵쾅 걸을 때 소의 몸 속을 돌던 뜨거운 것’ 이고 ‘이 핏속에는 겨울 아침 언덕길을 오를 때 뿜던 콧김 같은 것도 혹 섞여 있을지 모르는’ 소피다. 게다가 이 소피는 ‘못난 뿔처럼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거나/그 흔한 내장들처럼 평생 똥을 주무른 적도 없는‘ 순수한 결정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과 상관없이 소피는 냉동시키지는 못하고 ‘차갑게 응고되어/붉은 고무 바께스에 담겨 있’는 하찮은 상품일 뿐이다. 그래서 달아서 파는 물건이 아니고 움푹 떠서 팔리는 존재다. (갑자기 소피 마렵다는 말이 좀 불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담담히 말하는 것이 주는 환기력이 크다.
이 시는 1연의 사실과 2연의 시적 상상력에 의한 긍정, 3연의 부정을 통한 긍정, 4연의 사실적 묘사로 시의 구조가 투명하게 읽히는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해장국을 한 그릇 땀 닦으며 먹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이 시에는 있다.
4_「외곽의 힘」_문성해_『詩評』
도시의 외곽으로
화훼단지가 펼쳐져 있다
견고한 비닐하우스 아방궁 속에서
천적도 없이 비대해진 꽃들이 사철 피어 있는 그곳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외곽에서 총이나 대포가 아닌
꽃들이 쳐들어온다는 것, 트럭을 타고
꿀과 향기로 중무장한 그들이
아침마다 톨게이트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는 것은,
꽃집마다
비장하게 피어 있는 저 프리지아들
그 빛깔과 향기가 필사적이란 것을
가까이 사는 벌 나비들은 안다
매연 속에서
암수술을 꼿꼿이 세워 꽃잎 펼치고 있는 것이
치열한 전투가 아님 쓰레기 더미에
저리도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진 꽃들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매일 수만 톤의 꽃들이 도시에서 학살되어도
내일이면 또 수많은 꽃들이 태어나는 외곽,
꽃들은 아직 젊고 혈기왕성하다
도시를 삥 둘러싸고
핵실험실이 아닌
꽃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희망적이다
그들은 매일 핵폭발하듯 꽃을 피운다
이 말이 통용될 수 있다면 이 시를 ‘개그적 상상력의 시’라 부르고 싶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외곽에서 총이나 대포가 아닌/꽃들이 쳐들어온다는 것, 트럭을 타고/꿀과 향기로 중무장한 그들이/아침마다 톨게이트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어법이 밝고 경쾌하며 문제를 접근하는 발상이 참신하면서 엉뚱하다.
어법이 밝고 켱쾌하며 엉뚱하게 문제에 접근한다고 하여 이 시가 대책 없는 희망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말하기에 앞서 그 희망의 근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비장하게 피어 있는 저 프리지아들/그 빛깔과 향기가 필사적이란 것을/가까이 사는 벌 나비들은 안다’고 말할 정도로 꽃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그리고 그 꽃들이 ‘매연 속에서/암수술을 꼿꼿이 세워 꽃잎 펼치고 있는 것이/치열한 전투’인 것은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인 것이다. 여기에는 꽃들을 학살하는 인간 세계가 개입되어 있으나 ‘도시를 삥 둘러싸고/핵실험실이 아닌/꽃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대체로 희망적이’ 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삭막한 도시가 그나마 굴러가고 존재하는 이유가 화훼단지로 둘러싸인 때문이라는 상상력은 결코 가벼운 것일 수 없다. 시적 상상력으로 채운, 시적 상상력으로 밝히는 도시 존재의 이유 같다. 도시의 비극을 정확히 보면서도 그 비극성을 위무해 주는, 그 존재의 이유를 달아준 수일한 시이다.
5_「낡은 피아노의 봄밤」_문인수_『창작과비평』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 년
뚜껑 한번 열린 적 없을 것이다. 피아노 속은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언제나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채 저도 헌집, 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컴컴한 벽돌조 양옥 같다. 문턱처럼 걸리거나
저녁노을처럼 걸리는 감정들은 뜰에, 저 서너 개
큰 독에다 묻었겠다. 잘 삭혔을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나겠지만
흉금이란 그러나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반짝반짝 올라가 하염없이 공중에 쌓인 소리,
뚜껑 밤하늘엔 별 총총 수심도 많겠다. 명멸, 명멸, 명멸,
사소하게 일일이 다 접으며 또 그렇게
겨울 보냈으리 누가
이 피아노를 힘껏 눌렀겠다. 기나긴 눈보라 주먹만한 눈발,
피아노는 폭설 창고일까 기쁨이거나 슬픔,
저 목련 폭발 환한 야음이다. 야반도주처럼 훨 훨,
봄날은 또 사정없이 날새누나. 두 발 벌려 무너지듯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문인수의 시는 같은 지면의 「얼룩말 가죽」도 좋았다. 굳이 이 시로 뽑은 것은 감동으로 와 닿아 해설하기에는 「얼룩말 가죽」이 편하지만 시적 완성도에서는 이 시가 나아 보였다.
이 시는 피아노의 검은건반처럼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가 박혀있다. 그 이미지 운율을 타고 시가 흐른다. 다르게는 삼겹살에 박힌 기름띠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절은 다름 아닌 봄밤. 어느 정도의 불화음은 용서 될 법한 시간이다.
피아노는 이제 재산 장식의 하나인 고가품 가구의 기능마저 잃었다. 자녀들에게 가르치려는 욕심에 장만된 피아노지만 아이들이 치면서 노는 것은 어른이 관심을 보이는 어떤 때로 한정된다. 그런 피아노이다 보니 뚜껑 한번 열린 적 없는 피아노요 콩나물 대가리가 그 속에 자랐을 피아노로 전락한다.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채 컴컴한 벽돌조 양옥 같은 상태로 자리한다. 조율할 필요성조차 상실된 상태의 피아노.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을까?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 아니면 봄에 취한 사람? 아니면 집의 일부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 아니면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어떤 것을 가진 사람? 그래서 속에 명멸, 명멸, 명멸하는 수심을 지운 사람? 아니면 봄날 사정없이 날새는 것이 안타까워 피아노에서 음을 목련처럼 폭설 창고처럼 터뜨려 올릴 줄 아는 사람? 과연 누구일까?
이 봄밤엔 아니 취하고 어찌 밤을 넘을 수 있을까. 누가 아무 피아노라도 좋으니 불화음이라도 좋으니 다만 신나게 두드려 주시라. 생각난다, 그 시구.
‘달밤에 술동이만 혼자 쓸쓸히 놓아 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쳤다’ 든지, ‘눌렀다’ 라고 했으면 이 시가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했겠다’가 주는 거리와 다소의 의뭉스러움이 이 시의 맛을 더해주고 있다.
6_「순두부에 박수를 보내다」_박지웅_『현대문학 5』
순두부에 속을 데였다
마음놓고 넘기다 제대로 걸린 것인데
얼마나 야무지게 뜨거운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맷돌에 갈리고 포장되고 삶기며
이 순두부는 몇 번을 죽었다
죽을 때마다 그 부글부글 끓던 속사정
나는 오늘에야 절절히 배우고
순두부는 결코 순한 놈이 아니라고
내 어린 연인에게 떠들어대고
말랑해도 말랑하게 볼 수 없는,
목숨 아홉에 속을 알 수 없는,
불여우 같은 순두부를 뜨며
뭉개질 대로 뭉개진 몸으로도
뜨거운 맛 한번 보여준 순두부의 외유내강
그 꼬장꼬장한 힘을 경탄하며
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이 시의 특징은 엄살이랄지, 약간의 과장에 그 매력이 있다.
‘얼마나 야무지게 뜨거운지/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라는 말에도 약간의(계산된) 과장이 묻어있다. 그러니까 체험은 진실하되 근엄한 접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계속 이어지면서 두 번째 파동 치는데, ‘순두부는 결코 순한 놈이 아니라고/내 어린 연인에게 떠들어대’는 장면에서 보듯 스스로 허풍임을 드러낸다. ‘그 꼬장꼬장한 힘을 경탄하며/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가 마지막 파동이다. ‘경탄’이나 ‘뜨거운 박수’가 자신의 감탄을 높여 드러낸 말이니 그 자체로 과잉이자 과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것이 밉지가 않고 또 그 체험의 진정성을 깎아먹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시를 더 개성적으로 만들고 있다. 즉 시의 어조의 경쾌함을 만들어내는 측면과 그 구조상 새로운 점 - 안도현의 ‘겨울 삽화’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도 있다.
과장된 어법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것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외려 그렇게 말함으로 인해, 잘난 척하는 그 내용이 진실임을 드러내고 있다. ‘맷돌에 갈리고 포장되고 삶기며’ 몇 번을 죽은 순두부, ‘죽을 때마다 그 부글부글 끓던 속사정’을 나는 오늘에야 ‘순두부는 켤코 순한 놈이 아니라고’ 절절히 배웠다고 정색을 하면 오히려 어색하다. ‘말랑해도 말랑하게 볼 수 없는,/목숨 아홉에 속을 알 수 없는,/불여우 같은 순두부를 뜨며/뭉개질 대로 뭉개진 몸으로도/뜨거운 맛 한번 보여준 순두부의 외유내강/그 꼬장꼬장한 힘을 경탄’한다니, 순두부에서 ‘꼬장꼬장한 힘’을 이끌어내는 성찰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 살덩어리 순두부는 비지처럼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물흐물한 속 같지만 사실은 양념이 침투하는 것을 끝내 지켜내면서 익기에 그렇다. 먹어보면 안다, 아니 숟갈로 떠보면.
7_「대보름, 환하게 기운 쪽」_손택수_『현대시 4』
대보름 뒷날 택배가 왔다
나물과 부럼과 과일이
부산에서 일산까지 건너왔다
찰밥은 먹었느냐 삐툴삐툴한 글씨와 함께
찰밥에 빈속 채우고
찌그러진 사과 한 알 깎는데
사과, 찌그러진 쪽으로
씨앗이 없다
씨앗이 사과를 부풀게 하였었구나
씨앗을 먹이기 위해서 사과는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무거웠겠구나
씨앗을 놓친 달이 기운다
기운 달이 대보름
젖을 물린다
부산에서 일산까지
택배로 건너 온 달,
환하게 기운 쪽에서 울컥
찡한 시장기가 치민다
일 년에 어머니로부터 확인 전화를 받는 때가 꼭 2번 있는데, 그게 내 생일 때와 대보름날이다. 어떻게 오곡밥 먹으러 올 수 있냐 물으신다. 물론 딱히 그 날 못 가면 나중에라도 나물 반찬 주시는 걸 받아온다. 이 같은, 이 시에는 동일한 체험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택배를 받고, 찌그러진 사과를 깎고 있다. - 왜 찌그러진 사과일까? 과수원 하는 이웃이 상품으로 내놓기에는 좀 처지는 사과를 어머니에게 줬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보관해 두었다가 내게 주셨다, 공주네서 얻어왔다는 말과 함께. 여기 찌그러진 사과도 출발은 그렇지 않았을까? - 찌그러진 사과를 깎다가 ‘사과, 찌그러진 쪽으로/씨앗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연상 작용을 하여 ‘씨앗이 사과를 부풀게 하였었구나/씨앗을 먹이기 위해서 사과는/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무거웠겠구나’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화자는 성장해도 씨앗 같이 살의 영양 공급을 받는 존재이다.
‘부산에서 일산까지/택배로 건너온 달’이라는 유기적인 전환도 좋다. 그러니까 택배는 씨앗이 부풀린 살덩어리인 셈.
아쉬운 점도 있다. ‘환하게 기운 쪽에서 울컥/찡한 시장기가 치’미는 존재가 불명료하다. 왜냐하면 오히려 분명해야 시의 울림이 클 것 같기 때문이다.
8_「봄날」_김휘승_『문학과사회』
봄날, 꽃들은 피는데, 멍하니, 백치 같은 표정으로 마주치는 것은 목련이라고 했다, 속없이, 환하게 눈 가리다가 더 환하게 뿌려지는 것은 그냥 개나리라고 했다, 떠나든 잊히든 죽든, 꽃 핀다며 비릿하게 번지는 것은 진달래라고, 뜻 지워진 이름을 중얼거린다고 했다, 봄날, 때도 자리도 없이 다 닳았는데,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쏟아지는 것은 그냥 벚꽃쯤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게 헛구역질로 드러난 몸이, 속 보이듯, 피고 지며 퍼져가는 것밖에 모른다고, 모른다고 했다.
이 시는 봄꽃에 대한 나름의 이름 붙이기 시 같다. 크게 개성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개성적이고, 잔잔한 것 같은데 이미지가 강하다. 자신의 명징한 주장이면서 남말하듯 객관적이다.
‘봄날’ 이라고 서두에 툭 던지면서 이어지는 운율이 시를 개성적이게 하면서 선을 굵게 만들고 있다.
어디선가, 평을 붙일 필요도 없이 시 자체만으로 평이 되는 시를 꿈꾼다더니, 이 시는 그냥 다시 재인용하는 것이 이 시에 대한 답일 듯하다. 시를 따라 천천히 중얼거리다 보면 (반점에서는 꼭 쉬어야 한다) 그 맛이 씹힌다. ‘~라고 했다’고 남의 말하듯 하는 중얼거림이 사실은 화자의 진심이다. 시의 결말에 ‘모른다고, 모른다고 했다’가 ‘~라고 했다’를 강화시키면서 시 전체를 증폭시키고 있다.
봄날, 꽃들은 피는데, 멍하니, 백치 같은 표정으로 마주치는 것은 목련이라고 했다, 속없이, 환하게 눈 가리다가 더 환하게 뿌려지는 것은 그냥 개나리라고 했다, 떠나든 잊히든 죽든, 꽃 핀다며 비릿하게 번지는 것은 진달래라고, 뜻 지워진 이름을 중얼거린다고 했다, 봄날, 때도 자리도 없이 다 닳았는데,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쏟아지는 것은 그냥 벚꽃쯤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게 헛구역질로 드러난 몸이, 속 보이듯, 피고 지며 퍼져가는 것밖에 모른다고, 모른다고 했다.
