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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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카타콤베/김사이

也獸 2008. 10. 24. 12:40

 김사이의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은 앞으로 가 더 기대되는 시집이다. ‘근 십오 년을 열렬히 사랑했던 구로노동자문학회에 큰절 올린다. 그리고 이제, 너를 움켜쥔 집착을 놓는다’는 <시인의 말>에서 보듯 집착을 놓은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시집이다. 해설을 쓴 방민호가 ‘『반성하다 그만둔 날』은 바야흐로 어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려는 자궁처럼 보인다’고 조심스레 예측했듯이 새로운 모색을 위한 그 토대로 보인다. 이는 ‘우리 사랑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는 시인의 고백에서 보듯 그 사랑이 헛것이 아니었고 식었을망정 동기와 과정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오랜 과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폐활량을 확인하기 위해-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물속에서 극한까지 오래 숨을 참은 사람이 참다 참다 수면을 치고 올라온 것 같은 상태가 이 시집이다. 뭐랄까, 다 묶어 치우려는 것 같은 느낌의.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을 세운 한 축이 시인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한 축은 <연민>이 그 몫을 맡고 있다. 나의 경우 어떤 서정이 ‘연민’의 형태로 다가오면 경계하고 본다. 이 것이 나의 것인가. 나만의 것인가. 괜한 엄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밀치게 된다. 그러나 김사이의 경우, 연민은 크고 깊어 연민의 대상을 시적대상으로 삼아도 그 정서가 시적대상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눈물 콧물을 빠뜨리며 신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객관거리가 유지되어 진술도 덤덤한 서술이 된다. 「카타콤베」에서 그것을 본다.

 

막차를 타려고 뛰어가는데

지하도 큼직한 기둥들 사이로

웅크린 돌덩어리들

아니, 인기척을 내는

소름 확 끼치는 거대한 짐승들 있다

순간 가슴 벌렁벌렁거리게 하는 이 고요

카타콤베

 

내 웃음의 이면이다

노동자도 수입하는

갖출 것 다 갖춘 불빛의 地下

지하의 지하

지하도 없는 지하

 

살아 있음을

한 끼니로 간청하다가

절망도 없이

잠을 청하는 이곳을 지날 땐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라

뼈다구만 남은 이상주의자들도 죄를 고백하며

걸어야 하는

카타콤베

 

내 등줄기에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혹처럼 자란다

나를 구역질한다

—「카타콤베」전문

 

 2, 3, 4연이 화자가 개입한 진술임에도 객관적인 서술처럼 느껴지는 것은 시적대상과 하나된(동질적인 서정성) 화자의 거리낌 없는 어투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리낌 없는 어투가 거리낌 없기 위해서 시인은 어떠했을 것인가? 끔찍하다) 독자들은 화자가 말하는 서정적 분위기에 휩싸이며 이것이 ‘노숙자’를 다룬 시라는 것조차 잠시 잊는다. 화자는 노숙자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등줄기에서/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혹처럼 자란다/나을 구역질한다’고 해 놓아서,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기에 시적대상에 대한 어떤 판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묶어 치우고 나서 새로운 길을 나설 막막함, 거기에는 과거에 나를 추동한 힘이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시인의 고투는 새로이 시작되리라 본다. 건투를 빈다, 健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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