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나무 이야기/김추인

也獸 2011. 1. 5. 15:25

 

 

나무 이야기

              김추인

 

 

  봉이 언니네 집 늙은 살구나무를 기억한다

 

  시큼한 살구가 개복숭아만씩이나 한데 겨울엔 앙상한 가지들이 모두 한쪽으로 엎어지며 큰 소리로 울던 집 잊지 못한다 나무가 단 한 번 환해지는 오월, 늙은 팔에 꽃등을 띄엄뜨엄 켜고 있었고 동네 사내들이 나무 아래서 윷을 놀며 지나가는 말처럼 하던 말 '몸은 늙어도 늙을 줄 모르는 외로움이 꽃을 피우는 게지 쯪.'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나 역광의 시그널은 자꾸 돌아보게 하는 매혹이 있다

  그늘이 푸른 살구나무도 그랬다 늙은 나무의 문을 밀면 지하계단이 있을 듯한------ 깊은 동굴 속으로의

 

  늦은 밤 돌담을 돌아 집에 오는 길은 나무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는데 그런 밤은 소곤대던 봉이 언니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밤에는 늙은 나무를 치올려다 보믄 안 되는 기라 귀신이 묵은 가지에 올라앉아 내려다본다 카더라 캄캄한 그믐밤에는 강물이랑 바람들이 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거 니는 모르제 밤에 나무에서 울음 비스무리한 소리가 나는 거는 원 깊은 귀신들 한숨 소린기라 슬픈 귀신만 여그 이승을 떠돌아 댕기다가 생이집이나 늙은 고목에 깃드는 기지' 봉이 언니는 동생 또봉이를 업고 내 귀에 속삭여 주곤 꺄르륵 웃곤 했다

 

  아는 것이 많은 봉이 언니는 나무에서 귀신같이 똑똑한 책이 나온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어린 나는 대패질한 얇은 나무책을 상상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언니의 말은 모두 맞다는 확신이 든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나오느라 얼마나 많은 숲들이 사라졌을지------

 

 훗날 봉이 언니는 신열로 죽었다는 풍문이 왔지만 나는 언니가 분명 살구나무 속으로 들어간 거라고 오래 믿었다

 

  여러 십 년이 흐른 고향 길에 옛 언니네 집터를 찾아 갔더니 잡초 욱어 괴괴하고 살구나무 있던 자리에 '봉강 보살 신집'이란 다 삭은 나무 간판이 거북이 자물통 채운 슬레이트 처마 밑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같이 갔던 동생이 으스스하다며 얼른 자리를 떴다

  급히 돌아 나오는 내 뒤에서 꺄르륵 숨넘어가게 웃는 귀에 익은 소리를 들은 듯도 했는데------

 

 *옛날 이용악의 시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살구나무도 긁거리만 남았길래'하고 외던 이용악의 <낡은집> 생각이 난다. 김추인 시인에겐 '살구나무'가 하나의 주요한 이미지다. 그의 여러 시편 중에 끌려서 (타자 치느라 애먹어도 기꺼운) 옮겼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시지만 삶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고 또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 좋게 와 닿았다. 좀 과감히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시다.

 *시집 <프렌치키스의 암호>의 상재를 감축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