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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나르시시즘 건너편의, 거울/전해수 평론가의 내 시집평 본문
나르시시즘 건너편의, 거울
-윤관영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
전해수
윤관영의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미소년 나르키소스의 신화로 널리 알려진 나르시시즘narcissism과는 다른 ‘자기애自己愛’가 낮게 포복해 있다. 이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유년기의 저릿한 아픔과 오랜 삶의 그늘이 몸에 배인 자의, 숙명적인 ‘자기애’로서, 자아도취적인 자기애와는 분명 다르다. 시인은 시작노트에 “시인 자신의 끌탕이 들어 있”는 시집이야말로 좋은 시집이라 빗대어 말하면서 이번 시집에 선별된 자신의 시 전편全篇이 다, 마음에 든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같은 시인의 ‘당당한’ 고백은 역설적이게도 등단 이후 10년을 구가하는 세월동안 겨우 첫 시집을, 그것도 엄선된 시선집을 내는 윤관영의 시적 염결성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이번 시집의 성향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즉 그는 첫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을 내놓기까지의 10년 동안 적지 않은 세월을 “자신의 끌탕”에 빠져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나는 어디에 서 있나’라는 자기향방의 문제를 고민해 온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그는(윤관영에게 시는 삶이며 자신이다. 그러니까 전부全部이다!) 비록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아니지만,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서(시를 쓰는 현실 속에서) 어쩌다 가끔, 자신도 예뻐 보이길 간절히 바란다. 자신이 어쩌다, 예뻐 보일 때는 과연 언제일까. 10년 만에 시인으로서의 직무유기를 겨우 면하게 해준 윤관영의 시집『어쩌다, 내가 예쁜』은 그러므로, 여전히 나르시시즘의 건너편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거울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기연민으로 둘러쳐진 ‘자기애’여서 너무 눈물겹다.
떡판을 들자면
바벨을 드는 느낌이야
어깨만큼 다릴 벌려 허릴 굽히면
엄지 손톱에 오는 촉촉한 감
한 호흡 정지시키는 그 때
그 때 나는 직립이다
장딴지를 거슬러
무르팍 관절을 타
허벅지 근육이 불룩거리고
괄약근이 옴싹 잡히고
허리에 찌잉한 전류가 흐르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직립이다
일이 있는 한 나는 직립이고
내가 직립인 한 사랑도 영원하다
숙련도 끝내는 못질로 끝내고
못질이 영원한 한 직립도 영원하다
살을 내는 활 같은 탄력의 허리가 텅텅한 한
매 순간순간 나는 직립이다
-「나는 직립이다」전문
인간에게 ‘직립’은 늘 마시며 사는 ‘공기’의 존재처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어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조차 어리석게 여겨진다. 그러나 시인은 최 극빈층의 고통 즉 삶을 버티기 위해 반복되는 육체적 고통의 정도를 “바벨”탑을 드는 느낌의 “떡판” 무게로 묘사하면서 이를 지탱하려는 안간힘, 즉 “어깨만큼 다릴 벌려 굽히면서” “한 호흡 정지시켜” ‘직립’하려는 순간의 힘겨움을 통해 ‘인간되기’의 안간힘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살아있다는 것’,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시는 동물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영위하려는 처절한 일상의 고통 속에서 시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직립’의 순간이라는 것이 처연하기조차 하다. 그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며 바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일 것이다.
“슬픔이나 아픔 따위의 말로는 부족한”(시작 노트 참조) 시인의 과거사는 바로 ‘직립’을 위한 역사와도 다름없는 것인데, 그는 “바벨을 드는”듯 힘겨운 “떡판을 들”고 “어깨만큼 다릴 벌려서” “한 호흡 정지시켜” “직립”하는 순간이, “장딴지를 거슬러” “허벅지 근육이 불룩거리고” “허리에 전류가 흐르는” 그 “직립”의 순간이, “사랑”도 존재하며 영원도 존재함을 확인하는 순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립’의 순간이 ‘인간됨’의 찰나이며, 바로 “사랑”의 순간이면서 “영원”의 순간이며, 바로 시인으로서 살아감을 느끼게 해주는 인간으로서의 ‘인정’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인의 이러한 절대적 존재의식은 시인으로서 시를 쓴다는 숙명론적 자기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시를 쓴다는 ‘천형’, 그것은 윤관영 시인에게 어울리는 말인 것이다. 시가 아니면 생生이 무의미하다는 것, 절대절명의 순간이 시에 의해 극복된다는 생각은 시인의 시에서 쉽게 발견된다.
