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집 이후 발표한 시

식당3 외 4편/윤관영

也獸 2018. 9. 18. 23:41

 

 

식당 3 외 4편

 

 

명함이 공손하다

사장님, 힘 내세요

 

무르팍 구부리고 앉아 명함을 받든다

비질에도 잘 밀리지 않는다

 

많이 힘드시죠

잘 집히지도 않는다

 

가려운 델 잘 안다

버리려는 마음조차 안다

 

셔터를 뚫는, 총천연색 명함이 내린

그런 아침이다

 

명함은 명함으로 받아올린다

든 채, 셔터를 올린다

 

 

 

 

 

 

 

 

 

 

 

 

 

 

 

 

 

 

 

 

 

식당 4

 

 

신정레저관광이 지나갔다

신점례가 반사된 유리에 반짝했다

반사적이다

자개 소반에 라면을 먹다가

상을 내준 방순 누이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나란 놈은 이리 표피적이다

일회용이다

어머니께 전화 한 번 드리려다

초저녁 잠 깨울 것 같아 번번히 못했다

그리 그리, 그러니까 그렇게 그냥

반복되어, 지나간다

반복이야 말로 DNA 아닌가

남쪽에서 온 연통을 받고는

한번 가겠다는 가당찮은 말을 했다

황송은 그때뿐이다

그렇게 하고는 잊는다

외곬이 아니고 잡다하다

깊이라고는 없다 곰삭는 게 없다

은사께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고는,

그게, 해를 넘긴다

아무래도 내 그리움은 가짜다

진국은 무슨, 개고기 같은

나도, 날 못 믿겠다

뉴스를 보다가 꽃구경이 생각나는 판이니,

심각도 중독 지경이다

 

한마디로 한심한 나다

한마디로 잡스러운 종합이다

 

 

 

 

 

 

 

 

 

 

식당 5

 

 

 

년 내내, 밥을 푼다

하루에, 서너 차례 푼다

밥내가 몽롱하다

주걱질이 순해진다

밥은 격하게 풀 수가 없다

밥내는 흥분을 가라앉힌다

밥물 맞추는 손등이 순해진다

다지고 자르고 볶던 손이

여기서 여과가 된다 숙는다

하루 적이나 세 차례,

십여 년간 밥을 푸면

죗짐의 손이 순해진다

손등의 핏줄조차 고분고분해진다

손이 시려워 곱은 자세로

원래의 자세로 손이 돌아간다

밥을 푸면 밥내에 취해

밥을 안은 식곤증처럼 제물에

제가 제게 관대해진다

곱은 손이

제 허벅지를 고마워

쥔다

 

 

 

 

 

 

 

 

 

 

 

 

 

 

 

식당 6

쌀을 물에 불리듯

 

 

어수라 불리는 손이 있다

물과 살아

손등이 어복 같다

 

물에 불은 손

쌀을 치대는 손이 구부정하다

손톱으로 쌀알을 느낀다

 

손톱 밑살로 밥알 하나를 느낀다

어수

수제비를 닮고 갈퀴, 국수를 닮고

,

 

주먹밥을 닮고,

먹는 입을 닮아

먹이는 손, 선뜻

 

악수를 주저하여 즤끼리 잡는

그런,

손이 있다

 

 

 

 

 

 

 

 

 

 

 

 

 

 

 

 

 

식당 7

싸릿골 식당

 

 

 

온다간다는 말이 없었다

인감도장이 놓여 있었다

 

싸리낭구 있는 데선 똥도 싸지 마라

지뢰가 묻혀 있다

 

설 설, 싸리는 크지 않고 퍼졌다

그나마 크면 잘라 비를 만들었다

 

실핏줄처럼 퍼져 식당 담벼락 화단을

금 가게 밀어낸 싸리

 

지뢰는 녹슬어 가슴에 자라고 있었다

주목나무색 도장은 립스틱이었다

 

종내 돌아올 키를 두고 갔다고

믿는 사내, 도장의 봉인을 해제 하면

 

얼레지 같은 속이 비죽 올라왔다

마음은 엉켜 뿌리 같지만

 

잘라도 잘라도 올라와 핀 꽃은 있었고

그는 밑동을 X자로 묶어 대비를 만들었고

 

쓸고 또 쓸었다 그 식당은 그래서

늘상 대빗자루가 먼저 손을 맞이했다.