9_「기억—, 그 냄새」_함성호_『문학사상 4』
너의 입술은 주목나무 열매보다 붉다 입술의 향기—훅 미쳐오는 너의 몸 안의 기억, 너의 붉은 입냄새에 취해, 시방 나는 비점막을 뚫고 뇌에 도달하는 백색 코카인 가루보다 더 깊이 너의 색(色)을 흡입한다—후각이야말로 피의 감각이지
(사랑한다는 환청까지)
괴로웠던 그날의 기억을 일깨우는
고통의 냄새는 우리를
호두 껍질 같은 작은 욕조 속에서
처음의 사랑을 나누게 하네
어떤 여자도 다른 여자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네
이 치명적인 기억—지워지지 않는 살내음, 의식을 지배하는 음식의 향기, 전체로 다가오는 장소의 냄새, 고통 받으면 받을수록 필사적으로 행복해지려는 몸처럼
너를 향해, 온몸을 휘청 기울어지게 하는 기억—, 그 냄새
고요하게, 아주 천천히, 그러나 나중에는 거대하게 무너져 내리는
저 해식애처럼
너의 몸에서 나의 몸으로 붕괴하는
이 깊은 절벽
혀끝에서 입 안으로, 기도를 타고 넘어오는 코끝의 감각—너의 냄새로,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결코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풍경이 아닌 풍경을 펼치며 잊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여기에서 여기의 바깥으로, (전체로) 나의 바깥으로 나를 이끄네
내가 과문한 탓일 수 있겠지만 함성호의 시는 초기시가 재미있었다. 건축물적 상상력(?)으로 불리는 초기시(『56억 7천만년의 고독』)엔 시 편편을 구분시키는 특징이 있었다. 누군가는 ‘원재료’가 있다고 하기도 했다. 『聖타즈마할』에 와서 그가 각주를 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 공들였다는 말에는 공감이 갔지만 시의 편편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 그 냄새」, 이 시에는 강렬한 어떤 개성이 느껴진다. 함성호의 시 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
‘후각’에 대한 집요한 사유가 돋보이는 시다.
‘후각이야말로 피의 감각이지’
이런 단정은 쉽게 나올 수 있는 언명이 아니다. 조세핀의 독특한 체취가 나플레옹을 사로잡아 '씻지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곧 그대에게 가리다.' 고 군본부에서 조세핀에게 보냈다는 유명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도 다른 여자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는 진술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랑을 포함한 모든 기억이 ‘냄새’에서 오는데 ‘저 해식애처럼/너의 몸에서 나의 몸으로 붕괴하는/이 깊은 절벽’이란다.
피자를 하나 시켜도 먼저 당도하는 것이 냄새다. 후각이 시각보다는 먼저라는 얘기다. 그러나 후각은 쉬이 마비되는 감각. ‘향감별사’ 라는 직업이 있으니, 이들은 주로 화장품 회사와 술 만드는 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하는데, 하루 두 차례의 시험을 한다고 한다. 예민한 코를 유지하기 위해 코청소하는 게 일인데, 냄새 이미지에 대한 집중도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썩은 코를 뚫는다고 식염수를 달고 산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고, 선천적인 감각이 전제되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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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_「숨은 꽃」_김해자_『창조문학』
비오는 밤거리
은행나무 아래서 멈춰 섰다 발 밑에
연두빛 애벌레 같은 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차바퀴 덮쳐오면 잠시 몸 들썩이다 지나가고 나면 그뿐
축축한 아스팔트에 누워 저마다 고요하다
어데 숨어 피어나 숨 놓았나
아무리 올려다봐도 흔적 없다
봄 내내 터져나오던
찬란한 색색에 눈멀어
잎 뒤에 숨은 꽃 다 잊었다
봄비 속 입적에 드신 몸뚱이
떨어져서야 말하는구나
지기 전엔 꽃인지 모르는 것도 있다고
저 無盡藏, 구부정한 은행꽃 허리여
김해자의 시엔 ‘시적대상’에 대한 조용하고도 오랜 응시가 있다. 그는 첫시집으로 『無花果는 없다』를 상재했는데, 그 제목에서 보듯(굳이 한문으로 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어떤 것에 대한 연민이 그의 시의 주요 흐름을 이루고 있다.
화자는 지금 봄비가 오는 밤거리에 있다. 은행나무 아래에 서있는데, 연두빛 애벌레 같은 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알고보니 그것은 구부정한 은행꽃이었다. 이 은행꽃은 져서도 ‘어데 숨어 피어나 숨 놓았나/아무리 올려다봐도 흔적 없’는 존재로 ‘봄 내내 터져나오던/찬란한 색색에 눈멀어/잎 뒤에 숨은 꽃 다 잊었’던 내 눈에 져서야 비치는 그런 존재다. 그 존재는 ‘봄비 속 입적에 드신 몸뚱이’로 ‘떨어져서야 말하는’ 존재다.
‘지기 전엔 꽃인지 모르는 것’인 구부정한 은행꽃은 결국 꽃이 없는 과일은 없다는, 無花果의 다른 형상인 셈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저 ‘無盡藏’이다. ‘다함이 없이 많음’도 의미하지만 ‘덕이 넓어 끝이 없음’도 의미하니 밟는 발이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으랴.
내겐 홑잎나물을 훑는데, 손바닥에 핀 꽃잎이 걸려 놀랐다는 말만큼이나 뜨끔하다.
그의 시 편편에 나타나는 ‘본다’는 화자의 행위에는 모든 감각이 종합된 ‘렌즈’다. 그런데 그 ‘렌즈’는 불교적인 경향성이 강하다.
—다시 시를 사랑하기 위하여
시보다 짧은 시에 대한 나의 평을 보면 가분수 같은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어줍게 느껴진다. 시를 사랑하는 나의 지점이 거기까지다. 과장하고 늘어놓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그간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인 것 같다. 시를 사랑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시평에 임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아래에 간략하게 평을 하는 시에도 주목을 해 주시기 바란다. 간평을 했다고 해서 가벼운 시는 절대 아니다. 안면이 있는 시일수록 더 엄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스쳐 흐른」_천수호_『다층』) 이 시는 한 번 보고 잘 지워지지 않는 지명처럼, 초경의 흔적처럼 남아있는 큰언니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머니는 그 흔적을 삼십 년 동안이나 지우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자신에게는 ‘나는 그저 한 번 묶고 풀어뒀을 뿐인/큰언니라는 검은 댕기’이다. 한번 스쳐 흘렀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도 이렇게 있음을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_박진성_『시작』) 이 시에는 김수영의 말이 딱 들어맞는 대목이 있다.
‘시는 다름아닌 생활의 절실한 반영이면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시 자체는 훌륭하지만 그의 시가 비슷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허리를 구부린다」_허형만_『시인세계』) 내겐 어머니와 같이 걸으면서 고백하는 아들의 말이 절실하게 들린다.
‘환갑이 되어서야 구부러지는 허리/그렇구나 구부릴 수만 있다면/구부릴 수 있는 데까지 구부리겠다/온몸을 말아서 공처럼 둥글어지겠다/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영혼의 문 앞에 당도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껍질의 본능」_길상호_『시인세계』) ‘한참 후 쟁반 위 벗겨놓은 껍질을 보니/붙어 있는 살점을 중심에 두고/돌돌 자신을 말아가고 있다’는 이 이미지가 좋다.
(「보랏빛 노래」_하두자_『리토피아』) 이 시에는 감자가 썩는 후각적 이미지가 햇살을 따라 길을 내는 시각적 이미지(보랏빛)로 변주되어 끝내는 청각적 이미지(노래)로 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다. 다만 좀 실핏줄 같다. 그러나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무덤 가에서」_김상미_『현대시학 3』) 엄마의 무덤에 갔지만 화자는 나비처럼 가볍다. 어조도 그렇다. 슬픔을 모르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꽃밭에 소풍간 듯한 느낌을 준다. 왜 그녀의 이니셜이 ‘나비’인지 알 듯도 한 시다. ‘무덤 파는’이 중의적으로 울린다.
시를 선정할 때 읽으면서 느낌이 좋은 시를 접어둔다. 그리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정기 구독지는 몽땅 다시 읽기도 한다. 어쩌다가 아는 시인의 좋은 시가 있어서 앞에 것을 접어 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뒤에 시가 좋았다. 그런데 또 자세히 보니까 3편이 다 좋기는 한데, 선정하기에는 좀 미흡했다. 차라리 한 편이 좋고 두 편이 좀 미흡한 것이 나은 것이 예술, 혹은 문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니다. 세 편 다 좋아야 한다. 이 번에 이규리와 문인수가 그랬다.
지금 내게 새로이 인연처럼 다가온 책은 김현 평론집이다. 정말이지 무슨 지병처럼 시를 보고 얻은 어떤 결론이 그래서 분명하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사랑해 폭 넓게 애정으로 시를 대한 그의 마음까지 본받고 싶다. 그런 생각에 행복하다. 부끄럼을 이만 줄인다.
05 봄《계간시평》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_윤관영
계간 평을 쓰다보면 내가 선정한 시가 다른 잡지에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땐 시를 옳게 본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다. (역으로 다른 잡지에는 안 실려 나만이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시도 있기는 하다.)
한 잡지에서 재선정된 윤제림의 시 「국도」를 보게 되었다. 이 시는 나도 참 좋게 보았기에 흐뭇했다. 그런데, 평을 쓰기 전에 선정해놓고도 전체 평의 흐름에 맞지 않아 같은 지면에 있던 그의 시 「외할머니는 슬며시」를 추억 코너에다 부분 인용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황당했다. 평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웠다고 자부했는데……. 평의 틀에 시를 꿰어 맞추려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까 봐 경계했는데……. 그런 경계 속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찾고 그 시를 가지고 개요를 짜도, 취사 선택이 글의 흐름에 맞춰진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기사 좋은 시는 그냥 보여주기만 해도 빛을 발하는 것이어서 따로 해설이 필요 없기는 하다.) 윤제림의 시 「국도」가 그랬다. 뭐랄까 평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은 시를 평에 맞춰 인용하려다 보니 자리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런 셈이다. 다른 시로는 함기석의 「뽈랑공원」이 좋았는 데 이 또한 평의 자리가 애매해서 빠졌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 마음에 드는 시를 십여 편 선정하고 그에 대한 간단한 느낌을 쓰고자 한다. 그게 그냥 시를 살게 하는 것 같아서 이다. (한 편의 시에 두세 페이지의 글을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에 평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는데 내게는 그렇게 쓰는 재주가 없다.) 평이 필요 없을 만치 좋으면 그냥 시만 보이기로 하고 나름대로 아는 척 할만한 무엇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보고자 한다.
1_손택수_「옛이응」_『내일을여는작가』
이응에 꼭지 하나 달아주고 싶다
옛이응, 탯줄을 잘못 잘라
볼록하니 튀어나온 배꼽
끝에선 젖내가 난다
응앙 응앙 젖꼭지 물고 우는 아가와
엄마의 뽀얀 살냄새가 난다
이응 이응 잘린 꼭지를 따라가면
한 천 평쯤 되는
방울토마토 밭이 나올 것 같고
주근깨투성이 딸기밭과
풋사과밭 풋냄새와
호박잎 위에서 또록또록
여물대로 여문 이슬밭이 펼쳐질 것도 같은데
꼭지를 쥐고 헤
혀끝에 욕심껏 올려놓는 모음
모음의 모음
학원 고전문법 시간
이제 알겠냐, 옛이응 응?
칠판을 두드리며 돌아서면
고단한 아이들 모두 졸고 있다
이응의 젖꼭지 물고 옛, 옛 꾸벅이고 있다
이 시를 보면, 무엇이 옛이응으로 시를 쓰게 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이 1차 충격, 날 끌었다. 만약 그 지점을 달리 감동이라 말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
그러면서 이 시는 내가 학원을 다니던 종로 시절로 데려간다. 중․고 시절을 검정고시로 보낸 나는 예비고사를 앞둔 8개월 전 즈음에 古文이라는 과목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단과반 수강까지 했던 학원 국어 시간, 그게 어디 두어 달 수강한다고 해서 넘어설 문제였던가. 이 시에는 그런 추억을 환기하는 힘이 있다.
이 시는 ‘옛이응 응?’ 하는 되물음으로 묘한 울림을 주지만 너무 완결로 몰고간 듯한 느낌을 주는 한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소함이 상쇄되는 힘을 이 시에서 본다. ‘이응에 꼭지 하나 달아주고 싶다/옛이응, 탯줄을 잘못 잘라/볼록하니 튀어나온 배꼽/끝에선 젖내가 난다’는 인식이 좋다.
꼭지를 쥐고 헤/혀끝에 욕심껏 올려놓는 모음/모음의 모음
이 구절을 보면 방울토마토 꼭지를 쥐고 먹는 모습도 생각나지만, 학창 시절의 장난이 더 떠오른다. 왜, 있잖는가? 혓바닥을 오무려 침 괸 혀끝에 숨을 넣어 날리던 풍경. 내겐 풍경도 풍경이지만 ‘헤’의 울림과 더불어 <옛이응>이 ‘혀끝에 욕심껏 올려놓는 모음’이라는 인식도 좋고 그것을 ‘모음의 모음’이라는 단정에 이르는 직관에 더 끌린다.
이 시 때문에 ‘옛이응’이 더 좋아질 것만 같다. 서예에서 한글 서간체를 쓸 때 끌리던 가운뎃점처럼 말이다.
2_윤중호_「일산에서-주말농장」_『녹색평론』1-2월호
일산시민모임에서 땅을 빌려 만들었다는 주말텃밭
쇠비름만 자라는 다섯평짜리 박토지만
이름은 어엿한 주말농장
글쎄 그런 걸 해도 괜찮을까?
무공해 채소가 어떻니, 흙을 밟는 마음이 어떻니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
상추, 쑥갓, 고추, 가지, 열무, 하지감자 등속을 심어서
위층 아래층 두루두루 나눠먹는 재미는 있을거야
뻔뻔하게 끄덕이면서
알 만한 얼굴도 부러 외면하면서
그렇게 지겹던 호미질도 황송하게 하면서
방울토마토의 진딧물까지 반가운
이게 무슨 짓일까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서도 신도시 아파트에 살면서
불쌍해라, 환호성치며 여치 소금쟁이 고추잠자리를 쫓는 아이들을 보면서
빠꼼살이 같은 주말농장의 김을 맨다.
그나마 정갈하게 제 태를 내는 밭은, 보물 같은
노인네들의 거친 손이 쉼없이 단도리하는 곳, 그래도
터덜터덜 주말농장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렌다.
녹색평론 같은 지면에 故윤중호의 다른 시 「영목에서도」가 있다. 이 시를 보면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보인다. 상당히 진실하게 울린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시가 어떤 감동으로 울릴 때 우리는 화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고 그 울림과 일치되는지 그려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감동이 있다. 그럴 경우 감동은 곱이다.
그러나 나는 더 윤중호다운 시(그런 말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고,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가 「일산에서」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시로서는 더 끌린다는 말이다. 쓰기로는 「영목에서도」가 좋지만 시로서는 「일산에서」가 아닌가 한다. 웃기는 말 같지만 평을 써보면 평 쓰기에 좋은 시와 시 자체로 좋은 시가 구분된다. 당연히 끌리는 쪽은 평쓰기 좋은 시다.
