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섬광과 순간, 잠시의 그 사이

也獸 2010. 10. 17. 14:16

문효치 시집 『왕인의 수염』

섬광과 순간, 잠시의 그 사이

                                      윤관영

 

 

  『왕인의 수염』에 해설을 쓴 김춘식 평론가는 이 시집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문효치 시인의 신작 시집이 ‘여행’을 매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적이고 특징적이다. 역사, 기억, 개인사, 고향 등이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재배치되고 있는데, 결국 시인의 공간적인 이동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억’의 이동으로 변주된다. … 시인은 어디를 가든지, 여행의 의미 속에서, 그 장소의 현재성보다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과거 또는 흔적을 보려고 한다. 회고주의자적인 이런 태도는 시인의 작품이 일상성 바깥에서 ‘정서적 기원’을 찾고 있음을 쉽사리 짐작하게 한다.>

  문효치 시인의 시적 형상화의 경로와 그 정서적 기원에 대해 정확히 짚고 있는데 시인의 이런 시적 태도는 시적대상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시인은 시적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것을 ‘여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시적대상은 과거(역사)와 유년, 현재, 그리고 관념에 이르기까지 폭 넓다. 이 때 시는 시적대상과의 교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시적대상과의 교감을 일으키는 계기는 다양하나 그 교감점은 ‘찰나’이며 ‘섬광 같’다. ‘잠시’이며 ‘후딱’이다. 그의 시적 형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아래 시다.

 

현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떨고 있다

 

떨림 위에 황혼이 얹히고

몸부림이 올 때마다 섬광이 보였다

 

섬광 사이로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이

잠시 펄럭였다

 

울안에 서 있는 감나무에

붉은 감도 익고 있었다

 

장광의 장항아리

메주가 삭아 구린내를 풍기고

저녁연기도 잠시 보였다

 

음계의 허름한 계단으로

현해탄의 물결이 올라왔다

 

후딱 지나가는

섬광 사이로

―「백제시 - 百濟琴」전문

 

 ‘현 위에 새 한 마리 앉아/떨고 있’는 것은 시적대상의 현재 상태다. 시인은 본다. ‘떨림 위에 황혼이 얹히고/몸부림이 올 때마다’ 이는 섬광을 본다. 이 본다는 것은 시적대상으로 인한 시인의 현재 상태다. 계기가 오자, 보고 또 본다. 섬광을 보고 ‘섬광 사이로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이/잠시 펄럭’이는 것을 본다. 그런데 ‘잠시’다. - 문효치 시의 특징이 바로 이 부사에 있다 - 이 잠시 속에는 또 다른 잠시가 들어 있다. ‘울안에 서 있는 감나무에/붉은 감도 익고 있’고 또 ‘장광의 장항아리/메주가 삭아 구린내를 풍기고/저녁연기도 잠시 보’이는 잠시다. 시각과 후각 이미지가 다 들어있는 잠시다. 이 잠시의 잠시 속에는 ‘음계의 허름한 계단으로/현해탄의 물결이 올라’오는 역류의 물결마저 들어 있다. 이 모든 잠시 속의 일들을 시인은 말한다, ‘후딱 지나가는/섬광 사이로’ 였다고.

 여기서 잠시와 잠깐, 후딱 등은 시적대상과 교감하는 그 찰나적 접점을 말한다. 문효치 시인의 시의 탄생은 이처럼 시적대상과 교감하는 그 극적 순간, 즉 찰나에 탄생한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이 <잠시>를 나누는 통찰력이 시의 근간을 이룬다.

 

법륭사 금당에 들어

부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만 허공에 뜨고 말았네

체중은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비어 있는 그림자가 되어

 

그냥 편안했네

오색의 색깔들이 그 편안함 안으로

들어와 채우고

 

60년 전 유년의 배추밭에서

잠자리나 나비의 날개에 내려앉던

늦가을 햇빛의 반짝임이

비어 있는 그림자 속을 밝혔네

 

지리불사 부처님이

이렇게 띄워 올렸네

―「백제시 - 止利佛師」전문

 

 이 시도 마찬가지다. ‘법륭사 금당에 들어/부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벌어진 순간적인 교감이다. 다만 이 시는 대상과의 끝없는 교감이라기 보다, 내가 시적대상에 완전히 함몰되어 하나된 순간의 경험이다. 해설과 설명이 아니고 함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함몰된 상황은 그가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상태, 그러니까 ‘60년 전 유년의 배추밭에서/잠자리나 나비의 날개에 내려앉던/늦가을 햇빛의 반짝임’ 속으로 데려간다.