 

 

 

 

 

 

 

 

 

 

[시인의 말]

 

*

공포는 그 척추에 시간을 내장하고 있지. 그 시간은 진행이 안 되거나 더디기에 공포스럽고, 그 진행이 안 읽히기에 더 공포스럽지. 그러니까 공포는 나눌 수 없기에 공포지. 공포도 진짜배기는 나 눌 수 없어. 하기사 나눌 수 있는 따위가 공포겠어.

 

침을 삼키며 무슨 터부를 건드린 듯 사내는 말을 더듬었다.

 

*

죽음은 당면한 자의 것이 아니면, 그 슬픔은 공유되어지지 않아. 이상하게도 전염된 연민조차 발생이 잘 안 되지. 게다가 그 놈의 죽음이 아직은 내 것이 전혀 아닌 것 같다는 문제가 더 문제지. 조금일망정, 내 것으로 여기려 해도, 그 시도는 가소로운 것이 되지. 당면한 자의 어떤 절박은 그 일부의 일부조차 느끼지 못하지. 곧 죽을 병자가 곁에 있다고 해도, 그건 그런 불행한 일이 현재화 된 것이지, 나의 일은 아니지. 핏줄조차 그 절박을 나눌 수 없지.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한 그것은 공감하는 뉴스의 한 화면 같은, 저 편의 일이지.

 

사내는 죽음이 내 것으로 당면해도 설마 설마 하면서, 미루고 믿을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이라고 덧붙였다.

 

*

, 죽음은! 제가 늙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인간이지.

사내는 비비꼬인 심술보를 가진 사람처럼 말했다.

*

시인은 특이한 존재야. 제가 체지방 같은, 잉여의 존재라는 걸 모르지. 쓸데없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 자존감에 취해 하고, 거기서 가치를 또 몹시도 과하게 느끼지. 하나도 팔리지 않는 시집(한 권도 팔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을 발간하고, 또 그것을 사서 돌리고 배송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거기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행태는 거지반 대동소이하지.

 

당신은 지금 꺼리고 미적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또 시집을 내겠지, 종내는. 달라진 시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또 그래 봤자 별반 달라진, 달라질 것이 없다는 현실을 절감하고는 있겠지만 …… 그런 고민이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경로로 시집을 내고 그 반복을 하겠지. 고민을 해도 그 짝, 그 틀을 벗어나진 못할 테지.

 

노골적으로 이죽거리는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사내는 말이 없다.

 

*

진짜 공포는 공포를 못 느끼고 안 느끼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는 거야.

사내가 대꾸조차 없다.

 

*

세상은 망해가고 있어. 취직이 목적인 세상이 오다니, 죽기 전까지 다닐 수 있는 안전한 직장이 꿈이라니, 이거 안전하게 죽자는 게 목적 아니야?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

공부 좀 하려니까 눈이 안 좋아지는 몸이 되고, 시 좀 쓰려니까 상상력이 굳어진 몸이 된 상태이고, 소란 떨고 털고 일어나기엔 면구스럽고 자신없고……

 

*

그렇소, 난 꼴 나게 잘하는 게 없소, 크게 관심이 가는 것도 없소, 그래서 이러고 있소, 다른 할 짓도 없소, 그렇소, 진부해도, 지지해도, 뭐 딱히 할 게 없소, 낙인이 찍혀 진저리가 쳐져도 딱히 자동으로 하는 짓, 하고 있는 짓이라고 이러고 있는 것밖에 없소, 詩詩그하게도 그렇소,,,,,,,,,

 

 

 

 

 

 

 

 

 

 

 

 

 

 

 

 

 

 

 

 

 

 

 

 

 

머물면서 떠나는, 침잠하면서 초월하는 형식

현순영

 

 

 

1. 윤관영 시인의 식당 연작시

 

윤관영 시인이 식당에 일련의 번호를 붙인 제목의 시들을 보내왔다. 나는 이 시들을 식당 연작시라 부르려 한다. 그리고 이 시들이 연작시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려 한다. 윤관영 시인이 예전에 쓴 연작시들도 있다. 그가 펴낸 두 권의 시집에 실린 다음과 같은 시들은 연작시이거나 연작시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윤관영 부르기, 윤관영 부르기2, 윤관영 부르기3, 윤관영 부르기4, 정물2, 정물3, 풍경4. 그런데 이 시들보다 이번 식당 연작시가 더 연작시답다. 일단, 시의 편수가 많다. 그리고 이전의 시들에 비해 식당 연작시에서 시인의 훨씬 길고 깊은 호흡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시인이 식당 연작시를 당분간 계속 쓸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사실이다.