화자는 ‘주말텃밭’, ‘주말농장’이라는 다섯 평짜리 박토에 참여하면서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즐겁기에 화자는 ‘글쎄 그런 걸 해도 괜찮을까?’ 하고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 하고 고민을 한다. 그래서 즐거운 고민이다. ‘뻔뻔하게 끄덕’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터덜터덜 주말농장에 가면/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레는 그다. 그런 설레임이 비단 화자가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나이가 된 때문만일까? 방울토마토 진딧물까지 고마워하는 것은 그가 이제 호미질 맛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반성적 성찰은 주말농장의 현실 자체에 있지는 않다. 어쩌면 주말농장은 현실의 왜곡을 더 느끼지 못하게 하는 완충일 수 있기에 그렇다. 마당에 풀은 못 뽑아도 밭에 제초제는 쳐야하는 노인들만 즐비한 시골, 빈집이 늘어가도 들어오는 젊은 세대가 없는 시골, 그 곳에 아비 어미가 있다. 있어도 어쩌지 못하고 도시에 존재하는 현실, 그렇기에 그래도 그 곳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레는 현실, 그 솔직한 고백이 이 시 속에는 있다.
3_김남극_「발」_『시안』
링거에 섞인 몰핀의 양으로
남은 시간을 아는 아버지
표백제 냄새만 남은 이불 밑으로
발이 쑥 나왔다
만져본다
싸늘하다
탱탱하게 부었다
엄지로 꾹 눌러본다
자국이 낙인으로 남았다
누구나 걸어다녔던 시절을 살아왔다 구절리에서 여량까지 늑골까지 차는 눈을 차며 걷기도 했고 수하에서 왕산 대기리까지 철쭉꽃 빛깔로 따라오는 처자를 데리고 걷기도 했고 번천에서 하장까지 조팝나무꽃 진 길로 땡볕에 밥이 그리운 처자식을 데리고 걷기도 했고 진부에서 나전까지 벼랑에 단풍처럼 꿈적거리고 타오르는 것들 달래고 쥐어박으며 동면을 준비하러 걷기도 했다
길의 흔적은 발바닥 두께로만 남아
목욕물에 불어 편마암처럼 일어나던 뒤꿈치가
조용하다
맬갛다
핏줄도 사그라들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로 가기 전 쌓인 것 모두 돌려주려는지
뒤꿈치가 팽팽하다
힘을 주어 주무른다
탱탱하다
젊은 날 꿈처럼 탱탱해져 저 혼자
산골 집으로 돌아갈 꿈을 꾸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의 죽음이건 간에) 사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숭고하며 그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로 고귀하게 여겨진다. 사실 어떤 사람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했을수록 역으로 그 죽음은 장엄하다.
이 시를 보면 우리 동네에서 돌아가신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난다. 동네 사람들의 문병이야 요식행위로, 그야말로 호스를 빼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차 들른 것이었지만 그 할머니의 손은 참 찼다. 또 손등은 왜 그렇게 맨질거리면서 빛나던지, 그리고 살은 탱탱볼처럼 탄력이 있던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이 시는 아버지의 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버지가 걸었던 지명을 구체적으로 추억하고 있다. 계절마다 다 달랐던 아버지의 행로를 회억하고 있다. 내겐 아버지의 발에 대한 추억으로 아버지 자체보다는 (본격적인 소장수도 아니었는데) 겨울철에 소발바닥에 짚신을 신겨 먼 장으로 원행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죽음은 그에 이르는 과정이 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어 죽음이겠지만(확인할 수 없기에 더욱더), ‘목욕물에 불어 편마암처럼 일어나던 뒤꿈치가/조용하’고 ‘맬갛’게 되는 것도 시간이 주는 통과제의의 한 측면이지 싶다. 시간이 가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아버지의 발은 현재적이고 발걸음은 과거적이다. 현재를 통한 과거를 되돌아봄, 그것이 이 시다. 내 생(발)이 쓸쓸해야, 내 나이 때 내 아비의 쓸쓸함과 대근함과 고민이 잡힌다. 그런 연민이 있어야 아비의 발도 좀 진지하게 주무를 수 있지 싶다.
4_장태숙_「주차장에서」_『창조문학』
진공청소기처럼 훅 빨려 들어간다
위험한 삶들이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
원시와 문명이 합체 된 내가 흡입된다
신전의 기둥처럼 곳곳이 우뚝 선 두툼한 방패 벽 뒤
들소 길들이듯 질서정연하게 나를 주차시키고
갑옷을 벗은 내가 나를 돌아본다
수백 개의 눈동자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는
선사시대 벽화처럼 크고 작은 문자들과 화살표
그 길을 따라 걷는 열쇠꾸러미들
동굴 밖으로 통하는 모퉁이에서 신호를 쏘아 올리듯
짧은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 곳에 나를 두고 나온다
두고 온 나와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
안전은 그곳에서만 유효하다
환풍 되지 못하고 눅눅한 곰팡내 번져 가는
지하 단칸방 같은 따뜻한 집
세상의 비수에 상한 몸 추스르며
또 다른 사냥감 찾아 발진을 시도 할
뭐든지 일상이 되면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어쩌다 겪는 일은 자못 충격적일 수 있다.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너무 알면 시가 안 된다는 말은 여기 들어맞는 말일 수 있겠다. 내겐 백화점 지하 주차장 주차 경험이 이 시의 울림과 호흡이 들어맞는다.
이 시는 대조되는 것이 많다. (물론 시인이 대조한 내용을 대차대조표처럼 가져다 붙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이 부질없을 수 있지만) 대조된 것을 대비해 보는 것은 좀 흥미로운 일이다. ‘동굴/바깥세상, 원시/문명, 문자/신호, 두고 온 나/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가 서로 대조된다. 화자가 있는 공간이 원시시대로 설정되어서 원시적 상황이 다분해서 그렇지 대립은 비교적 분명하다. 여기서 화자는 ‘원시와 문명이 합체된 나’이다. 그런 나이기에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에 ‘나를 두고’, 즉 ‘두고 온 나’를 두고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왜냐하면 ‘안전은 그곳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매력은 ‘진공청소기처럼 훅 빨려 들어간다’는 첫구절부터 시작된다. 정말 시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서는 (한 층을 내려가면 만차라고 자꾸 내려가라는 안내원의 손짓을 받을 때의 어떤 두려움) 겨우 겨우 주차를 시키고 차가 주차된 곳의 영문 표지와 숫자를 차마 적지는 못하고 (그래서 나중에 더 헤맨 적 많다) 잠금 장치 신호를 쏜다. ‘경계의 눈빛’을 느끼기에 외려 안심되기도 한다. 상승의 입구를 향해 급히 가면서 현재적인, 혹은 다시올 미래적인 어떤 두려움이 잊혀진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가 완성된다.
주차장은 ‘위험한 삶들이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이지만 잠시 차가 머무르는 곳이요, ‘지하 단칸방 같은 따뜻한 집’이지만 잠시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따라서 ‘세상의 비수에 상한 몸 추스르는’ 잠시 잠깐의 쉼터가 된다. 아니다, 여기가 쉼터가 아니라 바깥세상이 전쟁터이다, 서로가 사냥감이 되는.
5_구순희_「오줌 누고 싶다」_『시작』
싱겁게 흘러가는 물 보면
내가 눈 오줌으로 세상 간맞추고 싶다
흐르는 시냇물 보면 졸졸졸
시냇물같이 흐르는 나는
계곡물 보면 콸콸콸 함께 흘러가며
물만 보면 목마르거나
마시고 싶다거나
당장 뛰어들어 목욕하고 싶지만
받아들이기보다 내보내는 게 먼저다
비워야 채워진다
그런 생각 대신 그냥 시원하게 내갈기고 싶다
첫눈에 반한 남자 앞에서도
가장 큰 바다를 향해
푸른 오줌 실컷 누고 싶다
방금 눈 오줌 또 누고 싶다.
계간 시평을 쓰다보면, 조금 맥 빠질 때가 있다. 월간 잡지에서 월평이나 격월간평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계간평이 시의 어떤 흐름을 진단하는 본격평이 되기라도 한다면야 더 바랄나위 없지만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시 선정이 겹치더라도, 나는 내가 진심으로 좋게 본 시의 어떤 측면을 말할 뿐이라 생각한다.
이 시는 내가 여름에 낚시하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남한강과 선암계곡 줄기가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가끔 낚시를 했었다. 파라솔을 치고 준비한 릴낚시를 던져놓으면 강도 세상도 조용했다. 햇살에 도도도도 튀는 물살, 밤이면 강 건너편에 보이는 불빛, 그리고 강둑으로 내려와 앉은 별무리,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상은 고요했다. 어머니가 물만 부어 끓이면 되게 만들어준 매운탕을 먹으면서 소주를 마시면 몸이 물고기의 뼈처럼 칼칼해져 왔다. 휜 낚싯대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케미라이트는 물살의 흐름을 몸이 느끼게 했다. 그런 와중에 소품을 하나 썼다.
여기는 넓다. 계곡물
결정적인 순간은 빠름을 허용 않는다.
제 몸 부딪치며 온 놈과
바닥을 긁으며 온 놈은
물색이 다르다. 合水
그 지점은 느리다 빠르다
소용돌이로 감긴다.
고기가 많다는 설이 있다, 그 곳엔
― <외중방리 河口>
낚시를 하다보면 물 속으로 담배를 던지거나 오줌을 쏘지는 않게 된다. 그건 내가 도덕적인 놈이어서가 아니라 내 물을 내가 흐리는 같아서다. 구순희의 시 「오줌 누고 싶다」를 보면 최영미가 생각난다. 뭐냐하면 그의 단도직입적인 어법이 떠오른다. ‘혼자 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투, 혹은 ‘어느 놈 하고 였더라’ 같은 투 말이다. 구순희의 이 시도 그렇다. 1연으로 시가 완성되었다 보면 된다.
싱겁게 흘러가는 물 보면
내가 눈 오줌으로 세상 간맞추고 싶다
이 선언으로 이 시는 이미 완성된 시다. 중간에 이어지는 행과 연은 시의 살과 골격 같은 거지만 이 시의 미덕은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방금 눈 오줌 또 누고 싶다.
이런 의지나 상상력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시를 쓰다보면 의도하지 않았는데 얻어진 구절이나 이미지가 있을 수 있는데, 고통스런 과정 속에서 이 때가 시인으로서 행복한 지점이다. 이 구절은 시의 어떤 흐름 속에서 입질처럼 온 듯한 느낌을 나는 받는다.
6_김신용_「환상통(幻想痛)」_『시작』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 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 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 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 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않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끊임없이 통증이 베어 나오는’ 게 <환상통>이라면 나무 중에는 복숭아나무와 소나무가 환상통(아니, 실제통이겠다)을 가장 많이 앓지 싶다. 아교를 짜놓은 것처럼 나오니까 하는 말이다.
김신용의 시는 끈적끈적하다. 왜 그럴까? 시적대상과 거리도 유지하고 있고 사돈 남 말하듯 객관적인 데도 왜 그렇게 끈적거릴까? 아마도 체험의 직접성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지게꾼으로 보낸 세월, 그리고 ‘그 지게를 부수어 버’리고,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의 체험이 그에게 원형적인 환상통으로 남아있기에 새가 앉았다 떠난 나뭇가지의 자리도 예사롭지 않은 거다. 전지한 곳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한 체험은 몸에 대한 깊은 사유를 동반하고, 또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에 대한 연민을 불러온다. 그 뿐이 아니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지게에 대한 환상통을 평생 앓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 말고도 많은 환상통이 있지 싶다. 김신용에게 ‘지게환상통’이 있다면 내게는 ‘리어카환상통’이 있다. 장남을 중학교도 못 보낼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에 새벽 깡시장에서 나는 리어카를 끌었다. 무나 배추, 열무 등속을 옮겨주고 깡시장에서 깡시장으로 옮기면 150원, 깡시장에서 가게로 옮기면 300원받던 세칭 짐바리 라는 ‘리어카꾼’이었다. 공장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벌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물론 내게는 다행인 어떤 요소가 그 속에 있었기에 강한 환상통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벽 곁에 세워둔 리어카를 보면 그 시절이 지도처럼 그려진다. 세워진 리어카 바퀴를 보면 헛바퀴일망정 굴리게 된다.
창밖의 나무를 보면, 나무에 앉은 새를 보면 이 시가 꼭 떠오를 것 같다.
당신의 ‘환상통’은 무엇인가요?
7_김용택_「서시」_『시평』
어머니는 새벽을 더듬어 강을 건너가 콩밭을 매셨다 호미 끝에 닿는 자갈 뒹구는 다그락 소리들이 강을 건너와 내 잠을 깨웠다 호미끝에 긁힌 돌멩이 몸에 난 자국을 나는 떠올렸다 아프고도 선명한 그 흰 길을 따라 나는 걸을란다
이런 시를 보면,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냥 나도 걸을란다, 뭐 이 정도 생각난다.
시골에 안 오시겠다는 어머님을 모시고 시골에 와서 밤이 좀 늦으면 전화 안하는 버릇이 생겼다. 초저녁에 잠을 못 이루시면 밤내내 잠을 못 드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호미 끝에 닿는 자갈 뒹구는 다그락 소리들이 강을 건너와 내 잠을 깨웠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일찍 주무시니까, 일찍 깨는 것도 있지만 저무는 해가 야속할 정도로 일이 재미있을 때도 있는 만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게 만드는 욕심이 일 속에는 있다. 더욱이 여름의 경우엔 날 더워지기 전에 아침에 일을 좀 해놓아야 한다는 욕심도 일 속에는 있다.
단양에 이주해서 내가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린 일 중에는 소가 끄는 쟁기를 대신 끈 일이 있다. 워낙 돌이 많고, 비탈이 심해 소로 쟁기를 끌 수가 없어 사람이 대신하고 있는 것을 좀 도와드렸다. 언젠가는 고구마를 캘 때, 땅이 많이 굳어있었는데 쇠스랑으로 멀찍이 찍어서 고구마를 깨기 쉽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힘든 일은 고추와 관련된 일! 일 적당히 하시라고 해도 일이 유혹한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내 입에서는 일 좀 적당히 하시라는 말이 붙었다. 한 표시는 안 나도 안 한 표시는 나는 시골일. 내가 하는 일이야, 집안에 풀 뽑는 일 정도다.
호미가 가장 먼저 망가지는 곳은 자루다. 이상하게 자루가 망가지면 호미는 힘을 전혀 못 쓴다. 또 오래 쓰면 가지 밑둥처럼 둥그래진다. ‘호미끝에 긁힌 돌멩이 몸에 난 자국’을 나는 포크레인 삽날에 긁힌 큰 돌에서 본다. ‘호미 끝에 닿는 자갈 뒹구는 다그락 소리들’도 흙을 북돋우면서 흙과 더불어 올라온 돌을 호미 몸치로 때리면서 울리는 소리에서 듣는다. 호미에 긁히는 자갈 소리가 강 건너까지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 걸 들을 수 있는 귀는 귀하다.
