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두고 온 저녁/김명기
오래 두고 온 저녁
김명기
똥탑이란 말 아시는지
나 살던 광산촌 사택은
유안히 짧은 겨울 햇살이
더 이상 산비알 아래로
내려서지 못하면
금세 찾아들던 긴 엄동설한
깨진 유리창 대신 거북선 선명한
비료포대 펄럭이던 겨울 공동변소엔
누군가 가져다 놓은 5파운드 곡괭이 자루
공든 탑을 정성들여 한 층 한 층 밀어 올리듯
아버지 똥 위에 아들 똥이 그 위에 엄마 똥이
차곡차곡 쌓이며 꽁꽁 얼어가던, 그래도
대통령 얼굴 나온 쪽으로 뒤 닦으면 큰일 난다는
아버지 말씀 따라 달빛에 구겨진 신문을 이리저리
비춰 보다 탑의 꼭대기를 가늠해 보다
도저히 쌓아 올릴 자신이 없으면
사정없이 곡괭이 자루로 까부수던 저녁
이 땅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탑을 쌓고
부수던 시절, 필요하다면 사람마저도
다 때려 부숴야한다고 그땐 알지 못했던
대통령 긴급조치 몇 호를 기다리며 똥 닦던 저녁
*이런 시를, 전염성이 강한 시라 하는 거 같다. 나의 과거를, 과거 체험을 고스란히 불러온다.
군대 시절에 그 이름이 ‘똥탑’이라 불리는 걸 알았다. 배변하는 자리가 일정하다 보니, 그것이 얼어서 올라왔다. 그걸 기억하는 내 기억엔, 처음 이라는 것, 쫄병이라 강제로 해야 했다는 것, 뭐 그런 거다. 똥탑은 잘 안 깨졌는데, 그것이 동일한 장소에 똥을 떨어뜨리면 수직으로 금방 똥탑이 올라오니까, 약간 비껴서, (나 같은 경우엔) 최대한 옆으로 비껴서 똥을 쌌다. 그러면 똥은 그 탑의 일부에 부딪치면서 묻히고는 흘렀다. 그러니까, 그러한 밑바탕을 이루며 올라온 똥이, 그것도 얼면 돌 이상으로 단단했다.
김명기 시인의 똥탑이 긴급조치 시절이었다면, 당시 나의 똥탑은 얼지는 않는, 항아리에서 퍼지는 똥탑이었다. 항아리의 똥은 퍼졌고 탑을 쌓지는 못했지만 금방 찼고, 그래서 항문을 찔렀다. 조금만 힘을 빼면 눈 똥이 똥꼬를 찌르는 상황이었다. 똥똥똥!
나의 하꼬방 시절과 광산촌 시절이 검게 겹쳐진다. 검은 루핑의 집과 검은 개울, 그리고 부평역의 석탄 산!
김명기 시인의 좋은 시로는 『피항』이 좋다. 내겐 그렇다. 그렇지만 첫시집의 강렬한 오오츠크해 경험시에 비하면 좀 걸러진 듯한 시다.
내겐 아래 시가 좋다. 교묘하게 副詞로 이어진, 절창의, 사랑의 시다.
문득
김명기
곡우 무렵 내리는 옅은 비처럼
문득 나를 적시는 당신
혹시 당신 없는 동안 다 말라 버린 내가
쩍쩍 갈라지는 불모지라도 될까 싶어
어디 먼데서 문득이 되어버린 사람
순간 나는 당신이 울대 너머로
마른 눈물조차 꾹꾹 밀어 삼키던
그때 그대로이길 바라는
부디가 되는데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발이 되어
한 번도 한 적 없는 허튼 맹세라도 하고 싶은
당신
한때 내게 그렇게 불리던 사람
숨 쉴 때마다
정교하게 털썩대는 늑골 사이
안으로 내 안으로만 드나들던 가느다란 숨소리처럼
그저 내밀하기만 했던
*시보다 어머니, 김금자 님의 표사글이 좋고 또 와닿는다. 이런, 표사글은 보지 못했다. 명기는 좋겠다.
시집 상재,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