연작시란 어떤 시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일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비슷한 작품들을 모으고 추상하여 연작시의 개념을 도출해야하기 때문이다. 흔히 연작시는 하나의 주제 아래 서로 다른 제목과 형식으로 여러 편을 쓴 시라고 정의되고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은 연작시들도 있다. 연작시를 성립시키는 것이 시편들의 주제의 동일성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아가, 시인들은 왜 연작시를 쓰는가? 이것은 더 어려운 질문이다. 시인들의 창작 의도를 밝히는 일은 시인론의 핵심이면서도 늘 오류가 되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왜 연작시를 쓰는가?’에 대한 답은 우회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즉 시인들의 시 세계 또는 시적 여정을 염두에 두고 연작시의 의미나 예술적 효과를 근거로 삼아 그들이 연작시를 쓰는 일의 의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윤관영 시인의 식당 시편들은 주제가 같지는 않지만 모두 동일하게 식당이 공간적 배경이라는 점에서 연작시를 이룬다. 물론, 그의 시편들에서 식당은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의식 속 필드(field)이기도 하다. 윤관영 시인은 지금 식당 연작시로써 그가 식당이라는 공간에서 경험한 감정과 인식을 지속적으로 시화(詩化)하는 과정중에 있다. 그렇다면, ‘식당 연작시는 윤관영 시인의 시 세계 또는 시적 여정에서 어떤 예술적 효과를 발휘하며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윤관영 시인은 식당 연작시를 통해 일의 공간주방짬의 공간쪽문 밖식당이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해 나가고 있다고.

이 대답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윤관영 시인의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대조하여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나는 직립이다에 기댄다면, 첫 시집에서 윤관영은 일을 인간이 되는 계기로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생략)두 번째 시집에서 일은 주로 식당 주방 일이다. 미리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일을 고독조차 잃게 되는 계기로 인식한다. 사내에 그런 정황이 담겨 있다. (생략)그런데 고독은 낭만의 거처다. 낭만을 시심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그에게 일은 결국 시심이 소외되는 계기다. (생략)

일에 대한 윤관영의 인식이 변한 까닭을 밝히는 것은 섣불리 덤빌 수 없는 좀 더 본격적인 시인론의 과제다. 다만, 그가 일을 달리 인식하여 그의 일의 시가 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의 첫 시집에 실린 일의 시들은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으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일의 시들은 그렇지 못하다. 즉 지난날 윤관영에게 일과 시는 하나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일과 시는 둘 다 윤관영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다시 일의 시간과 시의 시간을 일치시켜야 할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과 시의 합일이라는 비전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관영은 역설적이게도 두 번째 시집에서 짬의 시로서 그 과제를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짬의 시는 시인이 짬에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시다. 짬이란 일을 하다 잠시 멈춘 사이다. 짬은 일에 따라, 일은 짬에 따라 달라진다. 일과 짬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짬은 일의 부분이며 연속이고 이면이다. 짬은 일이다. 서둘러 말하자면, 윤관영은 짬에 고독을 되찾아 딛고 마침내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기에 이른다. 자신과 세상의 연결, 자아와 세계의 합일은 시의 본질이다. 요컨대, 윤관영은 두 번째 시집에서 일이기도 한 짬을 시의 시간으로 만든다.

 

문제는 고독이었다. 윤관영 시인에게 고독은 낭만의 거처였으며 낭만은 시심(詩心)이었다. 일의 공간인 주방 안에서 시인은 고독을 대면할 수 없는 절망적 고독의 상태에 놓이곤 했다. -“절망적 고독은 낭만 또는 시심의 거처가 아니다. 그냥 고독이다.- 그나마 시인은 짬의 공간인 쪽문 밖에서 고독을 되찾고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짬에 쓴, 짬에 대해 쓴, 짬의 자신에 대해 쓴 시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밥에 뜸이 드는 시간이면, 손바닥 같은 꽃잎이와 같은 작품들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짬의 시로서 일과 시를 일치시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의 시들은 본질적으로 완전한일의 시, 일과 시를 완전히합치시킨 시들은 아니었다. 짬이 일의 부분, 연속, 이면이라고 해도 그렇다. ‘주방쪽문 밖이 시인의 의식 속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한, 짬의 시가 완전한일의 시는 될 수 없고 일과 시는 완전히합치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겐 일의 공간인 주방과 짬의 공간인 쪽문 밖을 하나로 통합해야 할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는 셈이었다.

