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

부활.톨스토이

也獸 2009. 11. 25. 19:35

부활을 읽고

 

그러니까, 소문이란 것 믿을 것이 못 된다. 몇 줄로 줄여 말할 수 있는 줄거리로는 이 소설의 어느 무엇에도 이르지 못 한다. 앞에 읽은 『채털리부인의 사랑』이나 『제인 에어』는 그 스케일에서나 그 깊이에서 많이 못 미친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매우 지루하다. 전혀 지루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나이 50에 읽어서 그 참맛을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세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분위기가 있다. 아마도 이 소설에 나오는 하인들은 주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알고도 몰라야 된다(모른 척 정도가 아니다)는 묵계 같은 게 있지 않나 싶다. 주인이 하인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하나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을 여는 서사, 즉 주인에 의한 하인의 겁탈도 일상화된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지루하고 또 주인공은 우유부단하다. 아니다. 그 우유부단을 끌고 가는 긴 시간과 행적은 주인공의 고집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호함일지 모른다. 또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는 주인공의 행적은 그의 사상과 사고, 행동이 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또 흔들린다는 점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고뇌에 찬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한 시절, 경자유전의 법칙이나 ‘토지는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신봉하여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은 맑시즘을 공부하고 또 실천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실천은 혼자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그가 속한 신분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실행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톨스토이의 말년 대작임을 보여주기에 하나의 부족함이 없다. 법과 실행의 괴리, 판결하는 자와 판결 받는 자의 차이, 귀족과 농노의 생활상의 차이, 창녀와 창녀를 찾는 자의 괴리, 법과 인정의 차이, 정치범과 잡범의 차이(정치범은 갑갑해서 정치범인지도 모른다), 보여주기 위한 풍요와 굶어 죽기 직전의 차이, 양심과 관습의 간격, 남과 여의 차이, 도덕과 비도덕의 사이, 삶과 죽음의 간격, 신분과 옷차림이 갖는 힘, 양심을 이루려는 일의 지난함, 타락과 퇴폐, 그리고 위선적인 삶, 신분적 질서를 낮추는 행동에 대한 경계, 사랑은 신분적 질서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등 이루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이 다 들어 있다. 이 주인공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가 의문일 정도다. 아니 그런 의문이 이제 그를 살게 한다고 보아도 된다. 협잡과 모략 속에서 양심이란 참으로 대단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주인공이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남들 사는 방식에 젖어 있다가 한 계기를 계기로 끊임없이 회의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다. 이게 이 소설의 힘이다.

 부활은 그러니까 양심의 부활이자 양심을 따라가는 신체의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