8_남진우_「축제는 계속된다」_『문학사상』1월호
그날
물이 마른 강 위의 다리를 건너 사원을 향해 걸어갔을 때
긴 혼례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네
흰 면사포를 쓴 신부가 나이 든 남자의 인도에 따라
성문을 지나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네
꽃을 든 하객들이 그 뒤를 따르고
하늘엔 날렵한 제비 몇 마리 가로지르고 있었네
어디에도 신랑은 보이지 않았네
죽음으로 가득 찬 폐허의 도시
햇빛에 달구어진 돌들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혼례 행렬은 늘어만 갔네
오 내려쓴 신부의 흰 면사포 밑으로 두 줄기 피가 맺혀 있었네
대피리 소리 맞춰 춤추듯 걷는 하객들은 하늘 높이 꽃을 던져 올리고
갖가지 짐승 모양으로 장식된 다리 난간에 붙어 서서
나는 기념 사진을 찍었네
그날, 물이 마른 강 위의 다리를 건너
혼례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네
바람 한 점 없는 대기 속을 헤엄치듯 걸으며
나는 어느 덧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네
아무리 걸어도 사원은 가까워지지 않고
대피리 소리 더욱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고
내 앞의 신부는 서서히 두 손으로 면사포를 들어 올렸네
떨어져 내리는 꽃잎 아래서 환히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 전생부터 준비해 온 사랑의 말을 속삭였지만
짧은 순간 그녀를 데리고 혼례 행렬은 다시 멀어져갔네
하객들이 다 사라진 텅 빈 광장
기념 사진에 찍힌 것은 눈부신 햇살과 묵중한 돌벽뿐
검게 파인 그녀의 눈구멍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아득한 시간을 건너 혼례 행렬은 지금도 그 다리 위를 지나고
또 지나고 있네
이 시를 보면 먼저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에서 책을 막 찢어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너진 흙벽과 흙벽을 훑으면서 지나가는 바람이 떠오른다. 이 비극은 너무 건조해서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밝은 상황이 제시된 것과도 관계가 있다. 이 비극은 초콜릿처럼 굳거나 녹아흐르는 눈물과도 같은 이미지다.
혼례는 인생사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상징한다. 물론 살아보면 속았다는 생각을 다들 가지게 되지만 뭘 모르는 행복의 통과제의가 혼례다. 그러나 이 혼례는 온통 비극적이다. ‘물이 마른 강’이니 자연이 제 모습을 잃었고, ‘죽음으로 가득 찬 폐허의 도시’니 사람이 사는 곳이 그 기능을 잃었다. 자연과 도시가 폐허된 곳에서의 혼례라니, 끔찍하다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디에도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니 신부만 있는 혼례 이상의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내려쓴 신부의 흰 면사포 밑으로 두 줄기 피가 맺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전생부터 준비해 온 사랑의 말을 속삭였지만’ 다시 멀어져가는 혼례 행렬이라니, 전생부터 준비된 간절한 사랑의 고백조차 무화되는, 성립 자체가 안 되는 혼례다. 게다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검게 파인 그녀의 눈구멍에선 피가’ 현재형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아득한 시간을 건너 혼례 행렬은 지금도 그 다리 위를 지나고/또 지나고 있’는 비극의 현재형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시는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실, 전쟁과 혼례 등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전쟁의 폐허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시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는 전생적인 면과 현재적인 면도 있는 셈이다.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혼례가 주는 밝은 어떤 면과 결합되어 샌드페이퍼에 그린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찰나를 드러내는 사진에 찍힌 것조차 ‘눈부신 햇살과 묵중한 돌벽뿐’이라니 ‘검게 파인 그녀의 눈구멍에선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찍히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인가. 너무 슬퍼 슬프지 않다.
9_김영승_「슬픈 국」_『현대시』2월호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 하겠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난 요즘 1식 1찬의 음식을 자주 먹는다. 그나마 아들이 곁에 있을 땐 계란 프라이라도 해 먹었는데, 어머님이 주신 김치에 된장을 넣어끓인 찌개 한 가지로 밥을 먹는다. 물론 가끔 김을 뜯어서 먹어 2찬이 될 때도 있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국이 있는 밥을 먹으면 엄청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시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모든 국은 어쩐지/괜히 슬프다’는 이 부분 때문이다. 왜 나는 슬프다는 것에 공감을 했을까. 그건 (아래에 나오듯이) ‘냉이’나 ‘쑥’을 캐거나 뜯어보면 안다. 땅바닥에 입사귀마저 달라붙어 있는 냉이를 캐보시라. 생명 살상의 느낌이 안 드나. 돌나물로 물김치를 담궈도 마찬가지인데 돌나물은 호미로 득득 긁어도 뽑히지만 또로록 굴러가서는 다시 사는 것을 보면 무슨 생물체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채식이라고 해서 살상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죽임에 대한 소리나 저항이 덜해서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식물의 죽음이라고 해서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동네에서 돼지를 잡을 때 말이지만 (나야 잘하는 게 없으니까, 여럿이 동원되어야할 때 지렛대로 누르는 역할을 했지만) 그 괴성과 선지피, 갈랐을 때 내장에서 피어오르는 김 등을 보면 심난한 것이 사실이다. 동생들이 놀러와서 닭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당신이 기르신 것이라 잡지는 못하시고 동생들은 해놓으면 먹기나 하지 자신의 손에 피를 안 묻히려 한다. 한 번 나서서 닭을 잡아보면 날개죽지 밑의 따스한 기운이 잡힐 때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염소나 개를 도살장에 가서 잡을 때, 가스불로 지지고 처리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예술 같아서 덜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내 미안한 마음을 잡는 분께 의탁한 것 같아 죄스럽다.
먹어야 사는데, 암튼 먹어야 사니까, 슬프다 말할 수밖에 없다. 안 먹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슬픈 이유를 댈 무엇도 없어서 그래서 ‘괜히’ 슬픈 거고, ‘무조건’ 슬픈 거다. 나는 그 중에서도 미역국과 콩나물국은 이상하게 덜 슬프다. 왜 그런 건지 조금 연구를 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1식1찬도 괜찮은 식사법인 것 같다. 그래도 누가 국있는 밥을 (사)주면 맛나게 먹어야지.
10_신용목_「처연한 저녁」_『다층』
가을 감나무는 한 주먹씩 노을을 쥐고 있다 그 아래 누우면
가지 사이사이로 조각조각 비치는,
감나무에 걸터앉아 하늘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고구마 캐던 어머니가 그 자리
고구마순 깔고 앉아 땀을 식히듯
문득 일어나는 어머니 뒤에 고구마잎 몇 장 붙어가듯
서쪽으로 걸어간 하늘 그 엉덩이에 남은, 붉은 노을을
어머니 대바구니 가득 고구마 이고 돌아오는 발목에, 알 박인 어둠
어둠들이 넝쿨째 딸려와
감나무 환한 가지에 척 걸쳐지는 모양을
물 빠진 냇가 나뭇가지가 떠내려온 잡풀들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그 물에 낙엽 한 장 붉게 흘러가는 것처럼
이 시는 고구마와 감나무와 어머니가 주요 제제다. 아니다 어머니와 감나무 이야기다. 아니다 감나무는 공간이고 고구마와 어머니 이야기다. 아니다 노을도 있다, 아니다 또 있다, 아니 더 있다. 다만 이 시는 이미지가 참 좋다. 잎이 손바닥만한 감나무는 그 아래에서 햇살을 피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니 그 그늘 아래에서는 일하기에도 좋고, 그 그늘에서 하늘을 보는 것도 당연지사. 내게는 ‘문득 일어나는 어머니 뒤에 고구마잎 몇 장 붙어가’는 이 장면, 이 이미지가 일차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불러 ‘서쪽으로 걸어간 하늘 그 엉덩이에 남은, 붉은 노을을’ 불러왔다. 이미지는 고구마처럼 주렁주렁 이미지를 달고 나와 ‘어머니 대바구니 가득 고구마 이고 돌아오는 발목에, 알 박인 어둠/어둠들이 넝쿨째 딸려와’를 불러왔다. 어떤가? ‘알 박인 어둠’이라는 이미지. 내게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으니 ‘물 빠진 냇가 나뭇가지가 떠내려온 잡풀들을 휘감고 있는’ 이것이 좋다. 나무에 걸려 물 흘러가는 방향으로 ㄷ자로 굳은 잡풀을 보면 떼어주고도 싶고 수염처럼 쓰다듬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감나무 올라갈 땐 조심해야 한다. 가지가 잘 부러지는 나무니까, 그렇다치고. 여기서 화자는 어머니가 일하거나 말거나 아무 일도 안하고 아무 생각도 없고 오로지 시 생각만 하는 녀석 같아 밉다.
내가 이 작품 말고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몇 있다. 유안진의 「코의 화법(話法)」(『愛知』)이 그 중 하나다. 누구도 불러줄 수 없는 자장가를 스스로 불러주며 제 자신을 잠재운다는 인식이 좋았고 거짓된 입대신 고백성사를 한다는 깨달음이 좋았다.
최창균의 「찔레어머니」(『시인세계』)도 잘 읽었다. 거두절미, 시를 부분 인용한다.
그러나 찔레나무 속에서/생의 아픈 소리가 난다/찔레,/찔레,/그 울타리 속에서/밖을 내다보는 찔레어머니/생의 안팎이 없는 가시그늘 속에 산다/마음이 하얗게 찔려 산다’.
좋다.
거미줄과 폐지 수집하는 할머니를 다룬 황인숙의 「장마」(『시경』04년 하반기)와 단식중인 사람을 다룬 이명훈「길」(『현대시』05년 2월호)도 좋았다. 이만 줄인다.
05봄 계간시평
04 겨울
뮤즈에게 묻는 몇 가지 시의 길
^윤관영
_시란
뮤즈! (존칭 생략! 그것은 시인 뒤에 ‘님’자를 붙이는 것만큼 불경하니까.)
시와 음악의 神인 뮤즈여, 그대는 詩에 관해 다 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또 그렇다손 치더라도 시에 대해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아니면 뮤즈, 그대조차 온전하게 접근하지 못한 것이기에 그것이 詩라 칭하여 지고 있는 것인가.
시에 발 디딘 자들은 숙명적으로 시(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하기 마련.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이장욱의 시에 대한 나름의 판단은 재미있더군. 데카르트를 인용하면서 그는 ‘문학적 松果腺’을 얘기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곳이며 뇌의 여러 기관 중 유일하게 이원적 쌍을 이루지 않는 곳으로 이것을 언어와 실재에 적용해 보고 싶다고 제의한 다음, <언어와 현실, 미학과 성찰, 시와 삶, 말과 사물의 ‘송과선’을 발견해내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했지. 시의 어떤 측면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싸아하더군.
뮤즈!
아래 시는 어떤가. 시로 가는 길이 그 중에 있나. 지름길이야 없겠지만 시의 피맛이라도 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피맛_하도 허공에 헛칼질을 한 것만 같아서 내 그런다오.)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부짖어 봐야지/내 속에 비명을 꺼내 소리쳐 봐야지/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 봐야지/바람에 몸을 길들여 봐야지/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 봐야지/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 봐야지/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어느 날 문득 절필해 봐야지/죽으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사람 때문에 마음 바닥이 쩍쩍 갈라져 봐야지/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봐야지/마침내 갈 데가 없어 봐야지//그때야 일어날 내 마음의 지진(천양희,「내 마음의 지진」전문, 『문학과경계』)
보건데 어느 하나 쉬운 방법도, 길도 없네그려. 게다가 ‘마침내 갈 데가 없어 봐야’ 한다니, 그 끝은 어디일까. 그런데, 그러면 뭔가가 되기는 되는 건가. 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내 마음의 지진’으로 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지진을 일으키는 속성은 이미 내 속에 있는데, ‘~봐야지, ~봐야지’ 하는 다짐으로 시의 무엇에 이를 것인가.
뮤즈, 그대는 그 중 어떤 방법이 시로 가는 길로 보이는가. 내겐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가 끌리네만. 아무튼 천양희 시는 시의 길이나 생을 통찰하는 어떤 요소를 볼 수 있는 나름의 코드로 읽을 수는 있겠네.
(…)침 끝에 매달린 한 방울의 작은 우주/작은 우주의 둥근 멈칫거림/그런 것이다, 자연이 쓰는 시는/감과 물방울 사이/환한 그늘 둥글게 말아 올린 멈칫거림이다(_배한봉,「둥근 멈칫거림」부분, 『작가세계』)
‘자연이 쓰는 시’라는 토가 달리지만 ‘시는/감과 물방울 사이/환한 그늘 둥글게 말아 올린 멈칫거림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뮤즈. 내겐 ‘멈칫거림’이란 말이 끌리네만 좀 평이한가.
(…) 찰나 속의 하염없음
예초기가 지나간 풀밭 위에 바람 냄새, 애벌 깎은 나무의 속껍질 냄새, 놋식기의 엷은 쇠비린내, 감기 끝에 돋아난 생비린내, 갓 버무린 겉절이 냄새 같은
사람의 냄새
어둑살 내린 직지사 대웅전, 찢어진 파초그늘에서 훔쳐들은 젊은 스님네의 염불소리도 저 부근에 있었다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특이한 슬픔의 질감이 거기 있었다 손끝으로 쓸어본 그것의 표면에는 흑점 같은, 어혈 같은
목탁소리 물소리에도 풀리지 못한 단단한 기포가 남아 있었다
쉬이 물크러지지 않을 열망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가는 저이들의, 몸이 고요해지고서야 끝내 닿을 수 있다는 그곳은, 어디
_류인서,「표정」부분, 『내일을여는작가』
뮤즈!
구도와 시의 길은 유사한가? ‘냄새, 냄새, 냄새, 비린내, 슬픔의 질감, 흑점 같은, 어혈 같은’ 이 말들은 왜 울리는가? '찰나 속의 하염없음’ 때문만도 아닌데. 아무려나, ‘쉬이 물크러지지 않을 열망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가는 저이들의, 몸이 고요해지고서야 끝내 닿을 수 있다는 그곳은, 어디’인지 내 모르겠으나 시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한데. 뮤즈여! 묻노니, 시는 쉬이 물크러지지 않는 것인가. 시는 열망의 그림자를 앞세우는 자신에 대한 회의를 전제해야 하는가. 몸이 고요해지면 몸의 내부로 스미는 것이 시인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그러한 집요한 추궁,/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가차없는 집중력이 숨겨져 있다(_엄원태,「갯우렁」부분, 『창작과비평』)
뮤즈! 부드러운 빨판으로 드릴로 뚫은 것 같은 구멍을 내는 집중도 시로 가는 한 길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집요함(뜨거운 궁구라 지칭되어지는)도 시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굳은 주관적 독선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용서가 되는 것인가. 당하는 조개는 무슨 죄인가.
