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 시집평/한용국

也獸 2016. 1. 16. 20:18

 

 

한정원 시집 『마마 아프리카』

윤관영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편지』

겹눈의 시학과 맛의 미학

한용국

시인

1. 사이-겹눈의 시학

 

한정원 시인의 『마마 아프리카』는 다성성의 울림으로 가득 차 있는가하면, 정밀한 고요로 집중되어 있는 시집이다. 시집에 드러나는 다양한 목소리들은 저마다 다른 화법을 빌려 한 편 한 편의 시들로 산란하며 산포되는 동시에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수렴되면서 시집의 근본동력으로서 긴장과 밀도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서에 “십 년 동안 나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던 어머니, 바닷가, 사막, 박물관, 외국어를 이제 잠시 놓아준다.”라고 썼다. 시인의 말은 바로 그 다성성의 울림과 정밀한 고요가 병치되는 역설의 기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마마 아프리카』의 시적 발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시적 밀도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려는 듯한 산문적 시편들이며 다른 하나는 시적 응축의 미학을 깊이 추구하는 시편들이다. 전자는 어머니와 바닷가, 사막과 박물관, 외국어(와 모국어) 속으로의 시적 투신의 결과물로서의 발화일 것이며, 후자는 그 투신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밀한 심연의 흘러넘침으로서의 발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화들의 사이-경계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없을까. 시 「선풍기 뒤가 궁금하다」는 바로 그 발화의 경계를 보여주는 시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용했고

그쪽은 바람이 불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고

그쪽은 휘날리고 있었다

삼백육십 도 회전할 수 없는 선풍기의 뒤쪽

움직이지 않는 척 바닥에 포복하고 있는 곤충이었다

접착제였다

그쪽은 천 리 만 리 길을 날아갔고

르네 마그리트의 구름을 잡았고

이백칠십 도로 돌아다녔다

나는 머리 자르고

긴 지구의 시간에 물을 주었다

테이프는 누에처럼 긴 가닥을 늘어뜨리며

햇볕 아래 누워 직각의 범주에서 배설물만 쌓아갔다

모래 화분에 자른 머리칼 묶음을 심고

아프가니스탄의 소녀처럼 남자가 되었다

내 이름을 불러본지 오랜

나를 그냥 내버려두는 세상이 고마웠다

선풍기 뒤쪽의 고요한 그늘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바람은 아직 불어오지 않았다

척추를 곧추세우니

손이 자유로워졌다

- 「선풍기 뒤가 궁금하다」 전문

 

선풍기 앞의 세계가 시인이 팔베개를 해야만 견딜 수 있었던 십년의 시간이라면, 선풍기 뒤의 세계는 그 팔베개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적 자의식이 웅크려 있는 공간일 것이다. 바람이 불고 휘날리는 쪽은 “천 리 만 리 길을 날아갔고/르네 마그리트의 구름을 잡았고/이백칠십 도로 돌아다”니는 동물성의 세계다. 하지만 선풍기 뒤쪽은 “포복하는 곤충”이거나, “접착제”의 형상으로, “머리 자르고/긴 지구의 시간에 물을 주”어야만 견딜 수 있는 식물성의 세계다. 그 뒤쪽의 세계에서 시적 화자는 “배설물만 쌓아”가는, 또는 “모래 화분에 자른 머리칼 묶음을 심고/아프가니스탄의 소녀처럼 남자”인 분열증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내 이름을 불러본지 오랜/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세상이 고마웠다”는 체념적 상태를 자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결국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웅크려 있던 공간을 확인하는 일을 선택한다. 그 확인의 결과는 희망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바람은 아직 불어오지 않았다” 아마 “척추를 곧추세우니/손이 자유로워졌다”는 진술은 시인의 앞으로의 시의 방향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이 시집에서 그 암시를 미리 드러내고 있는 시편이 있다면 바로 시 「식물성 신문」이다. 시인은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문지 더미에서 새싹이 돋아나다니/연둣빛, 연분홍, 무순 같은 심장들이/신문지와 내통하고 있었다니”

