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작품/내가 읽은 나의 시
중첩된 시간은 고체가 되어간다
윤관영
밥을 닮아가고 있는, 밥만 데우는 밥통
숨에서 김이 나오는, 국수를 먹는 긴 손가락들
24시 국수를 삶는 솥은 나문재 뻘밭 같다
어떤 다짐 같은, 사리를 풀어헤치는 첫술 풀리는 깨소금
육수만 내는 들통은 멸치가 되어 가고 있다
국수를 쥐는 손가락은 국수처럼 풀리다가 사리처럼 감아들기도 한다
행운목 뿌리 같은 개숫물망
솥 손잡이 朝光엔 김이 섞여 있고
국숫집엔 젓가락도 국수를 닮아간다 수저 쓰는 양손질
국수 먹는 모습은 뒤에서 볼 때가 좋다
詩上萬事, 萬化方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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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는 좀 엄숙하고 현학적입니다. 코너에 시가 선정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쓸까 궁리하다 보니, 잘 써야 된다는 압박감에 부담 곱빼기더라구요. 무지한 걸 들키기는 싫고, 괜히 아는 척하다 보면 더 확실한 바닥이 드러날 것 같고, 원고 마감은 청탁 즉시고, 해서 전전긍긍이었습니다. 걱정 끝에 이 코너의 앞에 글 쓴 분들의 글을 찾아 읽어 보기도 했습니다. 답은 없더라고요. 해서 다소 거칠 수 있지만, ‘무지하지만 제 생각’에 하는 나름의 생각을 중덜중덜 쓰기로 했습니다.
選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면식이 없는 분이 절 뽑아 주셔서 우쭐했습니다. 남들 실린 시 보고 질투만 하고, 질투 끝에 제대로 읽지도 않았었는데 달라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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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시의 초고 제목은 ‘풍경5’였습니다. ‘중첩된 시간은 고체가 되어간다’는 제목은 외피 없는 우산대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경5’는 비 오는, 비 내리려는, 비가 올동말동한, 비 내리는, 비 그쳐가는 등등의 어떤 정황을 보여주는 제목일 수 있습니다. 긴 제목에 비해 외려, 깊고 함의하는 바가 많을 수도 있는 제목이라 생각합니다. 좀 dry하죠. 시치미 떼는 측면도 있고요. 그렇게 했으면 아마 제목을 읽지도 않고 내려간 분들이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未堂(공부는 직사하게 하지 않고 ‘末堂’이라고 떠들고 다녔더랬습니다. 지금이사 그분의 전집 1권을 곁에 두고 살지만요) 선생은 ‘무제’라고 제목을 달아도 사람들이 그 제목을 고민하면서 읽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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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자기딸딸이(自慰)냐!’는 말이 있죠. 이는 시를 폄하할 때 주로 쓰이는 말로 기억되는데, 이 말이야말로 시를 재는 잣대로 퍽이나 유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무지한 제 생각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딸딸이라 함은 일단 자기 카타르시스가 전제된 셈이고 그 때의 자기 상태가 좋았다는 말인데, 시에서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詩作의 그릇된 한 경향성으로 <주관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시야말로 주관주의의 극치가 아닐까요. 다만 이 극치를 보편화시키는 게 관건인데(저는 외려 보편화시키지 않은 꼴통 같은 주관주의야말로 시가 되면 개성적인 좋은 시가 된다 보기도 합니다만), 그건 아주 고차원이니까 남겨두고, 일단 시는 시작한 시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이 말씀입니다. 제가 좀 무지해서 그런 판단을 내렸지 싶습니다만 발표되는 신작시 중 그 80%가 시가 아니라고 본다면 어찌 생각하십니까? 마치 누룩을 두고 술이라 우긴다고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술은 비싼 술이 있고 싼 술이 있고, 도수가 높은 술이 있고 낮은 술이 있고, 한국산이 있고 외국산이 있고, 일하는 데 먹는 술이 있는가 하면 잔치하는 데 먹는 술도 있고 가지각색, 천양지차죠. 그러나 그것은 누룩이 아닌 술이었을 때의 문제! 그러니 어찌 시인된 자 시를 발표하거나 발표하기 이전이거나 겁먹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요? 전 바르작바르작 떱니다. 겁이 나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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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遠조기축구회에 공 차러 갔을 때 일입니다. 체구가 상당히 큰 친구가 공을 차는데 한 열 걸음도 안 뛰면서 공을 차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이 그 친구 발등에 자석의 쇠붙이처럼 붙어들고 정확한 패스로 공을 연결하는데, 그 시야마저 넓어 놀랐습니다. 해서 옆에 사람에게 물었죠. 대학 시절 선수권전에 출전한, 선수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 뛰어요 배는 나오고?”
