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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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수면사/전윤호

也獸 2019. 4. 8. 21:58



 

수면사(睡眠寺)

전윤호

 

 

초파일 아침

절에 가자던 아내가 자고 있다

다른 식구들도 일 년에 한번은 가야 한다고

다그치던 아내가 자고 있다

엄마 깨워야지?

아이가 묻는다

아니 그냥 자게 하자

매일 출근하는 아내에게

오늘 하루 늦잠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랴

나는 베개와 이불을 다독거려

아내의 잠을 고인다

고른 숨결로 깊은 잠에 빠진 적멸보궁

초파일 아침 나는

안방에 법당을 세우고

연등 같은 아이들과

꿈꾸는 설법을 듣는다

 

 

시 좋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내에 대한 시를 안 쓴 거 같다. 아니 딱 한 편 쓴 것도 같다.

좋은 시는 좋은 시, 그냥 좋은 시.

초파일도 다가오는데, 시집 냈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전 시인의 이 시가 좋게 기억되어서 한 편 올린다.

시재는 번뜩이는 게 아니라, 재능이라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좋아하면서 오래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가 하는 생각을 전 시인의 시를 보면서 느낀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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