나는 윤관영 시인이 식당 연작시를 통해 그러한 시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방과 쪽문 밖이 하나로 통합되는 공간이 바로 식당이다. 이제 윤관영 시인은 주방의 시인이거나 쪽문 밖의 시인이 아니라 식당의 시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2. 식당, 층층이 두꺼운 공간

 

윤관영 시인은 식당 연작시를 통해 식당의 시인으로서 식당에서 경험한 감정들, 인식들을 시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시인이 식당 연작시를 쓰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은 식당이라는 공간의 공간성을 깊고 넓게, 층층이 두껍게 구축하는 일이다. 미리 말하자면, 식당3, 식당4, 식당5, 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에서 식당은 시인의 자아성찰의 공간이다. ‘자아성찰의 공간인 식당’. 이것은 윤관영 시인의 식당이 지니는 가장 주목할 만한 공간성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식당7-싸릿골 식당에서 식당의 다른 공간성을 일궈낸다. 식당7-싸릿골 식당에서 식당은 이야기, 즉 서사의 공간이자 떠난 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공간이다. 이제부터 그 시편들을 찬찬히 읽어 보자.

식당3을 읽으며 어느 이른 아침 식당 안팎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그 풍경의 정중앙에 한 손에는 명함들을 쥐고 한 손으로는 셔터를 올리는 시인이 있다. 식당3에 시인은 그 아침의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해 놓았다.

이른 아침, 식당 셔터 주변에 광고·판촉 명함들이 흩어져 있다. “총천연색 명함이 내린/그런 아침이다. 명함들은 셔터 안으로도 들어와 있다. 빗자루로는 명함들이 잘 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명함들을 줍는다. 명함들은 잘 집히지도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명함들이 사장님, 힘 내세요”, “많이 힘드시죠라고 공손하게 인사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명함에 사장님, 힘 내세요”, “많이 힘드시죠라고 적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쭈그리고 앉아 작고 얇디얇은 명함들을 일일이 줍고 있는 자신에게 명함들이 그렇게 인사한다고 시인이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상상은 재미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인은 스스로 힘을 내고 싶은 심정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지 싶다. 식당 일에 지친 또는 삶에 지친 시인에게 명함들이 그런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건넨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명함들이 가려운 델 잘 안다라고도, “버리려는 마음조차 안다라고도 말한다. 명함들이 시인의 괴로움과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을 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 시인은 쭈그리고 앉아 명함들을 주우면서 사실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다. 시인은 한 손에는 명함들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셔터를 올린다.

식당4에는 식당 안에서 식당 밖을 향하며 연상과 상념에 빠져드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연상과 상념의 뿌리는 자기를 성찰하는 마음에 닿아 있다.

식당 밖에 신정레저관광이 지나간다. “신정레저관광이란 관광버스, 관광버스 차체에 적힌 글자가 아닐까. 시인은 식당 안에서 신정레저관광을 보고 신점례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시인의 연상은 신점례에서 자개 소반에 라면을 먹다가/상을 내준 방순 누이로 이어진다. “신정레저관광에서 신점례, “신점례에서 방순 누이로의 연상은 반사적이고 표피적이고 일회적이다. 그럴 까닭도 없지만, 시인은 신정레저관광에 대해서도, “신점례에 대해서도, “방순 누이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뉴스를 보다가 꽃구경을 떠올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마 시인은 뉴스의 내용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뉴스 화면의 배경이 된 꽃 풍경에 시선을 멈췄던 것 같다. 시인의 이런 반사적이고 표피적이며 일회적인 연상은 식당 안에 있으면서 식당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과 열망의 초라한 발현이다.

