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 드는 시
소서/류성훈
也獸
2020. 9. 1. 00:08
소서/류성훈
지루한 장마가 팥빵 두 개와 찹쌀 도넛 한 봉지를 들고 현관 앞에 선다 주전자가 빗소리를 뭉근하게 데울 때 나는 안경을 낀 채 조는 아버지에게 꿈이 더 잘 보이긴 하겠다,며 웃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오랜만이지 엄마
바깥 하루는 날씨 얘기로 시작되고
한 가족의 밤도 날씨 얘기로 끝나게 되겠지
사실 비 얘기는 아니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여름과 할 수 있는 게 더 없었던 지난여름이 차례로 수박 조각을 집는다 이거 아직은 맛이 없다고 내가 어색하게 말했지만 그런 말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차 좀 마시자고, 아무리 늦어도 한 잔은 괜찮다고 우기기에 좋은 날 선풍기 방향을 맞추면서 이렇게 늦게 마시면 밤을 꼴딱 새울 텐데,라며 정말 느지막이 잠드는 그들을
나는
오래 보고만 싶었다
*류성훈 시인의 시집 『보이저 1호에게』에는 말과 발이 꽤 나온다. 요란하지 않은 말과 발. 시 「신천옹」도 좋았다. 시 「소서」는 흐릿한 기억같은 부조가 풍경이 되어 서서히 도드라지는 것 같은 시다. 흐린 흑백 풍경같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