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미래에서 온 전설, 읽고

也獸 2015. 12. 2. 22:16

 

 

안필령의 『미래에서 온 전설』을 읽고

 

 

 

보통 우화 소설이라 할 때, 그 교훈성으로 인해 뻔한 결말이 보이므로 기분 좋은 선택을 하기 힘든 점이 있다. 더욱이 ‘자녀와 함께 읽는 우화 소설’이라 할 때, 그 동화적 속성이 예측되어 기대를 낮추어 책을 대하기 십상이다.

 

 

그런 마음을 한켠에 가지고 『미래에서 온 전설』을 읽어 나갔다. 그런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읽어 나가다가 급기야는 책에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 그 지점이 바로 페이지 51부터 였다. 아마도 내가 미리 좋은 느낌을 가지고, 편견 없이 책을 대했더라면 그 전에 줄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지점이 몇 번을 겹치자 그냥 보아서는 안 되지 싶어, 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줄 친 곳을 인용한다. 왜냐하면 이 무명 작가의, 그것도 우화 소설이라는 멍에까지 쓰고서 출간된 이 소설의 힘이 바로 이 인용문, 그에 담긴 묘사와 서정에 들어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발까랑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마치 알곡 거둬들인 들판을 찾아와, 머무를 곳 찾지 못해 휘돌고 있는 바람처럼 쓸쓸한 여운이 그를 감쌌다. 그는 착잡해진 마음을 긴 한숨으로 토해냈다. 별까랑의 모습을 바라보는 꼬까선도 마음이 아팠다. 극심한 가뭄에 마른 논바닥 갈라지는 듯한 아픔이 명치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p 51)

 

 

한참 동안 나무 그늘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지니 거대한 강줄기나 큰 산 하나가 비집고 들어선 느낌이 든다.(p 55)

 

 

별까랑을 보내고 나자 비로소 꼬까선은 자신의 가슴 속에 시간의 법칙을 벗어난 사랑이 자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간절함이란 이렇게 애타고 허전할 때 찾아오는 것일까.(p56)

 

 

화톳불처럼 은근하게 묻어 놓고 안으로 달구어 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가슴에 인삼꽃보다 빨간 뜨거운 사랑이 심어진 것만은 분명하다.(p57)

 

 

아빠 까치의 얼굴에는 소나기 내리기 직전의 먹구름 같은 수심이 가득했다.(p59)

 

 

배고픔의 슬픔은 감정 조절을 불가능하게 하는지라 왈칵 심장으로부터 물기가 차오르는가 싶더니 꼬까선의 눈으로 흘러내렸다.(p60)

 

 

과거의 기억은 색깔, 소리, 냄새, 느낌이 한데 어우러져 미릿속에 저장되는 법이다.(p68)

 

 

감나무 잎 몇 개를 넣어 김장을 하거나 밥을 지으면 뜨거운 여름철에도 밥이 상하지 않는다고 집집마다 뜰 안에 감나무를 키웠단다.(p69)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단 하나 사랑을 대신해줄 명약은 없었다. 배신의 상처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익모초처럼 쓰고 북극처럼 추웠다.(p78)

 

 

들녘이 아랫목에 장작불을 때 구들장처럼 뜨거운데 왕개미 일가족이 일렬종대로 일터에서 돌아오고 있었다.(p90)

 

 

산다는 것이 사찰 법당의 추녀에 달린 풍경처럼 작은 바람에도 울어야 하고 흔들려야 했다.(p93)

 

 

시의원 당선자들은 봉투를 받자 하나같이 입 가장자리가 염천의 소불알처럼 길게 늘어졌다.(p115)

 

 

그 시절 인간의 가슴은 햇빛에 데워진 강물처럼 늘 따뜻했단다.(p148)

 

 

어쩌면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을 그리는 그리움이라는 애틋한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p166)

 

 

마당은 마치 까만 콩을 깔아놓은 듯 개구리로 가득하다.(p173)

 

 

헉! 듣고 있던 손지영도 오천만 원이라는 말에 밤송이처럼 입이 벌어졌다.(207)

 

 

저만치 연한 황색의 꽃잎이 바람개비 모양으로 비틀어진 물레나물이 보인다. 이삭 모양의 흰색 꽃이 핀 까치수염이며 좁쌀풀, 메꽃, 배초향이 있다. 병아리처럼 샛노란 색으로 우산처럼 펼쳐진 마타리꽃 위에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있다. 보라색 종처럼 생긴 꽃이 대롱대롱 매달린 잔대 위에는 실잠자리가 앉아 있다. 서로서로 어울려 시샘도 탐욕도 없이 염천에도 꽃을 피워내고 있다.(p221)

 

 

여자의 가슴은 설날의 민속놀이처럼 널을 뛰고 있다.(p223)

 

 

마치 미릿속이 항아리에 가라앉혀 놓은 녹말가루를 휘저어 놓은 듯합니다.(p232)

 

 

총알이 빗발치자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께 동족들이 꼭지 썩은 과일처럼 맥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252)

 

 

현중만의 얼굴은 먹다 남은 라면 국물처럼 불그레하게 변했다.(p262)

 

 

웬만한 충격은 살찐 아랫배로 튕겨 가면서 살아온 그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p263)

 

 

모기 일가들은 간밤에도 포식을 했는지 아코디언처럼 주름 잡힌 배가 저마다 볼록하게 솟아 나와 있었다.(p280)

 

 

사랑이라는 그 숨 막히는 단어를 알게 해준 단 한 명의 존재요, 가슴 깊이 마음을 허락한 그다.(305)

 

 

소문은 빛의 속도보다 빠른 법이다.(p314)

 

 

다음 순간 그는 두 눈에 수많은 바늘이 찔러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p321)

 

 

최루탄 가스에 질식된 수많은 왕파리와 벌, 모기 떼들의 사체가 카펫처럼 깔려 그들이 걸을때마다 포장재로 쓰는 뽁뽁이 터트리는 소리를 냈다.(p322)

 

 

이제 신출내기인 안펼령 작가의 우화소설 『미래에서 온 전설』은 여러 한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서사 구성이 단단하지 못한 점이나 문장력이 약한 점이 그것이다.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강점은 따로 있다.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면에서 돋아난 부조의 골격처럼 그만의 개성적인 표현이, 그의 체험으로 녹아서 돋을새김 되어 있다. 그 돋을새김은 과거의 체험이 만든, 그만의 묘사로 나타났고 또 그것이 서정으로 녹아서 배면에 흐르고 있다.

 

왜 이 작가는, 무명의 신출내기는 이 소설을 썼을까, 하는 지점에 이르러 내가 확인한 것은 바로 이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가 밑줄을 쳐서 뽑아낸 이 묘사와 그 바탕을 이루는 서정을 말하려고 이 소설을, 우화라는 멍에를 쓰고도 써냈구나, 하는 그 확인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과거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 다시 복원할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애착, 이런 것이 소설을 미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호불호와 찬반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는 전문작가가 아니다.

외려 그 엉성함이 신선하게 다가옴은 왜 일까, 소설의 감동은 기법의 완숙함이나 능란 전개, 흠 없는 어떤 완성이 아니라, 그 바탕에 흐르는 기운의 신선함이 주는 감동이 아닐까 싶다.

 

우화 소설이라는 게 빗대어 인간과 세상을 풍자하는 것이지만 동물 세계에선 ‘인간 같은 놈!’이라는 말이 욕이라는 것이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우화를 넘어선 재미마저 있는 게 이 소설이다. 환경 문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왠지 거북하다.

일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