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집 이후 발표한 시

어-디-멍-게-같-은-이-없-나-요/윤관영

也獸 2010. 11. 20. 16:44

어-디-머-엉-게-같-은-이-없-나-요

                                              윤관영

 

 

 

 

멍게는 자웅동체다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은 연하다

젖꼭지 같지만 그곳은 입이자 항문

사람들은 그것 먼저 씹는다

그것을 먹어야 모두 먹는다 믿는다

멍게는 가지각색

젖빛부터 젖꼭지빛까지 다 들어 있다

밑둥이 환하다

살을 들어낼 땐 젖가슴을 만지는 듯하다

멍게 물은 지워지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들어, 들었는지도 모르게 한다

잘 죽고, 잘 쉬는 멍게

멍게가 수족관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을 보면

양가슴에 달고 마구 달리고 싶어진다 묘하게

멍게를 먹는 이는 순하고, 탓하지 않고

해삼을 먹는 이는 따지고 잰다

산에 산삼 바다에 해삼 거리에 고삼?

멍게가 들어가 있는 수족관에 들어

그 옆에 붙어 같이 숨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 멍게 같은 가슴 가진 이 없나

수족관 밖을 내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시 쓰는 즐거움이란 무얼까? 아마 자기 맘에 드는 시가 한 편 써졌을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쓴 후 그 느낌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이 시를 쓰고는 맘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멍게가 수족관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을 보면/양가슴에 달고 마구 달리고 싶어진다’는 상상에 이른 게 즐거웠다. 마치 나의 시 「국수를 삶는」에 나오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라는 구절이 자동화되어 스스로 놀랐듯이 말이다.

  시는 여러 이미지의 종합이다(멍게 물은 지워지지 않는다, 같은). 그런 말이 어울릴 듯하다. 이 시를 쓸 때는 <총각수산>이란 배달횟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를 뜨러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수족관을 마주하고 그늘에 앉아 있을 일이 많았다. 물론 수족관 청소는 일과 중 하나였다. 하루는 수족관을 보고 있는데 멍게가 날아다니는 거였다. 이상하다 싶었는데(아니 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사실은 해수를 바꿔주면서 호수에 물을 틀어서 그런 거였다. 날아다니는 멍게라, 그때 멍게의 모든 색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수족관을 보듯 멍게는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아주 조심히, 아주 꼼꼼히, 아주 정확히 말이다. 거기다 산에 산삼, 바다에 해삼, 거리에 고3이 다니는, 사람들의 욕망-그러니까 욕동의 어떤 물결까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녀석 옆에는 그냥 붙어서 뒹굴거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여인이라면 연애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남자라도 매력있는 녀석일 거다.

  제목도 재미있는데 멍게가 손나팔을 한다면 느리면서 길고 들릴 듯 안 들릴 듯 부르는 듯 안 부르는 듯 부르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 된 것이다. 암튼 다른 할 말도 많지만 내 시를 내가 해설하고 싶어하게 할 만치 이 시는 괜찮지 싶다. 하하, 멍게적 상상력이랄까 아니 요즘은 바다와 친해진 해양적(바다란 말은 너무 막연하고 넓다), 아니 해물적 상상력이다. 오징어는 날 물고 눌린 광어도 내게 덤비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