 

나사가 빠진 안경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안경점 주인을 떠올리네. 왜 그가 돋보기안경은 두 개 이상을 맞춰야 한다고 우겼는지 이제야 알겠네. 나사 빠진 안경다리 연결 부문 구멍이 보이질 않네.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하나. 돋보기안경을 써야 다른 돋보기안경의 다리도 보이고 뒤틀린 입구도 보이고 렌즈의 지문도 선명히 들어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안경 하나가 망가지고 나서야 왜 나에게 또 하나의 안경이 필요한 건지 알겠네. 망가진 안경을 고치기 위해서 잘 보이는 시력 하나 더 필요한 것을, 먹먹했던 시간을 깨닫기 위해 또 다른 사막을 건너온 시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이가 빠진 시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둥그런 햇살 그 뒤편 묽은 유약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겠네.

- 「두 개의 안경」 전문

 

 

시 「선풍기 뒤가 궁금하다」가 사이-경계의 공간적 표상을 보여주는 시라면, 인용한 시 「두 개의 안경」은 그 시간적 표상을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돋보기안경에서 나사가 빠져 달아나는 사건에서 얻은 깨달음을 진술하고 있다. 안경점 주인은 돋보기안경은 두 개를 맞추어야 한다고 우겼지만 시적 화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나사가 빠져 버렸을 때에서야 안경점 주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경 하나가 망가지고 나서야 왜 나에게 또 하나의 안경이 필요한 건지 알겠네” 그렇다. 시력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돋보기안경이었지만, 그 돋보기안경이 고장나버렸을 때, 필요한 것은 다시 잘 보기 위한 돋보기안경이지, 순수한 눈의 시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시적 화자는 “먹먹했던 시간을 깨닫기 위해 또 다른 사막을 건너 온 시간이 절실하다는 것을”이라는 성찰을 얻는다. 이 시에 드러나는 것은 앞의 시 사이-경계 공간에서 시인이 보여준 극적 인식의 전환이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자기 구원을 위한 노력마저 훼손되어 버렸다 할지라도 결국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현재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먹먹했던 시간”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또 다른 사막을 건너 온 시간”의 상처가 다시 필요한 것이다. 훼손된 시간을 다시 훼손된 시간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아픔과 아픔의 겹눈 사이에 시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집 『마마 아프리카』는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노마드적 유목의 행로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의 과거에서 어머니, 그리고 인문학과 하이퍼 제국의 삶 사이를 오가는 그 행로는 단순한 유목이 아니라 고행을 스스로 짊어지고 떠돌아다니는 방황에 가깝다. 시인은 박물관에서 “동사動詞를 끌어올”리고 나서 “Be 동사만으로도 수련이 피어오르던 날”을(「동사를 불러오다」) 그리워하며, “바다를 왼쪽으로 끼고 걷는 당신과/부딪쳐야”(「길에 관한 습관」) 했던 날들을 아파하고, “이 세상 모든 바늘은 낙타를 만나려고 사막에서 빛나고 있”는(「조침문」)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 견딤의 힘은 ‘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마저 시인의 “손가락에서는 발톱이 돋아나”는(「파적-키스 헤링을 위하여」) 기형의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시인은 “나는 이해받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에/설명을 해야만 했기에/새들이 늦은 밤이면 몸을 던지는 이유를/물어야”(「해변 없는 바다」)하는 삶을 시로써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해답은 영원히 유보될 것이고, 여전히 시인은 새들이 늦은 밤이면 몸을 던지는 것을 바라보며 한 편 한 편의 새로운 시들을 써내려갈 것이다.