그런데 시인은 식당 안에서 끊임없이 바깥을 향하면서도 동시에 식당 안에 자신을 단단히 붙박는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머니께 전화 드리려다가 어머니의 초저녁잠을 깨울 것 같아 번번이 관둔다. 은사께 전화라도 드려야지 생각은 하지만 해를 넘기도록 실행을 못한다. 남쪽에서 연달아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한번 가겠다고 말은 하지만 곧 잊어버린다. 시인은 내 그리움은 가짜라고 말한다. 자신을 두고 외곬이 아니고 잡다하며, “깊이도 없고 곰삭은 게없다고, “진국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을 못 믿겠다, “한심하다고도 말한다. 자신은 잡스러운 종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의 자책은 진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의 그리움이 가짜인 까닭은 그의 인간적 결함 때문은 아니다. 그 까닭은 식당 일의 막강함 때문이다. 복잡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세 끼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일, 밥상을 차려야 하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식당 일을 한다는 것은 식당 안에 계속 머문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은 이제 그 사실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여 부정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식당 안에 자신을 단단히 붙박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은 치열한 자기 성찰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토대이며 시의 주춧돌이 된다. 시인의 자책 속에서 외곬”, “깊이”, “진국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미 시인은 자신이 다른 곳이 아니라 식당 안에서, 다른 일이 아니라 식당 일에 있어서 외곬”, “진국이 되어야 하고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식당5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에서는 식당 안에서, 식당 일에 있어서 외곬”, “진국이 되려 하고 깊이를 갖추어 가려는 시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그 마음을 자신의 손에 대한 사유, 어떤 손에 대한 동경을 통해 드러낸다.

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을 먼저 보자. 시인은 어수라 불리는 손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어수는 물에 불어 손등이 어복같아진 손이라고 한다. 물에 불고 구부정하게 구부려진 모습으로 쌀을 치대는 손 말이다. 시인은 어수수제비”, “갈퀴”, “국수”, “주먹밥을 닮았다고, “먹는 입을 닮았다고 말한다. “어수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어수는 남에게는 내밀기 부끄러워 감추게 되는 손이다. “악수를 주저하여 즤끼리 잡는초라한 손이다. 그러나 사실, “어수는 먹을거리를 만들어 남을 먹이는 손이다. 초라한 손이 아니라 아름다운데도 겸손한 손이다.

요컨대, 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에서 시인은 쌀을 씻을 때의 자신의 손을 어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는, “어수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수외곬으로 쌀을 불리고 씻지 않는다면, 그 일에 있어서 진국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일의 깊이를 모른다면 가질 수 없는 손이다.

식당5에서 시인은 밥물을 맞출 때와 밥을 풀 때의 손에 대해 말한다. 먼저, 밥물을 맞출 때. 그때 손은 시려 곱은 자세가 되는데, 시인은 그것을 두고 손등이 순해진다고, 손이 숙는다고 표현한다. , 시인은 다지고 자르고 볶던 손이 밥물을 맞출 때 여과가 된다, “원래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다지고 자르고 볶던 손이란 어떤 손인가? 그것은 도구로서의 손이다. 시인은 도구로 쓰이던 손이 밥물을 맞추면서 순수해져 그것 자체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밥을 풀 때. 시인의 말을 따르면, 그는 하루에 서너 번 밥을 푸는데, 일 년 내내 그렇게 하며, 십여 년 간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시인은 밥내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자신을 몽롱하게 취하게 하고 흥분도 가라앉힌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등의 핏줄까지 고분고분해져 밥을 푸는 주걱 질이 순해진다고.

요컨대, 시인은 식당5에 자신의 손이 원래의 손, 순수한 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의 손, 순수한 손이란 다지고 자르고 볶는 도구로서의 기능 즉 죗짐을 벗은 손이다. 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에서 말했던 어수가 바로 그런 손일 것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어수는 먹을거리를 만들어 남을 먹이는 손이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단순히 식재료를 다지고 자르고 볶는 도구로서의 손과 먹을거리를 만들어 남을 먹이는 손은 분명히 다르다. 단지 음식을 만들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손과 그 음식을 남에게 먹이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손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 앞에서 어수는 아름다운데 겸손한 손이라고 했다. “제 허벅지를 고마워쥐는 손의 모습은 겸손한 손의 구체적 형상이다. 그 모습은 즤끼리 잡는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원래의 손, 순수한 손, “다지고 자르고 볶는 도구로서의 기능, 죗짐을 벗은 손 역시 끊임없이 반복하여 밥물을 맞추고 밥을 푸는 외곬진국깊이에 도달하지 못하면 가질 수 없는 손이다.

원래의 손’, ‘순수한 손에 대한 시인의 사유와 동경은 오래 전부터 무르익어 온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에 실린 손이 된, 손이었다는 그 증거가 되는 작품이다. ‘원래의 손’, ‘순수한 손손이 된 손이다.

