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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시간을 이겨낼 시/현순영 본문
시간을 이겨낼 시
현순영
1. 윤관영의 「손바닥 같은 꽃잎이」
밥공기 뒤집는데, 당신 생각났습니다 쪽문/ 담배 참입니다. 부끄럼이 얼굴 돌리듯 진 목련꽃 잎이 이내 흙빛입니다 목사리 한 저 개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요 돌고 돕니다 그러니까 저 다져진 흙은 열망의 두께인 셈,/ 땅에 잡힌 개털 흔들리는 풍편에 당신 소식 있었습니다 이 봄 속엔 적이나 여름이 있고 주방은 계절을 앞서 갑니다 싱싱한 것들은 이내 썩고 나는 애초 말려야 한다는 것을, 통풍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나는 다만 나를 말릴 수 있을 뿐입니다/ 물큰한 목련꽃 잎은 부삽이 묻은 손 무덤입니다 요리는 소리, 연통에 손 꺼풀 벗기다 판나는 판에, 어떤 소식을 감지하고는 뒷다리를 세우고, 귀를 세우고, 맴돌다 선 저 눈의 개처럼, 이내, 쪽문을 향합니다 등짝의 털 날리는 풍편에 개가 반응하듯, 개구리 알 같은 밥알을 설거지하는, 내 등에 어떤 기미가 입니다.// 당신, 이 봄 한 상 받으세요. 목련꽃 잎이 내는 상입니다
지난여름 윤관영이 두 번째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시로여는세상, 2015)를 내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시집에서 「손바닥 같은 꽃잎이」를 좋은 시로 꼽았다. 이준규는 이 시를 “절창”이라 했고(이준규, 「발문-윤관영, 시」, 윤관영,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 필자도 이 시를 시집의 정점으로 읽었음을 시사했었다(졸고, 「몸의 시, 마음의 시」, ?시와 사람?, 2015. 겨울). 또, 시인은 얼마 전 쓴 글에 “한 누이”에게 받은 편지를 실었는데, 그 편지에도 「손바닥 같은 꽃잎이」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적혀 있다(윤관영, 「오후 3시의 주방, 편지」, ?시에?, 2015. 겨울).
「손바닥 같은 꽃잎이」를 다시 읽는다. 여전히 좋다. 윤관영은 언제 읽어도 좋은 시, 시간을 이기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냐고 쓴 적이 있다(윤관영, 「시작 노트–단상 몇 개」, ?어쩌다, 내가 예쁜?, 황금알, 2008). 「손바닥 같은 꽃잎이」는 분명히 그런 뜻의 좋은 시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시는 시간이 지나도 좋게 느껴질까? 이제 이것을 여러 모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래서 우선 이 글에서는 윤관영의 시 세계가 지닌 특징과 그 특징이 변모하는 양상을 살피면서 「손바닥 같은 꽃잎이」가 왜 좋은 시인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윤관영의 시 세계가 지닌 특징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일의 시’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을 꼽고 싶다. ‘일의 시’는 시인이 일하면서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쓰는 시 또는 어떤 일에 관한 생각을 쓴 시다. 윤관영의 시 중에는 ‘일의 시’가 많고 ‘일의 시’들 중에는 좋은 시가 많다. 그런데 윤관영의 첫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에 있는 ‘일의 시’들과 두 번째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에 있는 ‘일의 시’들은 다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 차이를 짚으면서 윤관영 시의 개성과 비전 그리고 시간을 이겨낼 시, 「손바닥 같은 꽃잎이」의 가치를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2. 일과 인간, 일과 고독
윤관영의 첫 시집에서는 「체 치면서」, 「깨를 볶으면서」, 「빈집을 헐면서」, 「벌마늘」, 「새의 자리」, 「방앗간, 랩 포장」, 「몽당싸리비」, 「따지기」, 「맞다, 엄살」 등을 ‘일의 시’로 꼽을 수 있다. 그 중 울림이 깊은 시, 「빈집을 헐면서」를 음미해 보자.
