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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앨버트 노울런 본문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앨버트 노울런,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만약에 내가 20대 초반에 이 책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 책의 좋은 점을 몰랐을 것이고, 또 그 깊은 오의를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란 말이 일색일 정도로 떠돈 그 시대에 이 책을 정독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 책은 많은 시간을 지나고 나서 내게로 왔다. 이상한 부채감으로 있던 책이라면 이해될지 모르겠다. 우연하게 중학교 1학년 필독서를 챙기다가 목록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새삼 그 부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읽었다.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든 일차적인 느낌을 내가 당시, 신학 공부를 하던 그 당시 읽었더라면 그 학문, 특히 신약개론에 관한 이해가 객관적으로 되었으리라 본다. 본래 이 책의 저자의 의도도 그렇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성서를 신격화해서는 그 줄거리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 책은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신약의 큰 가지가 뼈대가 보이는 액스선 촬영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예수의 행적이 갖는 객관적 의미를 세밀히 알려주어서 성서에 대해 신격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행위의 객관성, 그리고 예수 생존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이해로 인해, 성서의 부분 부분이 오히려 잘 이해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나는 이제 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고, 현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질력(믿음이라는 독선으로 지하철에서 무례하고 막무가내인 사람들처럼)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책은 과거를 또 한번 되돌아보게도 하였지만 예수의 행위는 사람살이의 처세, 아니면 완성된 인격이 가질 수 있는 행위의 전범을 보게 되었다. 나도 배워야 한다.
그가 가진 훌륭한 점은 당시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과 소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높이고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그 틈에서 자신을 낮추었다는 점이다. 또 위선은 사랑이 아니다는 것을 증오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간 길에 대해 책임을 졌다는 것인데, 이 부분이 훌륭한 부분이다.
내가 잘 읽고 인용할 만한 것으로 느껴진 구절은 아래와 같다. 뭐 이 정도의 내용을 인용한다고 정리를 하느냐 할 수도 있지만 정작 필요한 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증스런 발견은 아무도 키를 붙들고 있는 자가 없다는, 우리가 그처럼 세심하게 고안해 놓은 비인격적 메카니슴이 우리를 가차없이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례)요한이 호소한 것은 말하자면 사회윤리였다.
무식한 사람들로서는 우선 자신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교양을 쌓는 데만도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판이었다. 말하자면 죄인이란 운수소관이었다.
예수는 스스로 선택하여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 --- 그 대답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아주 본명히 볼 수 있으니, 즉 연민(자비, 동정)이 그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여기에 나오는 것을 보고는 좀 놀랬다)
연민만이 예수가 사람들을 치유한 유일한 동기였다. 사람들을 고통과 고통에 대한 숙명적 체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예수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예수의 죄인들과의 식탁의 우의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의 암시적 용서였다.
차별(위신)이야말로 세상의 악이 지닌 기본구조의 하나라고 보았으며, 그런 차별들이 아무 의미도 없어질 나라를 감히 소망하고 있었다.
한가지 예수가 사람으로서의 사람을 중시했음을 말해 주는 것은 여자에 대한 그의 태도다.
예수 시대의 사회에서 위시놔 돈 다음가는 주요관심사는 派黨의 결속이었다고 데렛은 논증했다.
그들은 율법을 압제의 권력수단으로 삼았다.
유대교의 외부보다 내부에 더 큰 압제와 착취의 요인이 있음을 보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에서 압제와 차별과 고통의 원인이 되던 것들 중의 하나는 종교였다-바리사이·사두가이·엣세네·젤로데들의 사랑없는 종교였다. 종교적 열성만큼 완고하기 쉬운 것도 없다.
‘신을 현양하자고 인간을 훼손하는 그런 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은 아니다. 인간의 영광을 희생시켜서만 자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신이라면 너무나 옹졸한 신이다.
내게는 <종교적 열성만큼 완고하기 쉬운 것도 없다>는 구절이 가장 크게 다가온다. 종교적 독선도 여기서 나오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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