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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임재춘

也獸 2010. 1. 3. 21:24

 

가을 저녁

             임재춘

 

 

구부정하게 혼자 오르는 외진 길에서

들깨 냄새가 난다

모두 털리고 향기만 남은 마른 가지들

부스럭거리는 뼈마디 같다

비탈진 과수원에서

속 꽉 찬 배가 땅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

터지며 구르는 쪽으로 남은 빛이 뻗치다 만다

상처 난 가을 저 아래쯤

고구마 밭에서 몇 사람 수런대며

나머지 땅을 파헤친다

가지런한 고구마 줄기 허옇게 뒤집혀

들판을 지나는 개울 물고기

배 뒤집힌 듯 가냘프게 눕는다

고구마 잎줄기 시린 빛 어둠이

스멀스멀 소리를 덮는

그의 집은 산모퉁이에 있어

불을 켜러 들어가는 문소리가

잠시 노을을 돌아본다

노곤한 허리를 펴며 눕고 싶어

부스럭거리던 능선은 비로소

검붉은 노을로 몸을 덮는다

 

*그의 시는 이미지가 선명하지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천천히 늦꾸어서 읽어야 제대로 시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후각, 청각, 시각의 이미지가 가득해도 강렬하지는 않다. 그래서 천천히 읽어야 하고 천천히 읽으면 녹차 같은 무미의 깊은 맛을 준다. 이런 '가을 저녁'을 걸은 게 얼마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