(…)비자목은 숲에서 마신 푸르고 어린 숨을 한없이 뿜어 내 흠집을 아주 지워버린다 해요 바둑알 한 번 놓을 때마다 물렁하게 자국이 남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단단해 지지요 아주 오래 가슴에 맺힌 것 풀리지 않는 이들 거기 마주 앉아보셔요 응어리들 그 단단한 이빨로 탄력있는 정신을 한 점 물어 뜯어보셔요(_나금숙,「목질사이로 난 길」부분, 『창조문학』)
제가 산 생의 값으로 세상에 소용이 되어 흠집을 받아들이고 지워버리는 탄력의 비자목, 그 모습을 가운데 두고 그 목질 사이에 마주 앉아 탄력 있는 정신을 한 점 물어뜯으면 시의 길이 좀 보이려나, 뮤즈! 조화, 화합, 완충 - 이런 충돌 속에서 결을 찾으면 시의 길이 열리려나.
_성찰
천양희가 시 「내 마음의 지진」에서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부짖어 봐야지/내 속에 비명을 꺼내 소리쳐 봐야지’한 바 있듯이 역시 시로 가는 길에는 스스로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전제 되어야 하지 않나 싶군, 뮤즈. 물론 인간이라는 것이 아래 시에서 보듯이 아파 보야야 보다 인간다워지고 또 그래야 아침의 사람 냄새와 저녁의 사람 냄새를 구별할 줄도 알게 되는 것 같네만, 아무려나 여기선 아픈 아내를 통한 되돌아봄이네.
내가 병실에 들어서면
야윈 아내가
(…)
내 몸에 듬뿍 묻혀 들여 온
세상 그렇게들 살아가는 사람냄새를
우선, 한 아름 가득
받아서 내리고는
세상의 냄새가
아침이었을 때와 저녁이었을 때가
많이 다르다고 하면서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을
자분자분 얘기 하다가,
_신종석,「창 밖에 궁금하다고 하여서」부분, 『다층』
가시에/얼굴이 비쳐 보일 때가 있다//핏방울 돋아날 듯 날카롭게 솟아있는 가시가/거울처럼 얼굴을 비쳐보여줄 때가 있다//내가 가시가 되었을 때다/내가 가시가 되어 가시를 바라볼 때이다
_김신용, 「가시1」부분, 『시와사람』
옛집 문을 (…) //이제 문은 아무것도 가두지 못합니다 숭숭 뚫린 문살로 TV곁에 놓이거나 화초 뒤에서 문이 아닌 문으로 서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지 않습니다//나 이미 문 밖에 있습니다
_홍승주,「門 밖에 서다」부분, 『창조문학』
고양이 한 마리가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다.
쓰레기 봉투 밑둥이 찢겨져 있다
며칠간 꾹꾹 눌러두었던 삶의 창자가 흘러나온다
고양이는 나를 흘끗 보다가, 다시,
내 삶의 썩은 내장들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내 몸을 헤집어 놓은 것 같다
버려진, 썩은, 악취나는 내 삶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_강수,「경계에 살다」부분, 『현대시학 10월호』
뮤즈, 어떠신가? 위에 시 세 편이 보여주는 성찰의 방식이. 김신용은 진검 승부처럼 절대적인 기준점=가시로 보편의 편린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홍승주는 옛집 문을 통하여 추억을 반추하고 또 그 것이 시효가 지났음과 자신이 이미 문 밖에 서 있음을 인식하는 자세가 고요하지 않은가. 강수는 자신이 버린 그래서 가장 자기다울 수 있는 쓰레기가, 고양이가 파헤친 치부를 긍정하면서 경계에 선 자신을 추스르지 않는가. 뮤즈, 그대 앞에서 꼭 바둑의 구 정석을 보여주고 아는 척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역시 시의 한 축은 성찰이 아닌가 싶구먼.
은현리에 살면서 들었다. 황금들판에서 일하는 소는 움머- 하며 해설피 울지만 감옥 같은 창고에 갇혀 사육되는 소는 엉-엉-휴대폰 진동소리처럼 기계음으로 우는 것을. 처음에는 기계의 진동음으로 알았다가 무슨 소리가 뼈마디에 스며들도록 아픈가 싶어 찾아갔다. 신문지 크기 만한 창문 하나 가지고 컴컴한 어둠 속에 징역사는 소를 만났다. 그 순한 눈망울 가득 타오르는 사람의 원죄를 보고 말았다. 그 소리 가끔 전화기로도 듣는다. 도시 사는 친구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하는 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며 대책 없이 우는 밤, 그 울음 뒤로 도시가 엉-엉- 휴대폰 진동 기계음으로 갇힌 소처럼 따라 우는 소리를.
_정일근,「갇힌 소가 우는데」전문, 『현대시 10월호』
뮤즈도 고기를 먹남? 인간들이 소나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뮤즈도 고기를 먹을 것도 같고 아니면 그것을 태워서 향기로 올렸으니 아니 먹을 것도 같네만, 암튼 죄는 인간의 죄지. ‘신문지 크기 만한 창문 하나 가지고 컴컴한 어둠 속에 징역사는 소’로 키워서 고기를 만드는 죄. 그건 고기지 이미 소가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차에 소를 태우려는 걸 본 적 있는데, 소가 걸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물풍선처럼 걷는 것을 보고는 참 마음이 아픈 적이 있었네그려. 그 울음을 사람이 운다는 데야. 휴대폰 진동음 같은 울음을 말이야, 뮤즈! 그대도 그런 울음 아나? 울어 봤나(하기사 신이 울리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래 이경림의 시는 세대 간의 단절, 그 소통 부재에 대해 말하고 있지. 그 말하는 방식이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사실이어서 찡한 울림이 오더군.
살아 계실 때 엄마는 이따금 전화하셔서는
-나야…
하시곤 한참 뜸들이다가 이 쪽에서 별 말이 없으면
-바쁘… 구나… 밥… 먹… 었… 니?
물으셨다 띄엄띄엄,
낮게,
무슨 큰 실례라도 한 사람처럼……
-무슨 일예요?
(왜 나는 그 때 그렇게 퉁명스러웠을까?)
-아냐……, 그냥…
싱겁게,
그저 밥 얘기만 얼버무리다가 끊은 그 전화……
오늘, 내가 한다. 태평양 건너 딸에게
-나야… 밥…… 먹었니… 밥 잘 챙겨……
밥… 밥… 밥…
하다가 그만 목이 메여
가만히 있는데 딸애는
-어! 어! 어!
-엄마, 나 지금 바빠, 나중에……
일방적으로 전화… 끊긴다. 전화선같이 가느다란 것이
태평양의 이쪽 저쪽을 붙잡고 위태롭게 흔들리다
툭, 끊어진다.
나, 문득 ‘밥’의 ㅂ속에 오도마니 갇혀
창밖을 본다
_이경림,「나야……」부분, 『내일을여는작가』
뮤즈, 세대는 그렇게 입장 차이가 나서 세대인가 봐.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여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세대 차이가 아닐까 싶어. 내가 자식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퉁명스러움이 가시고 바쁜 게 없어질 것 같지가 않거든. (내가 아직은 젊은 걸까. 밥에는 왜 ‘ㅂ'이 두 개일까.)
양전형이 시 ‘가분수’에서 아내가 놀리는 모습을 얘기하면서 그래도 가분수는 남는 것이 많다고 자위했지만 아무리 배가 나오고 과칼로리에 비만이라 하여도 ‘식사는?’ 하는 인사가 내겐 정다워. 뮤즈, 그대는 밥 먹었나? 신이라 안 먹어도 되는가. 난 내 친구가 ‘밥 한 끼 같이 합시다!’ 하는 소리가 가장 기억에 남고 또 기분도 좋고 정다워 좋더이다만.
_적막
뮤즈, 그대도 ‘적막’ 속에 있어본 적 있는감? 내가 이처럼 무례하게 묻는 것은 그대는 神이니까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것은 아닌가 해서야. 인간들이 제사와 축제로 그대를 들쑤시고, 또 신들도 시와 음악이 없어서는 아니되는 존재들이니, 맘 편할 날이 아니라 ‘적막’속에 있을 날이 있을까 싶거든.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그대도 ‘避靜’을 활용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구려.
암튼 이 ‘적막’이라는 것은 시로 가는 길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 같수. 일단 귀기울이기 전에 자신을 조용한 곳에 두는 것이 먼저니, 조용한 곳에 몸을 두어야 제 몸에서 나는 소리든, 주변에서 나는 소리든 내면에서 나는 소리든 들리지 않겠수.
받침 없이 된소리만으로 울어보았는가
울음이 사무쳐 뒹굴어보았는가
이사 온 집 첫날 밤
끄으으 끄으으으, 개가 운다
(…)
떨림의 깊이, 떨림의 방향 뒤밟아보면
마을 사람 누군가 틀림없이
된소리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_이강산,「된소리로 울다」부분, 『愛 知』
천양희가 「내 마음의 지진」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 울부짖어 봐야지’ 한 바 있지만 이 시의 시인은 ‘받침없이 된소리로 울어본’ 사림이유. 울어본 적이 있냐는 되물음은 그래서 가능하기도 하고, ‘떨림의 방향 뒤밟아보면/누군가 틀림없이/된소리로 뒹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그래서 나오는 게지. 나도 그런 울음을 운 적이 있는데 그건 그런 상황이 되면 저절로 나오우. 시도 그렇지만, 뮤즈! 내가 지독하게 울어보아야, 남의 울음도 유추해서 들을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아이러니유. 이건 고요 이전 이야기지만 고요를 지나지 않아서는 또 성립이 안 되는 얘기고. 아니 그건가. 뮤즈! (흠~)
당신은 오도카니 혼자 누워 당신의 방귀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빈 벽에 팅팅 부딪치다가 잔뜩 커져 돌아 온 당신의 방귀소리를 문득 만나 본 적 있는가? 한밤에 쓸쓸한 그 방귀소리가 괜스레 눈물겨워 그 방귀소리 꼭 껴안아본 적 있는가? 그 동안 내가 되지 못하게 너무 커져 있었다. 적막은 내가 작아진다는 말이다. 비로소 다른 것들이 제 모습으로 커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세상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당신은 오도카니 혼자 누워 당신의 방귀소리를 문득 절절히 만나본 적이 있는가?
_김승기,「적막3」전문, 『시와사상』
이 시를 보자니 ‘방귀와 놀다’ 뭐 이런 생각이 먼저 나우. ‘적막은 내가 작아진다는 말이다. 비로소 다른 것들이 제 모습으로 커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세상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하는 이 말은, 방귀를 가지고 논 끝에 얻은 시인 나름의 해석이지만 ‘오도카니 혼자 누운’ 공간의 지속, 적막한 상황의 지속이 전제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결론이유. 그 상태에서 접하게 된 방귀는 그러니까, ‘잔뜩 커져 돌아오기도’하고 ‘쓸쓸해’ ‘눈물겹기’도 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방귀. 외로움을 이기는 방식이 내는 길에 만난 방귀는 ‘내가 되지 못하게 커져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해주고 ‘내가 작아져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해주었고. ‘당신의 방귀소리를 문득 절절히 만나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은 끝내 자신에 대한 되물음이겠지만 아이들의 소란과 공간의 적막을 나누는 아내가 있어서는 불가능한 방귀놀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또한 적막의 이면이고.
벚나무 둥치에 허물만 남은 매미가 있다
소리란 소리 여름 들녘으로 죄다 쏟아버린
침묵이 전부인 매미의 허물
매미의 결가부좌는 나무에 매달린 자세다
일순간에 꽃을 버린 벚나무 가지에
낮달이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매달리는 게 허물만은 아닌 모양이다
_이창수,「허물」전문, 『시작』
‘매달리는 게 허물만은 아닌 모양이’라면 무엇이 달려있다는 말일까, 낮달(?). 뮤즈, 내겐 ‘적막’만 같수. ‘생의 총량은 동일하다’는데, 울 수 있는 모든 울음을 짧은 시일 내에 다 운 다음의 육체라는 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완벽한 비움이 아닐지 싶구려. 완벽하게 비운 모습은 이제 벚나무와 하나가 되기에 허물을 보아도 손이 잘 안 나갑디다만, ‘虛物 ’은 아니지 싶수. 사리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뮤즈의 생각은 어떻수?
적막은 말이유, 인간 세상으로 말하자면 밤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는 것 같수. 인간이 활동을 중지하면 일단은 저의 움직임으로 인한 귀 기울임을 방해하는 요소는 제거되는 셈이우. ‘그리하여, 새벽 4시’까지 밤잠 안 자고 고투하는 시인의 모습, 그대에겐 조금 징글징글한 게 시인이겠지만 그 시간에 자신을 내밀하게 뒤돌아보는 떨림을 보지 못하고서야 누구라 하여 시인이라 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천양희의 시 「내 마음의 지진」에서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 봐야지’가 들어맞는 대목이우.
누가
신 새벽의 내 은밀한 창을 두드리는가
열여덟 적 숲 속으로 손목을 끌어
속살거리는 풀잎의 언어와
미세한 떨림,
내밀한 내음으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가
그리하여, 새벽 4시
벽돌과 벽돌들 사이
하나의 풀잎 앞에 서 버린 것
반짝이는 눈빛을 보아 버린 것, 그 여린 떨림을 만져 버린 것
그리고
헤프게 미소를 날려 버린 것
_한영숙,「그럴 테지」부분, 『삶글』
_사랑
뮤즈!
왜 시인들은 실패한 사랑, 아니면 슬픈 사랑, 아니면 비극적인 사랑만 노래하는지 아시남? 이상하게도 행복한 사랑, 완성된 사랑(그런 말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시가 되지 않을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주는 어떤 결핍이 불러오는 갈증, 그런 어떤 시적 요소가 지속적으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여 불러일으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회한 이런 것들이 사랑시에 육체성을 입히지 않는가 하는데, 뮤즈의 생각은 어떻수.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 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맥주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_안현미,「음악처럼, 비처럼」부분, 『시인세계』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탄 사람’이라면 생이 다하는 내내 그리워할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거고. 이제 한 슬픔이 가셔 자신의 슬픔도, 비극적인 사랑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경이 되었고. 그렇기에 남들이 시작하는 어설픈,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아’는 지경에 이르렇는데 그렇다하더라도 내 사랑의 비극성은 현재형으로 진행 중에 있다는 거고. 다만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다’고 추억만 하고 있을 뿐이고. 근데, 뮤즈. 뭐가 이렇게 칼칼하게 슬픈 것이냐.
