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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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관영의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 시가 전부인 사람의 첫 시집

也獸 2008. 8. 1. 11:02

<국수를 삶는>

 

                                            윤관영

 

국수를 삶는 밤이다

일어나는 거품을 주저앉히며

창밖을 본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젓다가 찬물에 헹군다

누가 아들과 아내 떼어놓고 살라 안했는데 이러고 있듯

벚꽃은 피었다

기러기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

비빈 국수 냄비의 귀때기를 들고

저 벚꽃나무에 뛰어내리고 싶은 밤이다

저 별에게 국수를 권해볼까

국수가 풀어지듯

소주가 몸속에서 풀리듯

국수를 삶는 내가

벚꽃에 풀리고 있다

 

국수가 예부수수

벚꽃처럼 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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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에서 윤관영시인에게서 <어쩌다, 내가 예쁜>이란 시집 한 권을 받았다. 오십줄에 들어선 그의 첫 시집이란다. 등단한지 오래고 오로지 시창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시집으로 내지 않은 까닭은 좋은 시에 대한 그의 고집스런 집착에 있었다. 詩와 非詩,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를 철저히 가리는 그의 결벽성이 그에게 섣불리 시집을 못내도록 한 것은 아닐까?  그에게 좋은 詩란 재능으로만 씌여진 작위적 시가 아니라 삶이 진솔하게 녹아있는 솔직한 시이다. '시인 자신의 끌탕이 들어있는 시' 말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얘기가 아닌 자신의 관심사만 쓰거나' 남의 공감을 끌어냄없이 '자신만 들입다 파는'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는 아주 좋은 시다. 어느 한 줄 시인의 체험에서 나오지 않은 시가 없다. 그의 시안에는 그의 삶과 그가 살고 있는 하선암 주변이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오십에 펴내는 그의 시는 그의 나이만큼 또 그의 삶만큼 성숙하고 예쁘게 되어서 세상에 첫 얼굴을 들이밀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냥 시만 읽게 되면 생의 고통스런 눈물과 긴장을 여과해버리거나 통과해버린  아주 편안하게 미소지으며 읽는 시를 만나게 된다. 시어도 참 익살스럽고 의뭉스럽고 그의 얼굴만큼이나 푸근하고 토속적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다시 꼽씹어 보면 슬픔이상의 것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아들에게 아비의 생이 허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어 작은 창자가 다 따뜻하다'는 시인의 말에 그의 오십 평생이 들어있다. 직접적이지 않은 에둘러 말하는 삶의 고통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소재를 끌고 오고 자연 속에 살지만 작위적으로 무위를 강조하거나 자연을 예찬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많이 읽다보면 자연을 책상머리 앞에서 시적 이미지를 위해 끌어 온 시들이 있다. 가령 무화과를 보지 못했으면서 무화과를 빌어 말하거나  어떤 꽃을묘사하면서 꽃의 주요 사실적 부분을 틀리게 서술하는 것 말이다. 리얼리티나 발생할 개연성이 없는 '순전한 관념'은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런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지 않고 불편하다. 이에 비해 윤관영의 시는 아주 편안하다. 슬픔조차도 편안하고 예쁘다. 작위적 담담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 담담하다. 그에게서 자연은 그리고 욕망은 그대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져서 그것이 예쁘게 보인다. 그는 '착한 것은 해골까지 착하다'고 외칠 줄 아는 눈을 지녔다. 모든 것을 착하고 예쁘게 볼 줄 안는 눈을 지니기까지 그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고통마저도 예쁘게 겪어낸 기저에는 그의 낭만적 기질이 한 몫했을 거지만 그는 한때 지극한 마음으로 운동권에 몸담았을 정도로 현실문제에 천착한 사람이었다. 그 낭만적 기질이 혁명가가 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책없이 감상적인 사람이거나 안온하게 살아서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그의 시 속에 은밀히 감춰진 페이소스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독자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 시도 독자와 만남으로서 새로운 날개를 단다. '시간을 이기는 시'가 좋은 시이고 클래식이지만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시란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지긋이 나이먹은, 삶을 제대로 익힌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그의 시 <나비야, 나비야>의 한 구절처럼 '적당히 헐었고 �을 만큼 썩어서 벌꿀은 못되지만  설탕꿀이 된'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시이다.

헐고 썩어서 설탕꿀이 돤, 고통이 익어서 그 고통조차도 초월해 버린 그 페이소스를 모르는 젊은 독자에게 그의 시는 밋밋하다. 눈믈과 고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않는것, 김현의 말대로 '고통과 결부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는 것은 자본주의 마케팅의 관점에서 그에게 손해다.

한때 우리 노트를 장식하게 만든 그 모든 희로애락의 시에 그의 시는 덜 가까운 은근한 매력의 시니까 말이다.  ‘삶의 근원적 슬픔을 환기시킴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을 자아낸다’는 김명인도 이젠 '따뜻한 적막'을 얘기하는 연륜에 이르렀고 기형도가 만약 요절하지 않고 오십에 시를 썼다면 그 역시 따듯하고 껴안는 시를 썼을지 모른다. 강연호, 이기철의 후기 시집처럼.

고통을 누구보다 겪었으면서도 그러한 삶의 시기에 씌여진 시들을 일부러 시집으로 내지 않았던 윤관영 시인이 상대적으로 빛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애석하게 여겨진다. 시인도 밥벌이의 의무에서 면제받을 수 없기에, 그리고 시를 위해 바친 그의 삶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젊은 날의 시들이 있다면 좋을 터인데 그는 너무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나로선 그 점이 그를 인간적으로 더 가깝게 하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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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시의 묘미를 소개하기 위해 입은 웃는데 눈엔 눈물이 나는 시를 한 편 소개할게요.

   그의 신혼의 단칸방이 그대로 떠오릅니다.

 

<스텐 세숫대야>

 

발뒤꿈치들고 싱크대에 붙어

물 틀어놓고 오줌 누던 시절이 있었네

수배의 단칸방에는

먹이를 물어 나르는 여인이 있어

곰쥐처럼 견딜 수 있었네

-----나, 어떻게 오줌 누지?

찾다 찾다 공동 수돗가

스텐 세숫대야를 가져다 주었네

엉덩이가 곱작 담기는 어둠 속에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소리가 있었네

그 소리---

목을 감는 졸린 딸을 안은 듯 세숫대야를 들었고

버릴 곳을 찾다가

내 속에 버렸네

그 여문 옥수숫빛 세숫대야를

그 밤

내가 뒤집어 썼다네

출처 : 라이크로프트의 서재
글쓴이 : 딜레탕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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