이와 같이, 식당3, 식당4, 식당5, 식당6-쌀을 물에 불리듯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며, 현실에서 외곬”, “진국깊이를 갖추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 시들에서 식당은 시인의 자아성찰의 공간이다. 그런데 식당7-싸릿골 식당의 식당은 좀 다른 공간이다.

식당7-싸릿골 식당에서 시인은 어떤 식당에 관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 식당에서는 언제나 대빗자루가 먼저 손님을 맞이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되었던 것인지 그 사연을 들려준다. 그 식당은 싸릿골에 있었다. 그 마을사람들은 싸리낭구 있는 데선 똥도 싸지 마라/지뢰가 묻혀 있다고 말하곤 했다. 싸리는 잘 자라지 않는 대신 널리 퍼졌다. 싸리가 그나마 자라면 사람들은 싸리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었다. 싸리는 실핏줄처럼 퍼졌고 그 식당의 담벼락과 화단도 싸리 때문에 금이 갔다. 그것은 하나의 복선(伏線)이었을까? 식당 여자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주목나무색 인감도장 같은 립스틱만 흘려놓고 떠났다. 사내의 가슴엔 지뢰가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지뢰는 녹슬어 갔다. 사내는 립스틱을 열어 보기도 하며 여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내의 마음은 싸리의 뿌리처럼 엉켜 갔고 마음의 싸리는 가슴 위로 자라났다. 잘 자랐다. 잘라도 잘라도 자라 꽃까지 피웠다. 사내는 싸리의 밑동을 잘라 대비를 만들어 쓸고 또 쓸었다. “그 식당은 그래서/늘상 대빗자루가 먼저 손을 맞이했다.”

사내의 싸리가 떠난 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를 통해 윤관영 시인의 식당이 새로운 공간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 시에서 식당은 이야기의 공간, 서사의 공간이 된다. 식당이 이야기의 공간, 서사의 공간이 된다는 점은 식당 연작시의 지평이 넓어지고 스케일이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시를 통해 윤관영 시인의 식당은 떠난 사람이 돌아와야 할 회귀의 공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공간이 된다. 이 사실을 두고 윤관영 시인이 식당에 새로운 공간성을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은 주로 식당을 나그네를 맞이하는 공간이나 식당 밖 먼 데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공간으로 그려왔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아름다운 시 손바닥 같은 꽃잎이에서 시인은 쪽문 밖에서(식당이 아니고 쪽문 밖이다.) ‘당신을 그리워하다 마침내 초대하는데, ‘당신떠난 사람은 아니다. ‘당신식당 밖 먼 데 사람’, 식당4어머니”, “은사”, “남쪽의 그 누구와 같은 존재이다.

 

 

3. 머물면서 떠나는, 침잠하면서 초월하는 형식

 

이와 같이 윤관영 시인은 식당 연작시를 통해 식당이라는 공간의 공간성을 층층이 구축해 가고 있다. 시인은 식당이라는 공간에 침잠하여 식당을 발견해 가고 있으며, 식당을 결과 겹과 틈이 있는 다층(多層)의 공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공간으로 열어 가고 있다. 윤관영 시인에게 식당은 그의 일터만도 아니고, 주방과 쪽문 밖이 단순히 결합된 공간만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나는 머지않아 시인이 식당에서 경험한 것을 시화하는 차원을 넘어 식당이 창출해내는 시를 경험하는 차원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기대한다.

윤관영의 식당 연작시는 시인이 식당을 통해 식당 너머로 가는 과정이며 여정이다. 이 연작시를 식당에 머물면서 식당을 떠나는 형식’, ‘식당에 침잠하면서 식당을 초월하는 형식이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초월을 언급하는 것은 지나치게 섣부른 일일까? 그러나 하나의 초월을 예견할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연작시들은 대개 머물면서 떠나는 형식’, ‘침잠하면서 초월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지금 떠오르는 문장들이 있다. 황동규는 연작시 풍장의 마지막 시편들을 발표하며 붙인 시작 노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14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작 노트 전문(全文)을 인용하며 시작한 글, 연작시집 ?풍장?의 서문 풍장을 위하여의 끄트머리에 이런 문장을 썼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조금 변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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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순영

약력 : 2010년 구인회(九人會)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3, 나희덕론으로 ?서정시학? 신인상 평론 부문 수상, 등단. 저서로 문학사 연구서 ?구인회의 안과 밖?(소명출판, 2017)과 비평집 ?응시와 열림의 시 읽기?(서정시학, 2018)가 있음. 계간 ?다층?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