오줌 냄새 같은 비가 내렸네,
눈물보다
피보다
아픈 사랑보다
오줌 냄새 같은 비를 맞으며
너를 삼킨 나를 오물처럼 토해내네
헝클어진 내 영혼,
내가 삼킨 네 눈알 하나
더러운 비를 맞으며
오물처럼
더러운 오물처럼
욕지기와 피가 섞인 눈물을 토했네
최류탄 같은 네 영혼,
한 남자를 사랑했네,
우울한 한 시대처럼 우울한
더러운 비처럼
더럽게 더럽게
_조하혜,「제국적 사랑」전문, 『시작』
천양희가 「내 마음의 지진」에서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한 것은 사랑의 행위적인 측면을 말한 것으로 본다면 관능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 되지. 그 역시 사랑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랑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고. 또한 같은 시에서 ‘사람 때문에 마음 바닥이 쩍쩍 갈라져 봐야지’한 부분은 그 대상으로 인한 나의 상태를 말하는 셈이지. 그러니까, 사랑의 가장 절망적인 상태까지 가 보아야 한다는 말 같구려. 조하혜의 시 「제국적 사랑」도 사랑을 잃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수. 여북하면 ‘오줌 같은 비’가 내리고, ‘오줌 같은 비를 맞으며/너를 삼킨 나를 토해내’는가. 뮤즈, 내겐 ‘최류탄 같은 네 영혼’이란 말이 무척이나 울린다우. 아무리 분노를 하고 증오가 앞서더라도 최류탄을 맞으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던, 우울한 시대의 기억이 내겐 있거든. ‘욕지기와 피가 섞인 눈물을 토했다’고 하는데도 감정의 과잉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절박성이 주는 낮은 울음이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구려, 뮤즈.
<유리문을 완전히 연 다음
서랍을 빼어 보세요>
잠자는 공주가 거기 있다
잠이라는 핀에 꽂혀
뺨 위에 보송한 솜털까지 그대로 정지된 채.
한 번만 그 솜털을 쓸어 보고 싶다
정복당하던 순간의 절정이
엠크레졸과 나프탈린에 말라 있다
반항으로 파르르 떨었을 날갯짓도 꽂혀있다
남산 무르녹는 벚꽃향이 창문을 넘어 올 때는,
손 내밀 수도
뒤척일 수도 없는 세월이 꿈틀 요동한다
한숨 쉬는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운 저 나비,
내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나도 멈춰 설 수만 있다면
만지면 재가 되기 직전에
내 사랑 저렇게 끝낼 수만 있다면!
_나금숙,「그 곳에 가면 나비가 있다」전문, 『창조문학』
약간의 과장도 느껴지고, 어떤 포즈도 느껴지지만 내게는 뭔가 괜찮다 라는 필이 오우, 뮤즈. 오르가슴 그 절정의 순간의 모습과 교수형을 당해 죽어가는 순간의 모습이 일치한다던데 생의 극점이 죽음으로 멈춰선 모습이라면 그 자체로 감동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나도 멈춰 설 수만 있다면/만지면 재가 되기 직전에/내 사랑 저렇게 끝낼 수만 있다면!’ 이라는 염원은 화자의 내적인 절박성이 아니라는 면에서 약간의 포즈가 보인다고 했지만 그것은 장엄한 나비의 모습-생의 극점에서 죽음으로 멈춰선-이 불러오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우.
‘한숨 쉬는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운 저 나비,’를 포착하는 눈이기에 시인의 눈이겠지만 나는 외면하게 되던데, 뮤즈. 어떤 잔인한 들여다봄이 시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인가. 자살하기에도 늦은 나이라는 동감되는 시니컬한 자조가 ‘저렇게 끝낼 수만 있다면’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사실은 추하게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네그려.
_죽음, 죽임
최정례가 시 「西天으로1」에서 ‘깊은 밤 검은 내 불 밝히면/붕어들 눈 멀거니 뜨고 가만 있었다’고 ‘밑 빠진 양철통 갖다대도/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가만 있었다’고 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한 바 있었우. 박형준의 시에도 형제의 죽음(그것도 시집 못 간 누님)이 주는 먹먹함이 있구려. ‘가시지 않는 이 시장기’는 무조건적인 그리움의 다른 말(이미지)이겠지만 이건 또 가실 수 없는 시장기이기도 하구.
뮤즈, 시가 ‘죽음’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죽음은 천양희의 시 「내 마음의 지진」에 따르면 ‘내 속에 비명을 꺼내 소리쳐 봐야지’에 해당할 것 같구려. 내 자체는 아니겠지만 친족의 죽음은 ‘내 속의 비명’은 될 것 같거든.
가을 저녁
시골 집 처마에
먹빛이 남아 있다.
창호지에 어른대는 나뭇가지에
물보라가 스민다.
시집 못 간 누님의 제삿날.
저물녘 짧은 꿈속에서
몇 만리 장천(長天)을 날아온 새의 머리
목구멍에 하염없이 밀어넣다 깨어나니.
생시인 듯
가시지 않는 이 시장기
온몸에 먹구렁이 같은 잔물결이 퍼져나간다.
_박형준,「이 시장기」부분, 『시평』
박형준의 시는 누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먹빛’, ‘창호지’, ‘물보라’, ‘시장기’, ‘먹구렁이’ 같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이 시를 보면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네, 뮤즈. 왜 있잖는가, 울면서 뭔가를 먹을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 자꾸 떠오르는구먼.
‘죽음’이 좀 느닷없어서 무기력하게 받아들임(받아들여만 해서)으로 인해 대책없는 안타까움이나 회억을 불러일으킨다면 ‘죽임’은 주체의 판단과 실행이 전제된다는 면에서 죄책감과 더불어 아픔을 불러오지.
‘땀구멍 가득 소름이 돋고 벌목된 몸 숲에서/날아오르는 검은 새떼, 깃털 떨어진 자리마다/핏방울 고인 살비듬이 아프’게 오기도 하고. 생명을 거세시키는 데서 오는, 모진 결단이 주는 모진 아픔. ‘붉은 다리 아래 따듯한 물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냐는 물음은 끝내 자신에게로 오는 물음이지만 뮤즈, 내게는 ‘붉은 다리 아래 따듯한 물’이라는 이 이미지가 참 좋구려. 3인칭화 된 2연과 그래서 변화된 어조도 새롭고…….
수술 받을 부위를 간호사가 미리 면도해 놓고 있다
균에 감염되면 큰일이라며 솜털 하나까지도 하얗게 밀어놓는다
땀구멍 가득 소름이 돋고 벌목된 몸 숲에서
날아오르는 검은 새떼, 깃털 떨어진 자리마다
핏방울 고인 살비듬이 아프다
(그 여자의 몸 속에 물이 차올라 솟구치다가
강으로 섞여드네 강에 사는 물고기 그 여자의
양수에서 자라는 눈먼 자식들이네
세상의 빛 보지 못한 채 어둠의 자궁 속에서
긁혀 나간 꽃 피지 못한 살덩이의 무게 기억하는지?
붉은 다리 아래 따듯한 물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나
물병자리 지나 물고기자리로 숨어든 물길 길 잃고 헤매는데
잡히지 않는 기억의 통로를 따라 화들짝, 날아오르는
새가 된 수만 마리 물고기의 환영 뿌리치며
두 손에 쥐어진 건 빈 허공 한줌뿐이네)
수술대 위에 누워 쳐다 본다 천정은 철지난 바다 같았다
혈관을 타고 마취주사액이 꽂힐 때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절대 절명의 순간 시간의 바퀴 헛돌았다
_최춘희,「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전문, 『시와사상』
_추억
뮤즈, 그대에게도 추억이 있남? 생각커니 그대에게는 추억이 없을 것도 같구먼. 뭔가 주체에게 변화가 있어야 추억도 질감이 있게 마련인데 그대는 신이고 또 사멸하는 존재가 아니니, 뭐 새로운 것이나 안타까운 것이 있겠나. 아쉬움도 있어야 추억이 있고 안타까움도 있어야 추억이 있고, 죄책감도 있어야 추억이 있을 터인데 그대는 늘 현재적이고 과거와 미래를 들락날락하니 추억이 없을 것만 같구먼. 게다가 지워버릴 능력도 있으니, 신도 크게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고.
추억의 특징은 뭔가 큰 것이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수. 윤제림과 박상경의 시가 그 것을 보여주고 있지. 풍선껌 하나 내려놓으시던 외할머니의 손이 추억이 되고,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물국수 한 그릇이 추억이 되니 말이우. 내겐 할아버지는 추억이 잘 안 되는 존재라는 면에서 좀 비극적인 것 같수. 나의 말년도 그래서 쓸쓸할 것도 같기도 하고.
슬며시, 내 호주머니 속에
풍선껌 하나 내려놓으시던
외할머니의 손.
오늘은 저 구름 너머 상점에서
무엇을 감추고 계실까 몰라, 주인 몰래
슬며시.
_윤제림,「외할머니는 슬며시」부분, 『시안』
어두운 저녁, 세상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죄다 잠들어갈 무렵이면
소리치고 싶은 나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고 어느새 허기가 밀려옵니다
밀려오는 허기 속으로 나는 곤한 잠을 청하고
꿈속에서 큰 소리로 할매를 부릅니다
먼 길
익을 대로 익은 할매목소리는 물국수 한 그릇 내오는데요
도시서 큰 나는 이 백발의 순정을 후루룩 삼키기만 할 뿐
아무 맛도 없이 훅 불어나는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어나서 꽉 채우는 생
그 양감이 한 생애를 채운다는 것이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인데요
물국수의 눈으로 할매를 들여다보면
할매의 한 생도 국수가락처럼 갈라져
이제는 아무 맛도 없어져 버린 것이지만
메마를 대로 메마른 손주의 공복 사이로
미끄러지듯 불어나서
버즘 같은 이름을 적셔놓는다는 것이
햇살 피어오르는 한낮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물국수 한 그릇,
백발 사이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몸이
핏발 선 눈을 감기고 엉키듯 내 몸을 어루만져
어두운 저녁의 허기를 하얗게 채우는 줄도 모르고
물국수 볼 때마다 나는
물국수는 싫다 물국수는 싫다
경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_박상경,「저녁의 물국수」전문, 『삶글』
뮤즈, 남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잡지에 실린 시지만 이 시는 참 좋구려. ‘익을 대로 익은 할매목소리’도 좋고 ‘이 백발의 순정을 후루룩 삼키기만 할 뿐’이라는 대목도 좋고 ‘아무 맛도 없이 훅 불어나는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불어나서 꽉 채우는 생’이라는 인식도 좋고 ‘그 양감이 한 생애를 채운다’ 이미지도 좋수. 내게는 특히 ‘물국수의 눈으로 할매를 들여다보면’ 이라는 이 부분이 특히 와닿는구려. 물국수의 눈에 비친 ‘할매의 한 생도 국수가락처럼 갈라져/이제는 아무 맛도 없어져 버린 것이’라는 인식에 다다르고 ‘메마를 대로 메마른 손주의 공복 사이로’/미끄러지듯 불어나서/버즘 같은 이름을 적셔놓는다는‘ 사실까지 확장되는 것이 참 좋구려만 뮤즈, 그대가 보기엔 어떻수?
_견딤
천양희의 「내 마음의 지진」이 말한 대로라면 견딤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 봐야지/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 봐야지/죽으라고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버티는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 뮤즈! 견딘다는 것은 말 그 자체에 피동성이 있어서 상황을 이어간다는 소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전투적인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버팀도 주체적인 견딤이 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견딘다는 것은 적막이 소란을 이기는 것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그려.
손바닥만한 하늘을 쳐다본다
오이지를 눌러 두었던 돌멩이 하나
빈 항아리 속에 드러누워
대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소리처럼 내려앉는 먼지를 먹고
차곡차곡 차오른 슬픔만 불룩하다
재개발 아파트 솟아오르는 산동네
외진 골목 좁은 마당에는 종일
진한 소금물 같은 그늘이 부어진다
오래전 갈라진 시멘트 바닥에
비명처럼 가느다란 풀이 솟는다
피지도 않고 시들어버린 하루를 싣고
마른 풀잎 같은 여자가 노점에서 돌아온다
초저녁부터 절여지듯 잠이 든 후
돌멩이 붉은 야행성의 눈을 뜬다
곧 부서질 그 집 앞에 무너져 내리는
어둠 한 귀퉁이 떠받치려고
밤새도록 품고 있는 불빛이 묵직하다
_장성혜,「그 집 앞에는 밤마다 붉은 가로등이 켜진다」전문, 『리토피아』
뮤즈! 장성혜의 시는 조금 무섭지?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견딤이라는 면에서 그런 것 같수. ‘손바닥만한 하늘’, ‘대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차오른 슬픔만 불룩하고’, ‘진한 소금물 같은 그늘’, ‘비명처럼 가느다란 풀’, ‘피지도 않고 시들어버린 하루’, ‘부서질 그 집’ 등 정말 ‘묵직’해서 모든 판단과 감정이 소금물처럼 가라앉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 같구려.
꿈틀거리는 의지로 어둠 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 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_최금진,「끝없는 길」전문, 『다층』
뮤즈,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 것이 정말 인생일까. 천양희의 시구대로 라면 지금 이 시적 상황은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부짖’는 형국인데, 왜 인생은 ‘의지로 터널을 뚫’고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어야 하는 걸까.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는 생이라면서도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고 억지 믿음이라도 가져야 하는 걸까, 뮤즈! 왜 ‘죽어라 살기 위해’라는 대전제를 제 생 앞에 세워야 하는 걸까.
_우주, 어떤 기미
뮤즈여!
신들도 시인을 좋아하나? 크게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괜히 아는 척하는 존재일 것 같아서네만. 천기누설이랄 것까지는 없겠지만 시인들은 호기심도 많고 또 어떤 현상을 자꾸 해석해내려고 하고 읽어내려고 하니까,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소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할 것 같구먼.
우주의 비밀이나 어떤 기미(낌새)를 느끼고 자꾸 느끼려고 하는 존재들이 시인이지. 이 번호에는 황인숙과 신달자가 그들이네. 황인숙은 유독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그냥 느끼기에-내가) 고양이를 자신의 촉수로 내세워, 세상을 읽는 코드로 사용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네. 어떠신가? 늘상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작태랄 수 있는 세상살이를 하는 인간들 속에서 ‘지붕을 쫘아악 펼치면/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상상하는 시인이. 그런 그에게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그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는 영적인 교감은 또 어떤가? 나에겐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환장을 하는 고양이 ‘그래서 마치 지붕들이 고양이를 낳는 듯/불쑥불쑥 고양이가 지붕 위로 솟는 것이’ 라는 인식이 생기발랄하여 좋구먼. 별 관심이 없던 고양이가 친연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마력을 이 시는 갖고 있지 않나 싶네그려.