 

어선의 그물에는

먼 바다에 살고 있는

물새의 손수건 한 장 끌려온다

 

물새는 물새 대로 슬픈 일 많아

때로는 진한 눈물도 흘리는데

그 눈물도 젖은 손수건 한 장 끌려온다

 

어둠은 얼룩으로 남아 있는

햇빛들을 하나씩 자빠뜨리며

배를 밀어 부두로 보내고

 

어둠에 석여버린 배는

먼 바다에 살고 있는

물새의 울음소리

갑판에 출렁출렁 싣고 온다

―「군산 부르기 - 째보 선장」전문

 

 김춘식 평론가는 <역사, 기억, 개인사, 고향 등이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재배치되고 있는데, 결국 시인의 공간적인 이동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억’의 이동으로 변주된다>고 말하면서 ‘회고주의자적인’ 시인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시인이 불러오는 첫소리는 다름 아닌 고향이다. 고향은 ‘물새의 울음소리’로 그에게 다가온다. 그것도 ‘갑판에 출렁출렁 싣고 오’고 있다.

 

나는 한순간

그 이슬 속에 햇빛들이 뛰어들어

오붓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보았다

 

집이나 미루나무 같은 것들의 그늘에서

전설 속의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응시하는 풍경을 보았다

 

미풍에 반짝일 때마다

신비한 보석 같은 영롱함에 끌려

이슬을 보면서 뜻밖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길에 대한 명상 - 이슬」부분

 

 이런 시적대상과의 적극적인 교감으로 탄생하는 시는 일단 시각적 이미지에 많을 빚을 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풍경을 보았다’와 같이 ‘보았다’라는 과거형 서술어가 많이 등장한다. 또한 이런 시적대상과 교감하는 시는 ‘이슬 속에는/아주아주 많은 풍경들이 들어 있’음을 보는 직관력과 현미경처럼 미세하게 나누어 깊이 보는 보기가 필요하다. 전쟁 후 손목을 잡혀 먼길을 가면서도 그 이슬 속에 담긴 ‘마을’과 ‘전설 속의 사람’과 ‘친구’의 모습까지 읽어내는 보기 능력이 문효치 시인의 장점이다.

 

자귀꽃 속에 넣어 두었던

별빛 한 봉지 털어 내린다

 

소년 시절

그림엽서에 웃음처럼 그려 넣어 두었던

그 별빛

자귀꽃 속에서 익어

삶의 곱이곱이를 넘어

어느 날 문득

노년의 둥근 문이 보일 때

자귀꽃 속에서 익다가

저절로 터지는

그 별빛 한 봉지

 

이제는 바람의 몸에서 이는 경련처럼

아련한 아픔으로

터져 내린다

―「길에 대한 명상 - 여름」전문

 

 이 시는 시적대상이 자신이다. 시적대상과 교감을 하게 되면 교감한 내용에 대한 진술하기 십상이어서 설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처럼 시적대상이 자신일 경우 고백이 되기 쉽다. 이 경우, 개성이 확보되기 쉽고 정서적 감염력이 높다. 위의 시, ‘길에 대한 명상 - 여름’이야말로 그의 시 중에 수일한 시가 아닌가 한다. 고백적이면서도 객관거리를 확보하고 있고 추억하지만 추하지 않다. 그리고 아프지만 아름답다.

 시인 나희덕은 말한 바 있다.

 <시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는 복잡한 우회로를 감안한다면, ‘기억’과 ‘자연’의 빈번한 채택이 곧 현실의 결여를 낳는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오히려 ‘기억’과 ‘자연’에 대한 제대로 된 되새김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정시의 노화(老化)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억’과 ‘자연’이 현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과 ‘과거’에 의존하는 시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에 가까운 말이지만 주목해야 할 말은 노화되지 않는 서정시다. 제대로 된 서정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유효하다. 이제 문효치 시인의 시가 과거와 기억에 대한 객관적 교감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1인칭 화자의 진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길에 대한 명상 - 여름’ 같은.

 <다층>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