 

 

 

2. 오후 세시의 쌀 씻는 손

 

 

시간에는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이 있다. 객관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며 어떤 기준에 의해 계량화된 시간이다. 주관적 시간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체험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객관적 시간에 의거하지만, 그에 반해 재구성되기도 하며, 아예 그 속성으로서의 흐름을 거부하기도 한다. 윤관영 시인의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편지』의 주무대가 되는 ‘오후 세 시’는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을 횡단하는 시간이다. ‘오후’는 오전과 대비되는 객관적 시간에 고정되지만, ‘세 시’라는 시간은 그 객관적 시간의 흐름에 어떤 패임과 고임을 만들어내는 시인만의 주관적인 시간으로 현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시의 시간의식에서 ‘오후 세 시’는 그리 조명 받지 못한 시간이다. 아마 ‘정오’ 또는 ‘오후 네 시’, ‘오후 여섯 시’ 경의 시간들이 현대시사 속에서 다양하게 의미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앞에 나열한 시간들은 의미 부여에 적합한 상황을 그 자체로 거느리고 있었다. 오전과 오후의 분기점이 되는 정오는 일종의 첨예함을, 오후 네 시는 어떤 나른함과 권태에 적당하였고, 오후 여섯 시는 저녁이 시작되는 낭만적인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후 세 시는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의식하지 못한 채 금방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레스토랑의 브레이크 타임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이 시집의 제목은 이렇게도 가능했다. “breaktime pm 2:00-4:00” 어쩌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윤관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오후 세 시에 시적 의미를 부여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애매한 시간 오후 세 시는 윤관영 시인에 의해서 주방이라는 시적 공간을 얻으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적 정서를 환기하기 시작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대부분은 그의 실제 생활체험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시인의 지인들은 거의 모두 알다시피(페이스 북에서도 유명하다) 시인은 망원동에서 ‘부자 부대찌개’라는 식당을 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그 맛을 알 수는 없으나, 풍문에 따르면 이른바 맛집 반열에 오를만한 맛을 자랑하여 손님이 들끓으며, 특히 시인묵객들에게 환영받고 있다고도 한다. 시인들의 직업을 따지자면, 정말 천차만별이어서, 국회의원에서 일용직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중 드문 직업 중의 하나가 요리사가 아닐까 싶다. 비록 전문적인 요리사는 아닐지라도 밤새도록 언어를 조탁하는 정성으로 재료들을 손질하고 양념하여 끓여내는 부대찌개가 맛이 없을리는 만무한 법이니, 그 인기는 짐작할 만하다.

 

다시 오후 세 시의 시간으로 돌아와 보자. 오후 세 시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나른함이 시작되는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간이다. 하지만 주방에서라면 달라진다. 점심시간까지의 장사를 끝내고, 이제 저녁 손님을 맞기 위해서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정성스럽고도 활기찬 노동의 시간인 것이다. 윤관영 시인은 그 시간들을 단지 노동으로만 흘려보내지 않고, 음식 재료를 다듬고 섞어 무치고, 육수를 준비하는 동안, 가슴 속에서 삶의 언어들로 치환시키고, 버무려, 해학적이고 감동적인 시편으로 직조해 냈다. 시인은 요리와는 거리가 먼 종류의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윤관영 시인의 첫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의 뒤의 자세한 약력에 보이는 ‘리어카’ 노동과 및 현장노동운동에 대한 진술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첫시집에 실린 시 「밥, 밥, 밥」에는 그의 음식에 대한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이 시집의 시편들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밥솥을 양 발바닥에 얹고/김치와 콩장과 멸치에 김치 멀국을 부어/건듯 저어 먹는 밥은/저붐이 필요 없다/비빔밥은 맛이 아니고 그 종합이다/고마움에는 미각이 없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맛은 음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람 살이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시집의 요리 관련 시편들에도 그 맛의 미학은 이번 시집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쌀알을 손가락으로 살살 젓던 손이었다

쌀눈이 떨어질까 겁내던 손이었다

치대는 것의 의미를 알기까지

긴, 손가락이었다

쌀이 밥물을 빨아들여

스스로 불리는 그 시간

짧으나 긴 시간,

느끼는 손이었다

담근 쌀에 오른손을 얹어

비난수 하는 손이었다

세상의 모든 내를 덮는 쌀 익는 밥 내

그 김을 만질 수 있는 손이었다

굴뚝 연기가 하늘에 닿는 길을 열 듯

밥김으로 지붕을 얹고

연기에 나는 눈물조차 뜨물을 닮아가는,

쌀눈을

물의 손금을 닮아가는,

 