빈집은 못부터 삭는다/ 묵밭이 된 마당/ 키를 넘는 명아줏대/ 덜컹거리는 문짝이라도 잡은 못은/ 녹이 덜하다 반쯤 박혔을 땐/ 제 몸 휘게 하는 무게를 매달지 못하면/ 대가리, 아니 모가지가 먼저 삭는 법/ 이미 나무가 된 명아주 밑동은/ 낫질이 잘 안 먹는다/ 적막한 빈집에도 세월의 흔적은/ 저 못처럼, 서까래에 대가리까지 푹/ 박혀 살면/ 온전할 수 있었을까/ 안경알에 떨어진 땀을 면장갑으로 닦으며/ 장도리를 옆으로 눕혀/ 구부려 구부려 못을 뽑는다
시인은 이 시에 빈집을 헐면서 발견하고 생각하는 것을 쓴다. 그는 마당은 묵밭이고 명아줏대마저 높고 굵게 자란 어느 빈집을 헐면서 빈집에선 못부터 삭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덜컹거리는 문짝에라도 박혀 있는 못은 녹이 덜하다. 하지만 어딘가에 반쯤은 박혀 있는데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 못은 삭고 있다. 빈집을 거쳐 간 세월의 흔적인 삭은 못을 보며 시인은 삶을 돌아본다. ‘저 못처럼, 서까래에 대가리까지 푹 박혀 살면 온전할 수 있었을까’. 서까래는 지붕을 만들고 추녀를 잇는 나무다. 지붕과 추녀는 집을 집이게 하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시인은 묻는 것이다. 내가 집을 집이게 하는 것들을 지탱하며 살아왔다면 나는, 내 집은 온전할 수 있었을까? 시인은 못을 뽑는 내내 그 물음을 되뇐다.
시적 모멘트(moment)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시적 상상, 시적 형상화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다. 마침, 윤관영은 얼마 전 “시마(詩魔)”를 언급했다(윤관영, 「오후 3시의 주방, 편지」, ?시에?, 2015. 겨울). ‘시마’란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불가사의한 힘이다. 시적 모멘트는 시인이 시마에 들리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적 모멘트는 대개 순간이지만 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좋은 시에는 그 순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으로 확장되어 있다. 한 예로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려 보자. 「광야」의 시적 모멘트는 시인이 눈 내리는 가운데서 매화 향기를 맡은 순간, “지금”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까마득한 날”로부터 “천고의 뒤”까지 아우르며 영원이 된다.
「빈집을 헐면서」가 ‘일의 시’로서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시적 모멘트는 시인이 빈집을 헐다가 빈집에선 못이 먼저 삭는다는 것을 안 바로 그때다. 시인은 그 순간에 머물며 그 순간을 형상화한다. 나아가 그는 ‘저 못처럼, 서까래에 대가리까지 푹 박혀 살면 온전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그것은 ‘어떻게 살았는가, 잘 살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에 관한 물음이다. 그 물음을 통해 이 시의 시적 모멘트는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시인의 물음은 곧 독자의 물음이 된다. 이 시의 시적 모멘트는 시인만의 순간에 국한되지 않고 독자의 시간으로도 확장되는 것이다.
윤관영의 첫 시집에 실린 ‘일의 시’들은 대개 「빈집을 헐면서」처럼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다. 시인은 그 시들에 시적 모멘트를 어떤 식으로든 명시한다. “체 치면서”, “깨를 볶으면서”와 같은 제목으로 명시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떼어 내는데,/ 그놈 참 예뻐 보이데요”(「벌마늘」), “나무 심고 있는데/ 망치로 손가락을 얻어맞은 충격처럼/ 새가 동공 속에 앉았다 휘청,”(「새의 자리」)과 같은 구절로 명시하기도 한다. 시인이 체를 치다가, 깨를 볶다가, 벌마늘 쪽을 떼어 내다가, 나무를 심다가 무엇을 느끼거나 깨달은 순간이 그 시들의 시적 모멘트다. 시인은 그 순간에 머물며 그 순간을 형상화하면서 시를 이룬다.
