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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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울타리 밖/박용래

也獸 2008. 12. 26. 22:36

 

울타리 밖

                      박용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少女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少年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은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殘光'이란 말은 박용래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시어지만 이 시를 보면 시를 쓰는 것이 좀 절망스럽다. 분명 나는 그러한 고장에서 살고 있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고  또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며 밤이면 더 많은 별이 뜨는 마을'에 나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와 유사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샘나고 그래서 밉고 또 짜증이 나기도 한다.

  이 시의 압권은 당연히 4연이지만 그렇다고 연 하나하나가 만만한 게 아니다. 1연에서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는 표현은 쉽지 않다. 또 2연의, 그렇게 자연스러운 시상의 흐름이 없다면 시는 마지막 연만 돋보였을 텐데, 결정적으로 3연의 부사 하나로 절정에 이른다. 바로 '天然리'라는 부사 하나로 해서 마지막 연이 빛난다.

  기회가 되면 나도 이 반나마 따라가는 작품 한 편 쓸 수 있을런지, 반성해야 할, 깊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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