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빈 칸'을 기록하다/백인덕

也獸 2011. 10. 8. 22:57

빈 칸을 기록하다

백인덕

 

 

나이 오십 즈음에, 그것도

가을 한 가운데

환한 주말 오후라면

사소함 몇 개에 자못 비감해져도 괜찮으리.

변기 소용돌이는 되돌아 밀려 올려오고

벗을 때마다 헌 운동화 깔창이 딸려 나오고

지친 공짜 술의 대가로 자꾸 한심한 놈이 되는 것.

, 그런 것들이야 찬물 세수 한 번감이라지만

텅 빈 정류장 아득히 달려오는 버스를 바라보며

갑자기 방향과 목적지를 잊거나

아이 몇이 뒤뚱거리는 소도시 시립도서관 현관에서

불현 듯 신열과 가려움이 되살아나거나

한낮 야트막한 산책로에 가지런히 누운 봉분들을 지나며

생이 한 뙈기 가을볕만도 못한 것 같아 서러우어지는 것.

나이 오십 즈음에, 아직도

덜렁덜렁 책가방을 메고 덜컹덜컹 외길을 가노라면

푸념 몇 가락, 지독히 끓어오르는 분노도 나쁘지 않으리.

정겨운 낮술 약속은 잊은 척,

하염없이 앉아 한심한 시나 끄적이는 한가한 주말 오후,

괜시리 날선 시선은 벽을 튕겨 눈동자를 찌른다.

멀쩡한 눈이 시린데 심장은 떨린다.

이십여 년의 한기 속에 빈 칸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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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편의 내가, 금간 거울도 없이

다른 반편을 힘겹게 쓰다듬는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는 오후.

 

*시집을 보면서 책 제목이 생각났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던 제목의 책. 자폐적 읊조림 같은 시들 속에서 유독 이 시가 와닿았다. 때로 구구절절은 객관화 해야 구구절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