‘일의 시’가 시적 모멘트를 품는다는 것은 일과 시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의 시간이 시의 시간이며 일 하기가 시 쓰기라는 뜻이다. 윤관영은 첫 시집에서 일을 무엇이라 인식하는가? 어떻게 그는 일과 시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가? 「나는 직립이다」를 통해 이런 물음들에 답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시에 떡판을 들어올리는 순간 자신은 직립이며 직립인 한 사랑도 영원하다고 쓴다. 직립은 인간의 자세다. 시인은 몸을 구부렸다 펴는 직립, 일의 최종 동작인 직립을 인간의 자세로 여기며 그런 직립을 취함으로써 즉 일을 함으로써 자신은 인간일 수 있다고 쓰는 것이다. 「나는 직립이다」에 기댄다면, 첫 시집에서 윤관영은 일을, 자신을 인간이게 하는 계기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인 ‘나’를, 인간이고자 하는 ‘나’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는 시를 쓰기 어렵다. 시 쓰기는 그런 존재가 세계를 끌어안는 몸짓이다.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일 수 있음을 인식하는 시인이 일의 시간과 시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일과 시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엔 그야말로 ‘일의 시’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시들은 첫 시집에 있는 ‘일의 시’들과 다르다. 그 시들은 시인이 일을 하면서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쓰는 시들이 아니라 대개 어떤 일에 관한 생각을 쓴 시들이다. 또,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지도 않다. 「물의 혈을 짚다」를 보자.
육수는 맛의 시작,/ 맛을 내는 것 잡내를 잡는 것// 버려진 문갑의 등짝엔/ 주먹만 한 구멍이 있는데// 술을 넣고, 가죽나무도 넣고/ 파도 넣고, 양파도 넣고, 무도 넣고// 숨통을 트는데/ 길을 내는데// 다시마도 넣고, 황태 머리도 넣고, 넣고 넣어/ 끓이고 끓인다만 침을 놓는 것인데,// 새 구이 맛은 날갯짓 때문/ 살 없는 살 때문// 달군 쇠 봉을 육수에 담가,/ 잡내를 태운다는 것인데// 급소가 없는 물이지만/ 이 쇠 봉이 육수를 잡아채 환골탈태시킨다는 것인데// 맛을 내는 것보다/ 맛을 없애야 하는데// 침 맞은 육수는 정사 후의 나른함처럼/ 힘 뺀 맛을 보여준다는데-
이 시는 육수 끓이기에 관한 시인의 생각을 쓴 시다. ‘육수 끓이기에 관한 생각’은 ‘육수를 끓이면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인이 육수를 끓일 때마다 생각했던 것들을 종합하고 추상(抽象)한 시다. 육수를 끓이는 중의 어느 순간이 시적 모멘트가 되고 시인이 그 순간에 머물며 그 순간을 형상화한 시가 아니다. 물론 시인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그는 그런 순간들의 뜨거움을 식혀 버리는 차가운 시간들을 간헐적으로 거친 뒤에야 이 시를 완성했을 것이다. 뜨거운 시간과 차가운 시간이 번갈아 흐르는 사이에 시인은 육수를 끓일 때마다 생각했던 것들을 의도적으로, 비의도적으로 추상했으리라. 문갑 등짝에 구멍을 내는 까닭, 새 구이가 맛있는 까닭 등도 추상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맛을 내는 것 잡내를 잡는 것”이라는 간단명료한 진술은 그런 추상의 결과다. 이 진술은 시가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지 않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에 있는 ‘일의 시’들은 대개 이와 같다. 시인은 「어두워야 깊다」에서는 간장을 끓일 때마다 생각했던 것들을 “맛은 종합이다”라는 진술로 추상했다. 「배를 치다」에서는 배 살을 발라낼 때마다 생각했던 것들을 “갈비는 체면을 벗어던져야 맛의 진경에 이르게 된다”라는 진술로 추상했다. 이 추상적 진술들은 의미가 강하여 독자의 마음을 끈다. 독자는 힘들여 시를 독해하지 않고도 이 진술들에 밑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에 있는 ‘일의 시’들은 독자에게 밑줄 긋는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시인의 경험을 추체험하려 하거나 시의 구조를 음미하며 힘들지만 값진 예술적 경험을 하려는 독자에게는 더러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에 있는 ‘일의 시’들은 어째서 시적 모멘트를 품지 못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시집에서 시인이 일을 무엇으로 인식하는지 살펴야 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 일은 주로 식당 주방 일이다. 