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이방인/박춘석

也獸 2013. 9. 17. 19:05

 

이방인

박춘석

 

 

이웃집 할머니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벌레 알집이 슨 상추로 밥을 싸들고 계셨다.

 

눈이 나빠진 게 아니라 몸 담았던 세상이 멀어진 게지.

세상 다보고 나면 눈이 먼다는 태초의 말씀에 닿았다네.“

 

할머니는 백내장이 낀 눈 속에서

무수한 풍경과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사는 듯했지만

밤이 되면 돌아누워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어.“

 

할머니는 늙은 연어처럼

입으로 바다를 거슬러 올랐다.

 

나는 곧 떠날 손님이야. 이제 눈, 귀를 열어

내가 가둔 것들을 다 풀어줄 때가 온 게지.

세상의 소리를 다 듣고 나면

귀가 먼다는 태초의 말씀에 닿았다네.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

내가 딛는 발밑은 평지였고 할머니가 딛는

발밑은 빙글빙글 소용돌이 방향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히 서서

몸을 빠져나간 생을 배웅하듯

대문을 나서는 내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고 계셨다.

 

*시집 나는 누구십니까?출간을 축하합니다.

*역시 내가 누구인지 묻는 일은 내가 내게 자문자답하는 것보다는 이처럼 타인을 통해 하는 것이 감동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시가 긴 것도 그 때문! 아무튼, 좋은 시집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