술 먹고 몸이 망가져서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해서 물었죠.
“그럼 술을 줄이고 운동을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듣던 사람이 화를 내면서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더 올라갈 게 뭐 더 있다고 운동을 더 하냐고 하는 거예요. 술 먹고 놀면서 슬슬 하는 거지,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딜레마만 한 힘이, 아니 트라우마만 한 힘이 없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느리고 공을 못 차는 데다, 공 차는 건 좋아하고 해서 남 보다 일찍 나가고, 연습하고, 남이 하는 얘기 듣고, 고민하고는 했습니다. 요즘에는 게임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시합 전날은 술도 안 마실 뿐더러 가벼운 몸놀림을 위해서 살까지 빼려고 그러는데, 외려 핸디캡이야말로 축구로 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최근엔 공을 차다 다쳐서 축구를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겁났었습니다. 그런데 시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이르자 좀 부끄러웠습니다. 아프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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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 고민은 ‘시적 재미’란 것에 있습니다. 쓰는 사람이 무슨 낙이 있어야 하듯 읽는 사람(대상으로서의 독자라는 좁은 의미 말고)도 무슨 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를 즐기고 시를 찾아 읽는 사람들 말이죠. 이건 뭐, 펀(fun) - 전 그걸 ‘뻥’이라 읽습니다만 - 뻥조차 없는 시들 태반 아닙니까? 왜 재미란 것도 여러 가지 아닙니까? 슬픈 재미, 난해한 재미, 고독한 재미, 웃는 재미, 심각한 재미, 조용한 재미, 어두운 재미, 가벼운 재미, 쓸쓸한 재미, 억울한 재미 등등 많지 않습니까? 이 시 좋네, 하고 다시 읽게 되는 시가 드물어요. 그래서 저는 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죠. 내 시의 재미는 무엇일까. 내 시에는 시적 재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시적 재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시적 재미란 무엇일까. 어떤 지점에서 시적 재미는 구현되는가. 소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숫제 그냥 ‘재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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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자기딸딸이 얘길 했습니다만) 전 제 시가 마음에 듭니다. ‘나문재 뻘밭’, ‘행운목 뿌리’ 같은 이미지도 좋고 (내가 발견한 나만의 이미지만 같고), ‘사리를 풀어헤치는 첫술’ 같은 심각한 어떤 지점도 좋고 ‘국숫집엔 젓가락도 국수를 닮아간다’, ‘국수 먹는 모습은 뒤에서 볼 때가 좋다’ 같은 발견도 좋습니다. 우산살 같은, 형식도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 시를 자칭 ‘조리적 상상력’이라 명명한 적이 있습니다.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느낀 식의 시가 아닌, 주체 - 행위 당자인 조리사의 상상력, 여기서 제 시의 ‘시적 재미’와 ‘개성’이 나오지 않나 감히 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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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복이 많죠? 코너에 시도 실리고 이렇게 주절대는 기회도 오고 말이에요. 일 해서 돈도 벌고, 그와 관련해 시도 쓰고, 비전도 그 일에서 세우니 말입니다.
‘시는 다면체’ 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좀 방어적 성격이 강한 말입니다만 맞는 말씀입니다. 시는 다면체입니다. 그런데 좋은 시는 어느 측면에서 보나 좋죠. 부처님 똥구멍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부처님 똥구멍 쪽에 섰을 때야말로 앞쪽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클까요. 부끄러운 제 시도 부처님 똥구멍의 반의반, 아니 반의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무지한 제가 뭘 몰라서 드린 말씀입니다만-
<현대시학>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