와우우 저 지붕을 쫘아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견적을 뽑는데
은빛 천막 위에서 몸을 쭉 뻗고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 나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저 공중 공간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 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 위로 올려 보내서
광활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아드레날린 중독자인 고양이들이여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
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그래서 마치 지붕들이 고양이를 낳는 듯
불쑥불쑥 고양이가 지붕 위로 솟는 것이다
_황인숙,「지붕 위에서」부분, 『문학과사회』
천양희의 시「내 마음의 지진」으로 말한다면 아래 시는 ‘바람에 몸을 길들여 봐야’ 되는 지점이 아닌가 싶네. 그러면 바람을 말을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걱정되는 건 알아들어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앞서는 바이지만 그건 또 알아들은 후의 고민.
어디에서 왔는지
다급하게 밀어닥친 바람이
숲에서 비명을 지르고 달아났다
나무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병약한 나무 가지 몇 개 꺾이고
바람과 나무 울음이 엉겨 숲을 흔들었지만
폭풍의 이름으로 휩쓸고 간 것은
일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모르기는 부드러운
바람이 나무들 머리 쓰다듬고 지나갈 때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하긴 했다
바람도 가슴과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바람이 아직도 바람인 것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폭풍이
아직도 난폭한 짐승인 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
_신달자,「어느 폭풍의 말」전문, 『시작』
‘바람이 아직도 바람인 것은/세상을 어지럽히는 폭풍이/아직도 난폭한 짐승인 것은/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 이라면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바람이, 아니 분노한 바람(폭풍)이 좀 욕심이 많은 탓일 수도 있겠네.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는 것일테니까. 다만 알아들으려 하지조차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는 어떤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으리라 보네, 뮤즈!
_戰士
뮤즈, 난 아래 시가 마음에 드네. 한강철교를 이미지화 하기도 했지만 생활에 자동화된 몸을 발견하고 기꺼워하기가 어디 쉬운가 말일세. 마치 검투사가 싸움에 임하듯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내 온몸의 뼈가 다시 맞춰지는 것’을 인지하기가 쉽지는 않을 터인데, ‘이른바 자본주의체제로 내 온몸’이 재조정되는 것을 느끼는 존재, 조느라 인식을 못하더라도 ‘서울역이나 용산역의 계단 앞에 서면/자동으로 조정된’ 뼈가 늠름해지는 상태를 느끼는 존재 - 이래서 시인인가.
‘내 마음의 지진’이 일어나도록 깊고도 넓게 아파하고 살고 사랑하고 고민하면 시의 길이 열리고, 좀 깊어질 수나 있는지, 뮤즈. 내가 여기서 한 것은 투정에도 못 미치는 유치한 것이었네만 그 것은 다만 나의 한계, 같은 한강다리를 건너도 ‘뼈 주무르는 다리’로 인식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길도 역시 시의 길 중 하나겠지.
뮤즈! 투정조차 제대로 못한 이 졸렬을 줄이오. 그대, 나의 神이여!
‘시의 松 果腺’은 어디에 있는가?
노량진 지나 용산으로
그 한 많은 한강철교를 지나다보면
온몸이 녹작지근해진다
아니 서서히 몸이 풀린다
챠드락 챠드락 나락 베는 소리와 함께
내 온몸의 뼈가 다시 맞춰지는 것이다
고향 텃밭에서 찾은 명아주와
학교 가던 산길에서 찾았던 추억들이
다시 원경으로 사라지고
간판과 간판 사이 차와 차 사이
숨가쁘게 달려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에게 적용되는 엄격하고 차가운 경쟁
이른바 자본주의체제로 내 온몸은 재조정된다
간혹 졸면서 한강철교를 넘어도
서울역이나 용산역의 계단 앞에 서면
이미 자동으로 조정된 내 뼈는 늠름하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끝없는 경쟁 그 가련한 속도 속으로
차분하게 조정되어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낸다
_강형철,「뼈 주무르는 다리」전문, 『문학동네』
04 가을《계간시평》
도시인, 그 존재하는 몇 가지 방식
_윤관영
1. 도시인 _ 그와 나
꽃향기 싱거워 다 틀렸다
저렇게 슬금슬금 피는 꽃
꽃 아니다
저렇게 설렁설렁 부는 바람
바람 아니다
간밤의 눈이 모든 봄을 덮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최영철, 「봄 폭설」전문, 『愛知』
시적 인식이 이처럼 단호하고 명징할 수 있을까. 맞다, 아니, 그래서 시적 인식이다. 얼렁뚱땅 넘긴 시련은 더 혹독하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IMF를 이른 시일 내에 극복한다는 프로젝트 아래 진행된 무분별한(부실) 카드 발행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수 많은 신용불량자를 만들어냈고, 부실기업을 키워왔다. 그나마 수출은 되고 있다 하나 고용창출이 없고 구매력을 잃은 개개인들이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게 현실이다.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도시인, 이 말만큼 현대인의 삶을 지칭하는 말도 드물다. 농촌이라고 해서 도시인의 특성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뿐이지 그 특성의 적용에 있어서는 같다. 도시인의 특징은 생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 교환 가치의 원리가 적용되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존재해내야 한다. 밀려나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끝내 도시인, 개개인이 자신을 독려하는 말이다. 남의 탓이나, 조건 탓, 정부 탓이 아니라 끝내는 내 탓으로 돌리고 생존에 매진해야 한다. 남의 탓을 하고 있을 정도로 도시인의 삶은 호락호락한 상태가 아니다.
이자를 위하여 일기를 쓰자고 다짐한다/이자를 위하여 선인장 가시를 들여다본다/…/이자를 위하여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안전선을 툭툭 찬다/…/이자를 위하여 나무들의 이자를 생각한다/이자를 위하여 자동차의 이자 속도를 계산해본다/…/이자를 위하여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지 않는다/이자를 위하여 일기를 쓰지 못한다
―맹문재, 「이자를 위하여 일기를 쓰지 못한다」부분, 『리토피아』
여기서 ‘이자’는 도시인이기에 지불해야할 대가 같은 것이다. 몸뚱이가 발 디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불해야할 자릿세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주차비다. 물론 주거비는 사람이 내는, 그러니까 주‘인’비인 셈이다.) 〈일기를 쓰〉자는 것은 자신을 더 가혹하게 몰아붙여야 한다고 인정하는 마음가짐이고, 〈다짐한다〉는 것 또한 자신을 몰아붙이는 자기강제다. ‘선인장’ 가시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 나와 비교되는 존재로 - 생활을 견디어낸 그 모습을 대견하게 여기는 데서 오는 시선이고, 도시인은 퇴근길에 어떤 쓸쓸함이나 지친 상태로 인해 자학하듯 발끝으로 ‘안전선’을 툭툭 차본 경험이 대부분 있다. ‘이자’ 자체에 대한 생각은 이자가 불러일으킨 것이고 옷을 찾지 않는 것은 무기력한 삶을 의미한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스스로 다짐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 일기를 못 쓰는 ― 핍진이다. 동일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산문적으로 진술한 이 시가 주는 공감은 도시인의 불확실한 삶 자체가 불러온 것이다.
2-① 도시인 _ 나의 현주소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그것도 과도하게 지불해야 하는 도시인의 삶은 되다. 이런 ‘된 마음’을 이기려고 주말 여행을 떠나는 도시인도(어떤 피해의식에서), 과도하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 때문에 욕구를 접는 도시인도 그 삶이 대근하긴 마찬가지다. 〈개도 짖고 고양이도 울던 날, 유독 토끼의 벙어리 노릇에 마음이 닿는다〉(김록,「마임」, 『현대문학․6』)는 연민이야말로 바로 도시인의 이 고된 삶에서 오는 것이다.
무거운 번역서로 주둥이가 벌어진 가방이나
울러메고
밀고 밀리는 지하철에서
틀어진 옷가지나 매만지다가
지구의 끝으로 떠난 그대들 편지나 읽으며
봄이 오는
서울역 환승구에서
그립거나 그리운 얼굴들
그립지만 너무 낯설고도 익숙한
그대들을 보네
―조하혜, 「서울역」부분, 『다층』
〈무거운 번역서로 주둥이가 벌어진 가방이나/울러메〉는 전투적인 삶이면서, 동시에(여기서 지하철은 도시인에게 가장 치열한 삶의 격전장이다) 〈지구의 끝으로 떠난 그대들 편지나 읽으며〉 그리운 얼굴이나 떠올리는 수동적인 삶이 도시인인 나의 현주소다.
〈하늘을 쳐다보는 일보다/땅 바라보는 일 잦아져/내 그림자와 자주 만나〉고 〈내 그림자/밤도시 헤매는 일 줄어들고/방구석에 누울 때 많아지〉고 〈그림자도 나이를 먹는〉(양전형, 「그림자도 나이를 먹는다」부분, 『다층』)것이 도시인인 내가 삶 속에서 나를 인식한 그 결말이다.
2-② 도시인 _ 그들의 현상태
〈자, 한 잔/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그래도 한 잔〉(김사인, 「빈방」부분, 『문학․판』)한다고 해서 도시인, 그 다수이자 개개인의 슬픔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술은 순간을 이기는 방편일 뿐이지 그 대안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절망적인(‘눈물겨운’) 삶일지라도 긍정하자는 커다란 배수진으로 읽힌다.
도시와 농촌의 구분은 도시와 좀더 주변적인 도시를 의미할 뿐, 경쟁 논리가 첨예하게 적용된다는 면에서는 같다. 따라서 〈팔없는 나무/그림자를 데리고 서 있다/…/한 번 박히면/어떤 나무도 도심을 벗어나지 못한다/…/삶도 살 수 없기에 죽음도 살 수 없다〉(김대희, 「가로수」, 『창조문학』)는 진술은 설득력을 갖는다. 〈한 번 박히면/어떤 나무도 도심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도시인 그 누구도 도시의 구속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죽음마저도 그렇다. 죽음마저도 도시의 논리에 철저히 지배받는다.
〈지하철 신도림 역에 내리면/화살들이 정신없이 쏟아진다/…(중략)…/화살에 맞고도
그 많은 사람들이/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잘 살아가고 있다〉(신미균, 「화살표」,『시와사람』). 여기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잘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반어적 진술이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피를 흘리며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화살표’는 내몰리는 도시인의 삶을 상징하는데, 그것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상태다. 서울의 ‘신도림’이라면 주변부 삶들이 집중적으로 드나드는 관문이 아니던가.
3. 도시인 _ 그 불안의식
도시인의 불안의식은 존재 그 자체에서 오지만 많은 경우 사람에게서 온다. 여기서 한 사람, 혹은 몇몇이 착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친분, 친족이라는 사실도 큰 의미가 없다. 이 불안의식은 사람뿐 아니라 사람이 만든 조직, 기구, 폭 넓게는 사회로부터 온다. 권력 또한 가진 자가 누리고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불안의식을 키우는 괴물이다. 여성에게는 남성이 불안의식을 키우는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까 도시인의 불안의식은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이 만든 구조의 문제이다. 몇몇 특정 인물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 유정임의 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도시인으로서 여성이 갖는 본질적인 불안의식이 이 시 속에 있다.
지쳐있을 시간 쯤
스스로의 몸에 미등을 켜고 길을 달린다
그때
그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뒤따라오며
내 뒤통수를 환하게 들쑤신다
갈수록 불안한 속은 점점 환히 드러난다
도망치듯 속도를 내 본다
나무들 이상한 낯색으로 뒤로 가며 흘끔거린다
계속 같은 속도로 뒤 따라오는 그
속도를 줄이고 한 쪽으로 비켜가며 앞을 양보한다
앞으로 나서지도 않는 집요한 스토커
들켜버린 미숙한 길은 점점 비틀거리고
각도를 조금씩 달리 할 때마다 빛은
갈비뼈 엉성한 내 옆구리에서 번쩍, 반사된다
그의 길을 내주고 방향을 틀어 잡는다
퍽!
그가 마지막 내 뒤통수를 쳤다고 느꼈을 때
휙, 뒤돌아보았다
서쪽 궁창에서 그가
혼자 비틀거리는 나를 무심히 보고 있다
―유정임, 「혼자서 비틀거리다」전문, 『창조문학』
유정임의 시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있다. 〈혼자서 비틀거리〉는 것은 스토커가 따라붙는 절대고독의 시간을 혼자 견뎠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절대고독의 순간은 나눌 수 없고 나눌 수 있다면 그 고독은 해소된다. 역설적으로 둘 이상의 집단이 되면 그 고독은 해소되겠지만 타인에게 고독을 강요하는 어떤 상태를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섬쩍지근한 마음을 갖게 한다.
여기서 화자는 스토커로 명명된, 그것도 〈집요한 스토커〉로 알고 있었던 것이 〈서쪽 궁창에서 그(달)가/혼자 비틀거리는 나를 무심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화자가 그런 사실을 인지했다고 해서 〈집요한 스토커〉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로 도시인의 삶 속에서 여성이 갖는 또 하나의 질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시는 운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4. 도시인 _ 그 불안의식의 역설
역설적이게도 생은 이 불안의식이 있어 생이다. 불안의식이라는 이 괴물은 적에 대해 고민하게도 하지만 스스로를 처절하리 만치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것이 불안의식의 역설이다. ‘바닥을 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이제는 느리지만 올라갈 일만 있다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이 밑바닥에서 꿈꾸는 것은 그래서 최고의 정점이다. 이 도시인의 불안의식이 만든 정점이 유토피아다. 불가능한 것을 보게 하는 지점이 그 밑바닥이기에 가능하다.
늘 먼 데를 바라보는 너
잘 놀라는 너
꽁무니에 커다란 흰 무늬를 가지고 있는 너
네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두 손을 포개고 누워보고 싶다
노루귀 노루발풀 노루오줌 노루삼의 풀들과 이름을 나누어 가져 꼬리가 없어졌다
먼 데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
아름다운 몸을 가진
짐승
노루가 누웠던 자리에
나도 그대로 가서
풀이 누운 자리에 몸을 맞추고 누워본다
몸이 차츰 순해진다
노루가 누웠던, 저 자리
―조용미, 「노루가 누웠던 자리」전문, 『실천문학』
〈노루귀 노루발풀 노루오줌 노루삼의 풀들과 이름을 나누어 가져 꼬리가 없어졌다〉는 인식은 재미있는 신비한 해석이다. 하지만 화자의 몸은 도시에 있다. 정반대의 자리, 불가능한 자리에 있다. 이 불가능을 가능한 꿈으로 치환하는 것은 물론 바닥인 현실이다. 그러나, 누구라 하여 〈노루가 누었던 자리에/나도 그대로 가서/풀이 누운 자리에 몸을 맞추고 누워보〉고 싶지 않을까, 바닥인 현실은 최정점을 꿈꾸게 하는 것을. 즉 유토피아는 최악의 어떤 상태가 구체화 시키는 그림, 이상향이다. 산은 이미 사람들이 가지 않아 정글이 된, 혼자 가기엔 무서운 곳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꿈만이 전부인 게 바닥에 있는 자의 절박한 바람이다. 가능성 여부는 이미 다른 차원의 말인 것이다.
