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

저는 처음 본 것 같네요.

也獸 2024. 6. 11. 08:47
장석원 시인의 시집평 / 윤관영
草談/윤기영추천 0조회 1910.03.21 08:07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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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시집>


장석원


자동적인 혹은 윤리적인



- 이재무 ���저녁 6시󰡕������(창비, 2008)

- 이은봉 󰡔������책바위󰡕������(천년의 시작, 2008)

- 윤관영 󰡔������어쩌다, 내가 예쁜󰡕������(황금알, 2008)



시집을 펼칠 때의 흥분. 나는 고약한 버릇 하나를 갖고 있다. 악습에서 벗어나기 힘든 나를 보면서 금연의 당위만큼 흡연의 의욕이 비례하는 욕망 과잉 표출을 체험한다. 한 시인의 영혼이 담긴, 뜨겁게 살아 숨 쉬는 작품들에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가위표를 그려대는 일.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와 나쁜 시를 구별하여 각각의 울타리 속에 몰아넣는 일. 나는 끈질긴 습관에 구속된 상태이다.

세 시인의 시집은 각각의 개성으로 무장되어 있다. 비슷한 연배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세 시집의 개별성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시집에는 세상을 향한 절망과 분노가 가득하다. 중년을 넘어서고 있는 세 시인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 대한 저항, ‘나’에 대한 격앙된 비판의 목소리,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요를 체득하고자 하는 열망이 어우러진 시집 세 권을 읽었다.


-중략-


장딴지를 거슬러/ 무르팍 관절을 타/ 허벅지 근육이 불룩거리고/ 괄약근이 옴싹 잡히고/ 허리에 찌잉한 전류가 흐르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직립이다// 일이 있는 한 나는 직립이고/ 내가 직립인 한 사랑도 영원하다/ 숙련도 끝내는 못질로 끝내고/ 못질이 영원한 한 직립도 영원하다/ 살을 내는 활 같은 탄력의 허리가 팅팅한 한// 매 순간순간 나는 직립이다

―윤관영, 「나는 직립이다」 부분



발견의 기쁨 뒤로는 부끄러움이 남는다. 좋은 시는 많은데, 좋은 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는 좋은 시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 주위에는 윤관영처럼 좋은 시인이 많고, 그의 시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산재한다. 윤관영의 󰡔������어쩌다, 내가 예쁜󰡕������(황금알)을 읽으며 나는 좋은 시를 읽는 기쁨에 젖어들었다. 목표를 향해 에두르지 않고 전진하는 직선의 언어를 목격했다. 분식이 적고 거짓을 모르는 윤관영 시의 행보는 정직하고 생기 넘치고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좋은 시를 읽는 기쁨 앞에서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윤관영의 시집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에 밑줄을 긋느라 바빴다. 다듬지 않은 듯한 구절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여지없이 박살내는 구절들 때문에 곤란했다. “잠수함의 잠망경처럼 솟는 줄기”(「감자」), “새끼 제비 아가리 같은 자태이더니”(「자목련」), “벚나무 아래, 두서없는 충돌들 속에서 (…중략…) 양철 같은 이파리를 내밀겠지만”(「어떤 봄, 벚나무 아래」), “멀리,/ 버스의 이마가 번들거린다”(「시월의 고요」), “니스 바른듯하던 땀”(「오늘 하루 잘 살았다」) 등등. 우리를 즐거움에 젖게 하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여 사물의 새로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하는, 인식의 깊이를 부여하는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미학적 도구임을 깨닫게 하는 이 구절들의 힘에 눌려 나는 시종일관 무기력했다.


나무 심고 있는데

망치로 손가락을 얻어맞은 충격처럼

새가 동공 속에 앉았다 휘청,

산수유 가지가 휜다 부리가 짧은, 가슴이 누런 새는

내 눈빛이 밀어냈다 새는 주둥이로 공기를 뚫으면서

온몸으로 밀더니, 다르륵 한 차례 날개를 떨더니

또 몸을 던진다 손톱 점점 검어진다

찢어져 밀린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나온다

굽은 것은 완강하다 뚫는 처음은 날카롭다

각(角), 저마다의 힘

뭉툭한 것일수록 몸무게가 힘이다

뿌리를 덮은 흙이 공기를 다 밀어낸 것은 아니듯

공기가 심긴 주목나무를 무조건 누르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 나무는 눌리겠지만 눌림을 누르면서

누름이 즐겁도록 밀어갈 것이다

아픔에 겨워 손가락을 빨 듯

잡은 곡괭이 자루에 새의 자리가 잡힌다

―「새의 자리」 전문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참았던 말은 ‘절창’이었다. 나는 이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당신은 어떻게 읽었는가. 섣불리 깨닫지 않는다.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윤관영은 쉽게 명제로 표현하지 않는다. “새가 동공 속에 앉았다 휘청” 같은 결정적인 이미지는 시인의 “뭉툭한 것일수록 몸무게가 힘이다” 같은 전언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변질시키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렇게 살아야 해, 내 삶은 반성과 후회뿐이야 같은 지겨운 자동적 인식이 그의 시에는 철저하게 또는 처절하게 배제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시인이 지녀야 할 윤리라고 생각한다. 시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미학적 전거라고 여긴다. 추상적인, 근거 없는, 남들이 다 아는, 제록스된 고요와 윤관영의 고요가 다른 지점. 윤관영의 응결된 침묵이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향해 격발되는 순간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당신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이 물큰물큰 나는 여물 먹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해요 느긋하게 허공을 씹는 듯한, 제 입의 침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 고요의 되새김질 앞에서는 손이 잘, 안, 나가요 황씨 아저씨네 소를 볼 때가 그래요 여물 먹는 데 열중하는 송아지를 보면, 열중을 틈타 콧잔등이를 쓸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앞서요

―「짐승, 코가 긴」 부분




그리고 천진하고 자유로워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다음 시를 읽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나비가 집 뒤 절개지切開地

먹자둣빛 흙에 앉았다

날개짓도 멈춘 지 오래여서

나도 오래 보았다.




오늘은 단감 무늬 호랑나비 한 마리가

두엄 더미에 오래 앉아

흰둥이의 호기심마저 불러냈다

묵직한 냄새 속에

나비 한 마리




나비야 내게 와서 앉아라

나도 적당히 헐었고

썩을 만큼 썩었단다

나도야 설탕꿀은 된단다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전문


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즐거웠다. 한계와 단점, 가능성과 장점의 구별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세 시인 모두 우리 생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시집을 읽은 후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거짓 고백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거짓’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시적인 갱신이 없으면 그 고백이 자동적인 복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에게 ‘너는 거짓 고백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묻게 되었다. 거짓에 괄호를 치는 순간 우리는 그 고백을 귀담아 들을 수 있을까? (거짓) 고백을 속일 수 있는, 거짓을 넘어설 수 있는, 고통스러운 현재를 고통스럽지 않다고 거짓으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 모멸, 자기 학대, 그 견딤이 절실하다.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까놓는 것과 수음하고 울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의 차이. 한 번 더 속이기를…… 속을 준비, 되어 있다. 이것이 제대로 짜고 치는 시의 고스톱 아닐까. 이것이 시라는 게임의 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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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 1969년 충북 청주 출생.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평론집 󰡔������낯선 피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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