새벽에, 개똥을 두엄더미에 던지며
처먹고 똥만 싼다고 부삽 득득 긁지만,
기분 좋은 투정도 있기는 있는 것이다
투정에 걸리는 밤송이와 도토리집은
부삽질을 부드럽게 한다
저를 열어 제 속의 것 떨어뜨린 것이
바짝 세운 가시를 그대로 두고
무른 안부터 녹아가면서, 금세
거름빛을 닮아 가는 중인 것이다
부삽이야말로 밤송이 까는데 제격이지만
발에 밟힌 밤송이는 이슬에 젖어
눅눅한 것이어서, 가시마저
밤 궁둥이마냥 이뻐 보이는 것이어서,
돌팍을 텡텡 쳐보기도 하는 것인데
눅진한 아침도 이때, 흠짓
이슬을 터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봐도
내가 이쁠 때가 있는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쁜」 전문
자연의 섭리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천형을 받아들이는 내면적 미의 발견이 바로 시「어쩌다, 내가 이쁜」이다. 시인은 “개똥을 두엄더미에 던지며” ‘자신’의 처지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개똥의 임자에게 “처먹고 똥만 싼다”고 “부삽을 득득 긁”으며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저를 열어 제 속의 것 떨어뜨린” “거름빛”이란 걸 알기에 “기분 좋은 투정”으로 이어진다. 곧, “바짝 세운 가시를 그대로 두고” “밤송이와 도토리집”으로 열매를 맺어 “가시마저” “밤 궁둥이마냥 이뻐 보”일 것이므로 투정은 이내 “기분좋은 투정” 으로 바뀌어 있다.
이처럼 자연의 생리 즉 “거름빛을 닮아가는” 자연의 원리를 체감한 시인은 시 쓰는 천형의 일을 하는 자신이 “두엄더미”의 몸 낮은 깨우침을 통해 “가끔은” 자연의 곁에서 스스로가 “이쁠 때가 있”다는 무위無爲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예컨대 시인에게 ‘자연’을 통해 배우는 깨달음의 정서는 매우 중요한 시제詩題가 된다. 그는 체 치면서, 깨를 볶으면서, 낚싯줄을 바라보면서, 한낮에 시장에 가면서 혹은 팥죽 솥을 걸면서, 국수를 삶으면서 시를 만난다. 그러나 그의 시는 궁극적으로 거울 속의 ‘미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위로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자기연민적 자기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감각적 사유를 물씬 풍기는 다음 시에서도 소극적 자기 투영의 모습은 여전히 발견된다.
마음에 쟁여둔 여인이 앉았던
변기에 앉게 되는 일은
좀 야릇한 일이다
허벅지에 전해지는 온기
아직은 빠져나가지 못한 체취
갓 낳은 따스운 달걀을 들고
암탉이 빠져나간 둥우리에 앉는 것만 같아서
가슴털로 짚가시랭이를 뉘어놓은 그 곳에
눕는 것만 같아서
엉거주춤하게 앉아 그네가 앉은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야릇하지만 또 불경한 일...
-중략-
손을 씻고 차마 그네를 마주는 못 보고
그래서 또 생각는 허벅지의 온기는
피 묻은 달걀을 쥔 것 같기도 한 일이다
-「그 자리」부분
시인의 시적 성취는 시에 대한 시인의 염결성과 맞물려 비록 고된 작업이지만 이처럼 눈부시다. 위 시에는 “변기”를 매개로 하여 “마음에 쟁여둔 여인”과 시적 화자의 교감이 형성되어 있는데, “닭”이 알을 품은 모습과 대비되어 마치 성애의 장면을 보는듯한 묘한 분위기와 겹치면서 뛰어난 회화적 영상미를 자아낸다. 배설과 본능의 공간, 화장실에서 마음에 둔 여인이 앉은 ‘그 자리’에 앉아 볼일을 보는 일이 “야릇하”지만 “불경스러운”일로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자기고백이다. 그는 마음에 둔 여인이 방금 앉았던 변기에 앉아 우연한 ‘본능의 일체감’을 만끽한다. 그는 이내 “암탉이 빠져나간 둥우리에 앉”아 “가슴털로 짚가시랭이를 뉘어놓은 그곳에” “눕는 것만 같”은 “불경”스러운 마음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여 “엉거주춤하게 앉아 그네가 앉은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마음의 발전소는 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허벅지에 전해지는 온기” 때문에 “손을 씻고”도 “차마 그네를 마주는 못”본다. 그것은 “갓 낳은 따스운” “피 묻은 달걀을 쥔 것 같”은 날 것의 ‘얻음’ 이어서 자기투영의 죄의식과 함께 옅은 ‘기쁨’이 남게 된다.
윤관영의 시집에는 이외에도 「고구마」, 「car론」, 「수작걸고 싶다」, 「질통」, 「능이버섯」,「이즈막, 꽃」등 시의 은유적 기교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시편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부언하되, 시인에게 여성은 ‘어머니’와 상통해 있고, 남성보다 우위이며, 희생과 고통을 몸으로 이겨온 가여운 ‘꽃들’이다.
요컨대, 윤관영 시의 ‘거울’ 투영은 남성적→여성적→남성적 삼각구도를 형성하여 남성의 배후에 웅크린 나약한 여성성에 투영된 자아의 자기연민적 자기애의 근저가 뿌리깊게 호흡하고 있다. 남성적 자아는 때로는 자연의 도의를 아는 듯 태연한 달관적 풍모를 위장하고 있지만 실은 끊임없이 거울을 보며 (자연과도 같은)여성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정화시키려 한다. 운명적으로 여성을 통과한 남성은 다시 남성성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관영 시인이 진정으로 자신의 시를,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거울’ 속 실체를 인정하게 되는 그때, 비로소 시인은 미소년 나르키소스의 나르시시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후 시인이 나르시시즘 건너편, 거울을 바라보며 그리는 ‘예쁜’ 모습은 세상살이에 찌들고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무해주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더한층 깊고 넓게 지닐 것이다.
<시와세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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