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집 엿보기/자전해설/오후 세 시의 주방편지/윤관영
오후 3시의 주방, 편지
울 누부야!
늘 ‘가뇽 시인’, 하고 불러주는 울 누부야.
『현대시학』 7월 호에 시 두 편을 발표했었어요. 다 작파하자는 심사였는데, 울 누부야는 모르는 체 위로해 주었죠. ‘금분세수! 이제 봤어요 막 날아다니는 문장들!! 좋습니다.’
文과 武가 무에 다르랴. 원이 크다면
금분세수를 하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詩人 윤관영은 『어쩌다, 내가 예쁜』(황금알, 2008)과 『오후 세시의 주방편지』(시로여는세상, 2015)를 내려놓습니다. 비급이랄 것도 아니어서 부끄럽습니다. 생각커니, 나의 독문은 생존이 준 손금이었고, 애병은 食刀였습니다.
저는 지금 전골냄비에 손을 씻습니다.
作亂으로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저 좋아 못 살겠는 詩 내려놓기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과히 사랑해서 내려놔야겠습니다. 그게 지랄입니다. 기록을 거절당한 제 초식이 부끄럽습니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나마의 성과를 넘어설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타개의 길은 보이지 않고, 전, 지리멸렬이며 지지부진입니다. 시마에도 들지 않는 걸 보면 전, 진짜가, 아닌, 모양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사랑은 진부합니다. 쓰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믿고 싶습니다. 내려놓자니, 달아오른 냄비를 쥔 듯 겁이 와짝 납니다. 시를 목숨으로 사랑해 키스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시의 거웃이라도 하나 뽑아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겁 많은 좀팽이였습니다. 허나 이 지지부진과 지리멸렬을 감춘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쓰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는 저를 미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文林을 향해 소리쳐 봅니다. 시야, 보지 껌 씹는 소리 말고 꺼져라!
청탁하는 어리보기 편집자는 없겠지요? 상 주신다면 금분세수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으로 알고, 달게 독주를 마시겠습니다. 원이 있는 자, 얼른 오시오. 금분세수를 한 자는 죽일 수가 없소. 나는 줄행랑을 치오. 시여, 좆 까라!
문과 무가 무에 다르랴!
누부야! 내가 시인이 아니라면, 뭘까? 뭘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인이 아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내 생에 시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시 외에 어떤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별 다른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작금의 내 상황은 자못 당혹스럽다, 누부야.
그 대단한 걸, 대단하다고 믿었던 걸, 내 전부인 것 같았던 그 것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고 보니,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상이 객관화된다, 누부야.
아침에 식당 나갔다 밤 11시에 집에 들어왔어요. 쉬는 날도 없이 만날 반복이지요. 잡지가 와도, 시집이 와도 목차는 차지하고 봉투 뜯어서는 비닐과 종이를 구분해서 버리기도 바쁘네요.
이 지리멸렬의 날들!
모리카와 조지의 만화 『The Fighting』에 보면 현장 일을 하는, 가난한 권투 선수가 나와요. 재능이 있지만 그의 몸은 권투에 맞는 몸이 아니고 현장 일에 다져진 몸인 거죠. 최선을 다 한 경기에서 가격을 당해 그 몸마저 최선을 다해 무너지죠. 무너지는 속에서도 여동생의 간곡한 기원을 떠올려 버티다 더 맞고 - 아무래도 전, 시와 멀어진 몸이 된 것만 같아요. 그저 졸립고, 쉬어야 된다는 생각 외엔 없습니다.
그런데, 누부야! 한 누이께 편지가 왔습니다.
윤관영 선생님
시집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펼쳐 놓고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절절하고 질깃한 언어의 짜임들을 다시 만져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있어 늦게서야 시집을 열었어요. 첫시집 때도 참 좋은 시인이 있었구나 했는데 -
한국어의 질감이 이리 톡톡하고 유연하다니요. 그리고 건너 뛰면서 그 긴 길을 한 걸음에 가는 - 그러면서도 그 곡절이 다 꿈틀거리며 살아오르는 - 내용의 진실함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 이런 문법들의 신기함에 많이 머물러 배웠어요. " 도끼같은 한 방" 충분합니다. "소의 멍엣살을 주무르듯 내가 나를 쓰다듬어야하는 저녁" - 세상에 못견디게 아픈 것들과 나를 섞어가며 여름 저녁 나절을 서럽게 즐길 빌미를 충분히 주었으니-
이준규의 해설도 너무 부럽네요. 윤관영이라는 사람의 맛이 진하게 오래 우러나온 국물의 글 - 그가 끝머리에 들어올린 큰 고기덩이 <손바닥 같은 꽃잎이> 잠잠하고 먹먹합니다.
축하드려요. 이 묵직한 관찰과 맘 먹지 않은 산뜻한 전언과 비애의 뜨끈한 요리 한 상의 향연을-
누부야! 내가 여적지 쓰고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고는 있다만, 난, 여전히 지리멸렬이고, 지지부진이고, 안적도 내 시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누부야! 누부야!
<시에>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