 

솥 같은 손이었다

 

 

- 『손이 된, 손이었다』 전문

 

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시편에서 우리는 또 하나 아름다운 손을 만난다. 흔히 음식맛은 손맛이라고들 한다. 양념을 치대고 비비는 가운데 음식에 배는 맛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손맛은 찬에 해당하는 것이지 밥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위에 인용한 시에서 그 손맛에 새로운 손맛을 하나 더 얹는다. 밥을 하기 위해서 쌀을 씻어 앉히는 과정 속에서 시인은 손에 한 사람의 일생을 얹어 놓는다. “손가락으로 살살 젓던 손”, “쌀눈이 떨어질까 겁내던 손”이 “치대는 것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단 삼행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었을 오랜 신산의 세월을 함축해 낸다. “쌀이 밥물을 빨아들여/스스로 불리는 그 시간/짧으나 긴 시간,/느끼는 손”에서는 그 세월을 견뎌낸 뒤의 원숙미가 느껴지고, “담근 쌀에 오른손을 얹어/비난수 하는 손”에 이르러 기도의 깊이를 가진 손의 아름다운 무게를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내를 덮는 쌀 익는 밥 내/그 김을 만질 수 있는” 손에 이르면, 마치 어떤 부드럽고 큰 바람의 손이 있어 우리의 고된 삶을 쓰다듬어 주고 있을 것 같은 위로의 마음마저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윤관영 시인에 이르러 한국시는 ‘머리를 짚어주던 손’, ‘배를 쓰다듬는 손’, ‘목욕시키는 손’으로 표상되던 삶의 근원으로서의 모성성의 상징적 표상에 새롭게 “쌀 씻는 손”을 하나 더 얻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그의 주방시편들에는 요리의 재료들을 통해 삶의 통찰과 깨달음을 드러내는 시들로 가득하다. 이런 류의 시들이 쉽게 떨어지기 마련인 상투성을 그의 시들은 허락하지 않는다. 시의 소재가 되는 음식재료들을 손질하는 과정이나 조리과정들은 그대로 생생한 육체성을 부여받는 동시에 시인의 삶, 또는 일상과 생활의 자장 속으로 스며들며 진폭을 확장시킨다.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맛의 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맛을 아는 나이가 있다/아려도 생무가 좋은 나이/무 냄새가 좋은 나이//조림 무를 넘어,/무말랭이를 넘어/무청 김치맛을 아는 나이가 있다”(「나이에는 테가 있다」)처럼 시인의 맛의 시학은 일상적 삶에서 깊이 우려낸 유머와 고단한 삶에 버무려지는 해학들로 가득해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이 시집은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차려진 시의 진수성찬이라고 말해도 손색없다. 다른 서평들처럼 시의 구절을 토막 인용하는 일은 잘 버무려진 시집의 맛을 떨어뜨리는 일 같아서 하지 않는다. 음식은 그렇게 먹는 법이 아니다. 윤관영 시인의 시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시 만큼은 부분적으로나마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윤관영 시인의 맛의 시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일 듯하기 때문이다. “달군 쇠 봉을 육수에 담가,/잡내를 태운다는 것인데//급소가 없는 물이지만/이 쇠 봉이 육수를 잡아채 환골탈태시킨다는 것인데//맛을 내는 것보다/맛을 없애야 하는데//침 맞은 육수는 정사 후의 나른함처럼/힘 뺀 맛을 보여준다는데”(「물의 혈을 짚다」) 그렇지 않은가. 맛을 내다보면, 끝내는 맛을 없애는 경지에 이른다는 역설의 미학, 어쩌면 윤관영 시인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내놓은 해답인지도 모른다.

 

 

<미네르바> 겨울호

 

한용국_200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