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발자국이 여물다/차주일
也獸
2010. 9. 12. 23:36
발자국이 여물다
차주일
늙은 농부 굽은 등허리가
머리보다 높아져
나락모가지와 같을 때
제 몸 빼닮은 낫 가장 낮게 뉘어
발목 높이로 나락을 베는
마지막 독무 지나간 논바닥에
북향화처럼 외곬 향한
발자국 봉분들
지상보다 발목만큼 낮은 그 징검돌을
가을볕이 무고히 따라 딛고
나락꽃 같은 서리 펴나
싸락눈 튼실하게 여물더니
언 발자국을 봄볕이
사를흙살얼음 사를흙살얼음 쓿는 것인데
방향도 높이도 잘 여물어
평평한 만삭이 진통을 시작한다
*차주일의 첫시집 <냄새의 소유권>은 흑백사진 같다. 좀 어둡다. 어둡지만 길게 음영이 비치는 것이어서 길 감동이 길다. 천천히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안 보이던 피사체가 잡히는 것처럼 시의 문맥이 찬찬히 들여다 본 입맥처럼 보인다. 그의 시가 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에는 '주름' 이미지가 많은데, 그것도 흑백 사진의 음영처럼 개성을 이루는 한 굴곡이 된다. 시가 환한 분위기가 적고 소가 되새김질하듯 사유하고 사유해 놓은 질펀한 덩어리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첫시집이 늦은 이유도 그러할 듯, 생각되어진다.
이 시는 단형시로 그의 사유의 깊이와 단아한 서정이 균체미를 이룬 시다. 짧으나 가볍지 않고 읽히나 얕지 않다. 약간의 의도가 보이는 것이 흠이나, - 평평한 만삭이 진통을 시작한다, 같은 처리는 좀 그답지 않다 - 농경 체험을 가지 그의 서정이 좋다. '사를흙살얼음'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시집 <냄새의 소유권> 상재를 축하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