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미늘/박주하

也獸 2013. 1. 15. 18:24

 

미늘

     박주하

 

 

당신의 명치끝에 방이 하나 있습니다

정작 당신은 그 방으로 오는 길을 모르고

슬픔을 세놓으려 한 적 없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방에 들어가

평화롭게 저물곤 했습니다

당신의 숨소리가 흰 띠를 타고 내려와

벽을 더듬거릴 때면

행여 내가 당신 몸속에서

너무 오래 살고 있진 않나

아락 눈물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출구를 봉한 내게

근심이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영원히 알아채지 못했을 그 방에서

오늘 새벽 세찬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귀를 허물며 들려오는 빗소리

그것은 당신의 울음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도 길고 무거웠으므로

나는 가만히 일어나 오래오래

온몸으로 번지 자줏빛 멍을 핥았습니다

육체는 운명이 아니라지만

몰락이 이리도 깊은 까닭에

나는 죽은 칼을 들고 천천히 일어섭니다

당신의 명치끝을

도려내야 할 때가 기어이 온 것입니다

 

시집 <숨은 연못>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