미리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일을 자신이 고독조차 잃게 되는 계기로 인식한다. 「사내」에 그런 정황이 담겨 있다. 사내는 일의 소란한 중심에서 한가와 권태를 몰랐고 고독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의적으로, 심정적으로만 고독했다. 일을 끝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육체는 고독이 아니라 잠을 들였다. 고독은 사내에게 꼬박꼬박, 직방으로 왔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고독을 대면할 시공이 없는 자의 절망적 고독. 마침내 고독이 사내를 피해 가기 시작했다. 붉은 손등과 게장처럼 딱딱한 가슴, 사내의 고단한 몸에는 더 이상 고독이 들지 않았다. 사내의 죽음 같은 삶에 고독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고독이 잠잠해지자 낭만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사내는 칼을 갈곤 했을까, 고독과 낭만이 틈입할 수 있게 딱딱한 가슴을 열려고? 이렇게, 윤관영은 두 번째 시집에서 일을, 자신이 고독조차 잃게 되는 계기로 인식한다. 그런데 고독은 낭만의 거처다. 낭만을 시심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그에게 일은 결과적으로 시심이 희석되는 계기인 것이다. 그런 일의 도중에 시가 싹트고 자라기는 어렵다. 그래서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에 있는 ‘일의 시’들은 시적 모멘트를 품지 못하는 것이다.
3. 짬, 고독을 되찾고 당신을 초대하는 시간
일에 대한 윤관영의 인식이 변한 까닭을 밝히는 것은 섣불리 덤빌 수 없는, 좀더 본격적인 시인론의 과제다. 다만, 그가 일을 달리 인식하여 그의 ‘일의 시’도 달라졌다는 것만은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의 첫 시집에 실린 ‘일의 시’들은 시적 모멘트를 품고 있으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일의 시’들은 그렇지 못하다. 즉 지난 날 윤관영에게 일과 시는 하나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일과 시는 둘 다 ‘윤관영’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일의 시간과 시의 시간을 다시 일치시켜야 할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과 시의 합일이라는 비전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관영은 역설적이게도 두 번째 시집에서 ‘짬의 시’로써 그 과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짬의 시’는 짬을 형상화한 시다. 짬이란 일을 하는 도중의 잠시 동안이다. 짬은 일에 따라, 일은 짬에 따라 달라진다. 일과 짬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짬은 일의 부분이며 연속이고 이면이다. 짬은 일이다. 서둘러 말하자면, 윤관영은 짬에 고독을 되찾고 고독을 통해 마침내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기에 이른다. 자신과 세상의 연결, 자아와 세계의 합일은 시의 본질이다. 요컨대, 윤관영은 두 번째 시집에서 일이기도 한 짬을 시의 시간으로 만든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자.
먼저, ‘짬의 시’, 「밥에 뜸이 드는 시간이면」을 음미해야 한다. 주방에서, 밥에 뜸이 드는 시간이란 언제이며 어떤 때일까? 그 시간은 저녁 손님을 위해 안친 밥에 뜸이 드는 때, 오후 세 시쯤일 것 같다. 그 시간에 시인은 일에서, 주방에서 잠시 벗어나도 된다. 그런데 시인을 피해 갔던 고독이 바로 그때 되돌아온다. 고독은 바람으로, 햇살로, 눈발로, 비로 온다. 시인과 고독의 재회! 뻘쭘해진 시인은 다시 주방으로 가 술상을 본다. 고독과 대작하기 위해서다. 바람이라면 묵밥, 햇살이라면 콩나물무침에 막걸리, 눈발이라면 맵게 볶은 돼지 껍데기에 소주, 비라면 아욱까지 넣은 올갱이국에 동동주. 시인은 그렇게 고독을 맞아들인다. 시인은 고독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주방의 시간을 잘 살아낼 수 있다. 고독과의 대작은 시인이 주방 사람으로 사는 꾀, 주방의 시절을 견디는 사치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고독의 시간에 주방 밖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감각과 열망을 회복한다. 이 사실이 더 중요하다. 시인은 이내 안주를 덜어 쪽문으로 간다. 쪽문은 시인이 세상을 내다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다. 문밖을 내다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세상과 연결하려는 자의 첫 몸짓이다.