도시인의 이 불안의식은 〈종지마다 담겨 있었다/어머니, 오직 몸이 經典이었다〉(조성자, 「조왕신」부분, 『현대시학․5』)고 자신의 뿌리와 전통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바장이게 만든다. 그리고 살피게 하고 또 눈길 가게 만든다.
아파트 후문 입구,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또뽑기 좌판을 펼쳐 놓는다./…/순간 한쪽 돛에 툭 금이 간다. 에이 재수야, 아이들은 손을 털고 일어서 놀이터 쪽으로 달려가고 사낸 이내 동전 통에 누워 있는 백동전과 함께 오수에 빠진다. 바다가 달아난 사내의 잠, 저녁 무렵 구멍 숭숭 뚫린 다 타버린 연탄재 두 장으로 길가에 남겨진다.
―박현주,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있다」부분, 『시안』
내 생이 끕끕해 보아야 타인의 생이 보인다. 내가 아파해 본 만치 보인다. 현실의 외피를 넘어서 그 이면까지 보인다. ‘또뽑기’ 좌판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도, 거기서 〈한쪽 돛에 툭 금이 가〉는 것이 보이는 것도, 〈구멍 뚫린 다 타버린 연탄재 두 장으로 길가에 남은〉 사내의 하루를 보는 것도 끕끕해 본, 끕끕한 생의 불안의식이 타인의 삶을 나의 삶으로 전이시키는 데서 오는 보임이다.
그냥 참고 살아간다는 게 눈물겨워
누가 손바닥을 찍어놓은 것일까 이렇게
한 생을 건너간다는 징표같은 것,
그러나 저 손바닥엔 체온이 없고
지문도 없어
죽음 같은 고요가
아파트 주차장의 땡볕을 견딘다 그냥 참고
살아간다는 게 서럽고 눈물겨워
저 혼자 말라붙은
시멘트의
손자국, 박수 갈채도 없이
―오정국, 「흐르는 물을 붙잡고 서서」부분, 『시안』
이 불안의식은 도시인들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산책하게 만들고 관찰하게 만든다. 살피게 만들고 사물을 내 살붙이로 인식하게 만든다. 시멘트 콘크리트를 치고 누군가 찍어놓은 손바닥 지문을 〈그냥 참고 살아간다는 게 눈물겨워/누가 손바닥을 찍어놓은 것〉으로 인식한다. 사소한 장난일 수도 있는 손바닥 찍어놓은 일이 〈이렇게/한 생을 건너간다는 징표같은 것〉으로, 그리고 〈살아간다는 게 서럽고 눈물겨워/저 혼자 말라붙은〉 것으로 확대해석 하게 만든다. 마치 생이 〈손자국, 박수 갈채도 없이〉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흐르는 물을 붙잡고 서있다는 설정은 그 양의 미미함 속에서 땡볕을 견딘다는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간절한 일인가.
미얀마인이 눈 속으로 나는 까마귀 쫓고
스리랑카인이 눈 날리는 허공 우러르고
타이인이 눈 쌓인 마을 향하다가
고개 숙이고 돌아서서 터벅터벅 걸어가며
해 뜨거운 고향땅 떠올려볼 때,
반대편에 승용차 세우고 내린 한국인 하나
오줌 갈기고 자지 잡고 털며 진저리치고는
세 아시안 곁눈질하며 승용차 타고 쌩 떠난다
저쪽 갓길엔 지린내나는 김 오르고
이쪽 갓길엔 함박눈에 발자국들 덮인다
―하종오, 「불법 체류자」부분, 『시평』
생을 흔드는 불안의식은 역으로 제 생을 되돌아보게도 하지만 그 폭을 넓게 하기도 한다. 그 눈길은 타국인인 ‘불법 체류자’에게도 머문다. 눈이라고는 맞아본 일이 없었을 그들이 〈해 뜨거운 고향땅 떠올려보〉게 만드는 눈 오는 현실에 대해 눈 돌리게 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숙명같은 현실을 수긍하면서 동조하는 눈길이 주장하는 바 없이 묘사(주장)되고 있다.
5. 도시인 _ 추스르기
도시인, 그 삶의 쓸쓸함과 불안의식은 생존의 위협에서 나온다.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회의는 건강하게 살아내자는 의지를 그 속에 이미 내장하고 있는 것. 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김수우의 시는 ‘~같다’고 조심스러워 하지만 단호한 긍정이 있다.
도살장에 팔려갈 늙은 소의 코 끝에 붙은
살구꽃잎 한 장
소와 꽃잎이 들여다보는
길끝, 광주리 하나 걸어온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시장꾸러미에 높다랗게 얹혀 실려가는
붓꽃 몇 송이
나를 본다, 모든 꽃은
오랜 약속에 붙이는 느낌표이다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다
―김수우, 「장터의 봄」전문, 『愛知』
어떤 거대한 가능성을 보고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망감은 로또복권 만이 희망이라고 주기적으로 사게 만들기도 한다― 〈도살장에 팔려갈 늙은 소의 코 끝에 붙은/살구꽃잎 한 장〉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고 〈자전거 시장꾸러미에 높다랗게 얹혀 실려가는/붓꽃 몇 송이〉가 새로운 해석(‘오랜 약속에 붙이는 느낌표라는’)을 가능케 하면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냥 희망이 아니라 일수를 찍는 치부책 같은 쟁여진 희망이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에는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다그쳐 물어도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뀌는〉(박성우,「자귀꽃」부분, 『창작과비평』) 것도 생을 견디는 한 방식이다.
아프다는 것이 축복임을 안다/앓는다는 것은 내 안에 누군가를 키우고 있다는 것/아픈 몸은 홀몸이 아니라는 것(이대흠, 「달몸살」부분, 『현대시학․6』)
아기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萬事亨通이다(정진규, 「옹알이」부분, 『현대시학․6』)
위에 두 시는 인식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이대흠은 ‘아픔’을 ‘축복’으로 알고 〈앓는다는 것은 내 안에 누군가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므로 〈아픈 몸은 홀몸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생을 이겨나가는 것이 꼭 제 한 몸만이 아니라는 것이니, 또 힘내 버틸 존재의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정진규는 비우는 탈속이 한 방식임을 말하고 있다. ‘萬事亨通’이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다. 문제가 소멸되어 아무 문제 없음이 아니라 이 아무 문제 없음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상태이니, 그런 상태를 인지하고 ‘모든 것들의 사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문제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주목을 요한다.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안도현, 「모퉁이」부분, 『문학동네』
도시인, 그 삶의 질곡이 애초 존재하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역설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생의 질곡인 ‘모퉁이’가 있음으로써 연애도 약간의 방종과 배반의 꿈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퉁이가 없다면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것이니 생의 질곡은 차라리 고마운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야/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윤성택,「탈수 오 분간」, 『시와반시』)듯이 상처는 부대끼면서 가벼워지고 그 울음은 중심에서 나오고야 멈춰지는 것이니 나누고 제 몫의 아픔을 기꺼워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박성우는 불면을 유단자 급에 이르게 하는 도시인의 생의 핍진함을 이기는 방법으로 〈그럴 땐 끙끙대지 말고 벌떡 일어나/된장찌개를 만들어봐/애호박이며 풋고추 숭숭숭 썰어 넣고/뚝배기에 새벽을 지글지글 끓〉여 보라고 권한다. 그것도 〈도마에 칼 지나는 소리가/집 안 구석구석을 얄밉게 파고들〉 게 해야 한다면서 〈그러니 사뿐사뿐 움직여야 해/불면의 진가를 느끼기엔 혼자가 좋은 거〉(박성우, 「불면증 유단자」부분, 『문학․판』)라면서 불면을 이루는 고통은 결코 나눌 수 없기에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이기는 이열치열의 묘법을 내놓고 있다.
6. 도시인 _ 그 견디는 방식
과연 시련은 견디라고 있는 것인가? 좀 상투적인 말로 ‘신은 이길만한 시련만 준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견디어야 하는가. 살아내면 되는 건가.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믿으며 절대 긍정으로 나가면 되는 것인가. 이런 믿음과 상관 없이 주어진 도시인 절대 다수가 떠맡은 생의 질곡은 어떻게 극복되어져야 하는가? 아래 시는 그 함의하는 바가 많다.
시루 위, 견본으로 뽑아둔
푸슬푸슬 말라가는 콩나물을 볼 때마다
몸에 착 감기는 비단을 덮어주고 싶어진다
검은 보자기를 들어올리는
후끈거리는 콩나물 대가리의 힘은
팅팅 불은 껍질이 찢어지는 순간
그대로 內燃機關이 된 온몸으로부터 발화된 것
실린더는 맹렬하게 한 방향으로 작동하여
부쩍 키가 자라고 아삭아삭해진 콩나물,
있는 힘을 다해
캄캄한 세상을 밀어젖히느라
뒤꿈치가 다 갈라터진 뿌리를 다듬는다
따뜻한 국 한 그릇이 들어올릴
하루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누군가가 한 움큼 씩
새로 뽑아다 코앞에 들이미는 오늘,
그 연하고 싱싱한 새벽의 젖은 머리에서
―이인원, 「실크터치」전문, 『시안』
〈검은 보자기를 들어올리는/후끈거리는 콩나물 대가리의 힘은/팅팅 불은 껍질이 찢어지는 순간〉에 있다는 인식은 고통의 극점에서 힘이 분출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이 〈그대로 內燃機關이 된 온몸으로부터 발화된 것〉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적어도 고통 당하는 모든 존재는 그 안에 내연기관이 있어 발화한다니, 어떤 면에서 도시인의 핍진한 생도 이 앞에서는 엄살이 될 수가 있다. 〈있는 힘을 다해/캄캄한 세상을 밀어젖히느라/뒤꿈치가 다 갈라터진 뿌리를〉 가진 존재가 콩나물이듯이 뒤꿈치 갈라터지게 살면 못 견디고 못 이루어낼 게 없을 것만 같은 위로가 이 시 속에 있다. 이는 상투적인 위로가 아니라 생명이 자신을 발화해 나가는 비밀이 주는 엄숙한 위로가 된다.
카운터를 통과해야 하는
객실이나 고급 커피숍 아닌
라운지 소파에 앉는다.
세일즈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쉰다.
테이블이 몇 개,
물소가죽 소파가 어디에 몇 벌 놓였는지
하도 들락거려서 이 라운지는
거리처럼 익숙하다
빌딩들을 누비면서 나는
점점 그 일부를 거리로 빼돌린다.
라운지, 복도, 층계는 내게 거리이다.
엘리베이터도 거리다.
나의 거리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오묘해진다. 거래처 임원실 행운목이
가로수마냥 푸들푸들하다.
호텔이 납작해진다.
―이명훈, 「호텔 사냥」전문, 『리토피아』
도시인의 가장 큰 특징이 세일즈다. 모든 것이 세일즈 되며 그래서 세일즈맨은 도시인 중 첨병에 해당된다. 시 「호텔사냥」은 세일즈맨이 도시에서 살아내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수동적으로 어쩌지 못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물론 세일즈맨인 화자가 하는 일은 물리적인 자리 확보는 아니다. 하지만 〈빌딩들을 누비면서 나는/점점 그 일부를 거리로 빼돌린다./라운지, 복도, 층계는 내게 거리이다./엘리베이터도 거리다.〉에서 보듯 그는 공간을 활용하고 점유한다. 더욱이 그것을 ‘나의 거리’로 여길 수 있는 여유마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의 거리가 넓어지고 깊어지고/오묘해진다.〉는 진술이 사실적으로 진실하게 들린다. 볕을 받지 못하는 행운목은 불행하지만 가로수마냥 푸들푸들한 게 현실이다.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 「괜찮아」부분, 『문학동네』
말하고 싶지 않은가, 이 시처럼. 좌절하고 절망하고 불면 속에 지내고 핍진한 생 속에서 끕끕한 도시인에게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많은 울림을 준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그래, 가 아니라/괜찮아./이제/괜찮아.〉
스스로를 기껍게 위로해 주는 경지에 이르러야 생이 환해진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괜찮아- 라고 긍정할 수 있어야 이 핍진한 생을 건강하게 이어나갈 수 있다.
7. 도시인 _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은 나의 의지 이전에 주어졌다. 이미 주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도시인 개개인에게 제 몫의 상황이 주어져있다. 상황이 더 절박한 자들일수록 상대적 박탈감이 크겠지만 운명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제 액션만이 남았다.
〈침묵보다 더 큰 소리가 없어/만근 구리 종은 귀가 먹었다〉(이경,「적멸」전문,『창조문학』)
침묵도 한 방식이고,
〈세월은 흘렀으나/배가 아프면/이런 욱욱한 돌로/배를 문지르던 날이 있었네〉(문태준, 「돌의 배」부분, 『시와시학』)
스스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온고지신의 방법도 있고,
〈수족관의 장어란 놈이 심심해 죽겠다는 듯이 몸을 뒤틀다가 지나가는 내 눈과 딱 부딪치자 아주 어색한 웃음을 웃는데 나는 저 입천장이 훤히 드러나는 순진한 웃음을 어디서 꼭 한번 본 것만 같으다.〉(이시영, 「기시감」전문, 『시와시학』)
산책과 더불어 사물을 따스히(착하게) 보는 방법도 있고,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그리고 무릎이 나올 듯 말 듯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김광규, 「이른 봄」전문, 『문학과사회』
사람에게서, 어린 학생에게서, 그의 몸에서 가능성을 보는 방법도 있겠다.
지금 도시인의 삶은 비전이 보인지 않는다. 적이 분명해서 총을 들고 나설 수도 없고, 다시 금모으기를 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차를 팔고 집을 내놓을 호들갑의 시간도 지났다. 희망이 안 보이는 지독한 절망이 오히려 희망일지 모른다. 〈저렇게 슬글슬금 피는 꽃/꽃 아니〉라고 소리치면서, 〈저렇게 설렁설렁 부는 바람/ 바람 아니〉라고 소리치면서 〈간밤의 눈이 모든 봄을 덮〉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꽃 위에 덮힌 눈은 꽃이 가장 힘들 듯이 도시인의 생존에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지독한 절망의 당신이 꽃임을 알아야 한다. 한 호흡 죽이면서 소리치자. 아무에게도 말고 나에게, 내 안의 나에게 소리치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