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줌렌즈
생각하면 기분 좋은
윤관영
허영만의 만화 『食客』의 서장은 밥에서 시작된다. 그만큼 음식에서 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얘기(많은 식당이 이 기본을 놓치고 있다). 음식점도 잘되는 곳은 밥이 다르다. 밥을 보면 그 식당을 알 수가 있는데, 밥공기를 세척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고영민의 시 「공손한 손」이다.
추운 겨울 어느 날/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사람들이 앉아/밥을 기다리고 있었다/밥이 나오자/누가 먼저랄 것 없이/밥뚜껑 위에 한결같이/공손히/손부터 올려놓았다
이 시는 일반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거기에 화자의 개입은 부사인 ‘공손히’ 하나다. 이 시를 읽으면 밥공기의 뜨거운 기운이 왼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듯하다. 그의 시의 큰 특징 중의 하나로 밥공기의 뜨거움 같은 ‘감염력’을 들 수 있다. 울림이 크다거나 진정성이 두텁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많은 시가 <서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건을 시로 육화하는 재주가 본능적인데,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파장을 잡아낸다. 거기다 그것을 드러내는 남다른 방법과 각도가 그의 시를 개성적이게 하고 있다. 그의 개성을 드러내는 시 중의 한 편이 「저녁밥상을 물린 뒤」다.
저녁밥상을 물린 뒤, 우리는 고요해졌다 형은 바닥에 눕고 누나는 벽에 기대었다 어머니는 다림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간장 간을 맞출 때는 생 계란을 띄워보면 안단다 가라앉으면 싱겁다는 거고 계란이 떠서 꼭 백 원짜리 동전만큼 뵈면……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생 계란처럼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개들마저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도 짖지 않았다 해가 하루하루 더 짧아지는구나!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뒤란에서 들려왔다 누나는 이불을 당겨 발을 덮었다 밥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입이 심심했다 문밖으로 어둠이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별 내용 없어 보이는 것은 시를 드러내는 그의 시적 방법 때문이다. 그런데 울린다. 이것이 감염력이다. 독자는 그런 정황 속에 있어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아니 독자를 그 정황 속으로 고스란히 들여보내 앉힌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계란은 말을 이어가는 소품이지만 난 계란에 끌린다. 계란을 얼음물에 집어넣어 두어야 노른자가 가운데로 몰려 낚시줄로 자를 때 터지지가 않는데 냉면집에서 하루 3판 이상의 계란을 삶다보면(현대백화점 신촌점 10층 식당가 ‘다래냉면’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 이 시의 어떤 정황에 끌린다. 깨진 계란은 수면에 뜬다.
이 시의 어떤 비슷한 정황 속에 있을 때가 내가 「자화상自畵像」을 쓸 무렵이었다. 독자인 나의 사실이 겹치며 어긋나는 부분이 ‘감염력’이 아닌가 한다. 내가 알기로 그는 ‘감염력이 강한 서사적 시인’이다.
잘 생기고, 훤칠하고, 공손하고, 공 잘 차고, 또 시 잘 쓰는 시인이 후배로 있어서 ‘형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몹시 기분 좋은 일이다. 물론 그는 나에게만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가 농촌에서 도시로, 과거에서 현재로 와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포항에 내려가 있는 그가 서울에 오면 내가 냉면 한 그릇 짜 주어야지. 회냉면의 홍어회도 있으니 소주 한잔도 좋을 터. 그런 막연함을 기다리는 것도 자못 기분 좋은 일이다. 그 말이 울린다.
“아, 예, 형님!”
답글/고영민
관영이 형!
올 겨울은 참 눈도 많이 오고 추웠소.그래서 그런지 봄볕이 참 반갑고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되오.
흙냄새가 올라오고, 새소리가 높아지고, 고층 아파트의 어느 집 창문으로
길게 고가사다리차가 잇닿아 있는 것을 보면서
봄은 저렇게 고가사다리를 놓고 이삿짐처럼 오는구나, 새 집에 장롱을 들이듯 그렇
게 오는구나, 중얼거리게 된다오.
형은 요즘 국수가게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국수라?
형에게 국수란 무엇이오. 국수라는 말속에는 왠지 모를 적적함이 들어 있다는 생각
을 하게 되오.
뭐랄까? 생계, 슬픔 허기!
할 말이 많아 주저리주저리 무언가를 늘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내 두 번째 시집에 소개된 <황홀한 국수>라는 시와 형의 첫 시집에 소개된
<국수를 삶는>시를 통해 국수끼리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면 하오. 굳이 말이
아니라 시와 시끼리 정담을 나누고, 울고 웃기를 바라는 마음이오.
결국 내 시는 나고, 형 시는 형이니 이 둘을 붙여놓으면 알아서 서로 하고 싶은 말
을 주고받지 않을까.
먼 저 내 시 <황홀한 국수>를 옮겨놓을게요.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 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갔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형 시 <국수를 삶는>을 옮겨 놓을게요. 내가 형 시 중에 제일
좋은 하는 시라오.
국수를 삶는 밤이다
일어나는 거품을 주저앉히며
창밖을 본다 만개滿開한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젓다가
찬물에 헹군다
누가 아들과 아내 떼어놓고 살라 안 했는데 이러고 있듯
벚꽃은 피었다
기러기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
비빈 국수 냄비의 귀때기를 들고
저 벚꽃나무에 뛰어내리고 싶은 밤이다
저 별에게 국수를 권해 볼까
국수가 풀어지듯
소주가 몸 속에서 풀리듯
국수를 삶는 내가
벚꽃에 풀리고 있다
국수가 에부수수
벚꽃처럼 끊는 밤이다
어느 봄밤 나는 불쑥 형의 국수가게를 찾아가 이렇게 말할게요. 형 국수
한 그릇만 말아줘!
후르륵, 후르륵, 형 앞에서 맛있게 국수를 먹고 싶소. 거품을 주저앉히며
끓인 형의 국수 한 사발을 허기진 손으로 건네받아 에부수수 들이키고 싶
소. 그러다 나는 괜히 마음에 격해져 국수그릇에 눈물이라도 빠뜨리면 어
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