윤관영은 조금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려는 몸짓을 취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상 또는 당신을 초대하기에 이른다. 바로, 「손바닥 같은 꽃잎이」가 그것을 보여준다. 이제, 이 시를 읽자.
「손바닥 같은 꽃잎이」는 편지다. 편지는 시인이 부재하는 당신에게 말 건네는, 당신과 만나는 방법이며 형식이다. 고독한 ‘나’가 고독의 근원, 부재하는 ‘너’에게 쓰는 편지는 곧잘 시가 되곤 한다. 시인은 편지에 적는다. 밥공기 뒤집는데 당신 생각났노라고, 풍편에 당신 소식 들었노라고, 이 봄 한 상 받으시라고.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전부가 아니다.
어느 결엔가 지기 시작한 목련꽃 잎. 지는 목련꽃 잎은 당신이 바람 편에 부친 소식일지 모른다. 주방의 시인은 목련꽃 잎이 지는 것을 보면 당신이 생각난다. 그런 때 그는 쪽문 밖으로 나간다. 쪽문 밖의 짬, 담배 참. 시인은 잠시 고독해지며 당신에 대한 열망을 앓는다. 그러나 시인은 주방에 매여 있어 쪽문 밖에 오래 머물 수는 없으리라. 그는 이내 고독과 열망을 털고 주방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목련꽃 잎은 또 져 내리고 시인은 다시 쪽문 밖을 향한다. 밥공기를 뒤집다가도, 연통에 손 꺼풀을 벗기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쪽문 밖에서의 담배 참, 다시 주방. 쪽문 밖과 주방을 계속, 하릴없이 오가는 시인. 쪽문 밖 목사리 한 개는 시인을 닮았다. 개는 어디론가, 누구에겐가 가고 싶어도 목사리를 풀 수 없어 맴돌 뿐이다. 개가 맴돌며 다져 놓은 흙의 두께는 열망의 두께인 셈이다.
시인이 쪽문 밖과 주방을 오가는 것은 목련꽃 잎들 때문이다. 그는 땅에 떨어진 목련꽃 잎이 물큰해 썩고 흙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서성거린다. 지는 동안에나마 목련꽃 잎은 당신 소식이 아닌가. 또, 시인은 당신에 대한 자신의 열망이 주방에서 썩어 버릴까 초조해 서성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봄 속에 이미 와 있는 여름을 느끼고 물기 많은 주방엔 여름이 더 일찍 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름은 부패의 계절이다. 싱싱한 것들도 여름엔 이내 썩고 만다. 떨어진 목련꽃 잎도, 시인의 열망도 여름엔 썩고 말 것이다. 썩지 않게 하려면 말려야 한다, 통풍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떨어진 목련꽃 잎이 썩어 흙이 되는 것엔 손쓸 수 없다. 목련꽃 잎은 아직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을 말릴 수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진실이다. 진실은 힘이 세다. 시인은 “나는 다만 나를 말릴 수 있을 뿐”이라고 씀으로써 쪽문 밖 담배 참을 당신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썩지 않게 말리는 의식(儀式)으로 바꾸고야 만다. 그 의식으로 지는 목련꽃 잎의 뜻도 변한다. 그것은 당신의 소식이 아니라 당신을 초대해 이 봄을 대접하려는 시인의 분신, 메신저가 된다. 그렇다. 당신도 어디선가 지는 목련꽃 잎을 보고 있으리라. 당신을 수동적으로 그리워하던 시인은 이제 능동적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주방 사람 윤관영은 「손바닥 같은 꽃잎이」에서 봄 한 상 차려 당신을 초대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합일이라는 시의 본질을 ‘윤관영 식’으로 구현한다. 요컨대, 「손바닥 같은 꽃잎이」는 시인 윤관영이 일과 시가 분리된 지점, 시가 삶에 소외되어 가는 고비에서 고독을 딛고 이룬 시, 그래서 좋은 시, 시간을 이겨낼 시다. *
현순영 | 문학평론가
2013년 <서정시학> 평론 등단
<시와세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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