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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폭설과 사막, 그 진폭 사이의 여정 본문
폭설과 사막, 그 진폭 사이의 여정
윤관영(시인)
1.
차를 몰고 여행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어 브레이크에 발이 갈 때가 있다. 볕이 잘 드는 집 한 채를 만나면 그렇다. 좋은 풍광은 감탄하다 지나가게 되고 잘 쓴 묘도 중얼거리다 지나치게 되지만 느낌이 좋은 집을 만나면 다르다. 그런 집은 똑같이 내리는 햇살이지만 주변의 볕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차를 세우고 담배라도 한 대 태워 물어야 한다.
그런 집은 대개는 산 아래 야트막하면서 좌우로 터져 있다. 볕이 잘 드는 동쪽으로 장독대가 있고 마당에는 꽃밭이 있다. 옆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있고 앞쪽으로는 텃밭이 있다. 멀리서 보면 산으로 오르는 소로가 보이는 집, 그런 집은 사람을 끌어맨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래그비’ 저택이나 ‘제인 에어’에 나오는 ‘돈필드’ 저택은 위압적이고 을씨년스러우며 어둡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저택이지 집이 아니다. 볕이 잘 드는 아담한 집은 ‘집 구경 좀 해도 되나요?’ 하면서 들어서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집은 하인마저 없다면 전혀 생기를 느낄 수가 없다. 슬레이트 지붕에 물받이를 단 오래된 집, 걸레질도 오래하면 거울처럼 빛난다는 시구처럼 반질거리는 툇마루를 쓰다듬고 싶은 집, 괜히 수도꼭지를 틀어 물맛을 보고 싶은 집, 착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주인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은 집, 그런 집이 바로 정계영의 시의 집이다. 하이데거 Heid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을 때 인간의 정의에 있어서 理性과 더불어 言語라는 또 하나의 특성을 말한 것이지만 역으로 ‘존재의 집’이 ‘언어’화 된 것이 이번 그의 시집 『푸른 바람』이다.
그의 시의 집, 그러니까 ‘푸른 바람’이 머무는 집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해 있는가?
2.
우리는 그의 집에 대해 알기 전에 집 주인인 그에 대해 알아야 한다.
‘창문마다 달그락/뽀얀 수저 씻는 소리/집집마다 소곤소곤/손끝에 뜨는 반달/오늘은/솔향기 가득 베어 문/꼭 다문 입술.’(「송편」전문, 『푸른 바람』)에서 보듯 ‘솔향기 가득 베어 문 꼭 다문 입술’의 송편을 빚는 생활인으로서 ‘뽀얀 수저 씻는 소리’를 듣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그다. ‘날마다/조금씩/내 쪽으로 기우는/무게의 추를/거부할 도리가/내게는 없다’(「사랑」전문, 『폭설』)고 고백하는 고백자이며, 또한 ‘무료해진 삶 바라보며/눈빛 잃어갈 때/문득문득/목까지 차오르는/적막’(「그리움」전문, 『폭설』) 속에 있다고 실토하는 실토자이다. 세상을 ‘지난 일들이/꽁꽁 언 채/가위 눌린 듯 무겁’게 보지만 ‘꽃대궁에 그대로 매달려 있기엔/차가운 흰빛이 너무 맑다’(「해오라기난초」부분, 제1시집 『폭설』)고 밝고 맑은 해석을 하고 하는 해석자이다. 이를 제1시집 서문에서 문효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하고 있다.
‘그의 정서는 생명과 순수, 순결 등을 표상하는 ‘빛’이나 ‘흰색’ 등으로 구체화된 것들이 많은데 이러한 사물에 녹아 있는 사랑이야말로 정계영의 사랑의 빛깔이라 말할 수 있다.‘
기억술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니체가 ‘고통’을 들었듯 맑은 영혼은 세파에 치이게 마련, ‘「사막에서 보내는 멀티메일」’은 번번히 ‘전송에 실패 하였습니다’고 정중하게 그에게 알려 온다. 그렇다면 그는 사막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존립하려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시 自畵像을 보면 그 일단을 알 수가 있다.
전시장 구석자리
얼굴 없는 그림
어깨만으로도 웃고 있네
아슬아슬 절벽에 걸린
목 없는 석상이 되어
몸통만으로도 꿈을 꾸네
무너진 목뼈 대신
무지개 한 자락 들이면
기어이
빛으로 환한 목덜미
오늘 밤, 꿈에라도.
―「꿈꾸는 자화상」전문
그는 스스로를 목 없는 존재(토르소)로 본다. 이것은 그가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어서라기보다 세상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고 자각하게 만든 것이다. ‘빛’과 ‘순결’로 대변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사랑의 빛깔의 소유자가 살기에 세상은 그의 순수함을 더럽히고 꺾기에 그 고통은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세상은 그로 하여금 얼굴 없이 ‘어깨만으로’ 웃게 하고, 세상은 그로 하여금 ‘몸통만으로’ 꿈꾸게 한다. 그는 무너진 목뼈의 존재다. 그럼에도 그는 무지개 한 자락 들여 빛으로 환한 ‘목’이고자 한다.
세상이 사막이라고 인식하는 그가 그것을 이기는 주체로 ‘낙타’를 상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래 시 ‘낙타야 낙타야’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 自慰의 노래다.
처음부터 혼자 가던 길이었지
이 길은,
젖은 눈 껌벅이며
행여
꽃이 피어 있어도
마주 보이는 부드러운 언덕에도
오래 머무를 생각은 하지 마
만일
네 등 위로 솟아오른
딱딱한 추억이 말랑해지면
걸을 수 없게 될 거야
쓰러지지 않으려고
눈동자 마주치지 않고
여기까지 잘 왔잖아
관절 하나 접어 앉으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거야
오랜 시간 앞만 보고 왔듯이
그저
가끔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가야 할 먼 길
처음처럼 그렇게.
―「낙타야 낙타야」전문
세상이 사막이니 그 길은 ‘가야 할 먼 길’이다. 그 길은 ‘처음부터 혼자 가던 길’로 당연히 외로운 길이다. 그 길은 지체할 수조차 없는 길이어서 ‘꽃이 피어 있어도/마주 보이는 부드러운 언덕에도/오래 머무를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하는 곳이다. ‘행여’라는 강조 부사까지 동원된 충고다. 그것은 왜 그런가? ‘등 위로 솟아오른/딱딱한 추억이 말랑해지면/걸을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러니까 긴장의 끈을 놓으면 다시 갈 수 없는 길인 셈이다. ‘관절 하나 접어 앉으면/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기에 그는 그렇게 자신을 채근하면서 권면하는 것이다. 가야 할 먼 길이요, 그렇기에 처음처럼 그렇게 가다가 끝날 길인 것이다.
삶을 송두리째 이고 가는데
매순간 저렇게 경쾌하다니.
―「초침」전문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로 생을 인식하는 그. 그러니 그런 그가 ‘삶을 송두리째 이고 가’면서 ‘매순간 저렇게 경쾌’한 초침’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상이 사막인 바에야 겨울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겨울은 ‘딱지 떨어진 자리/훈장이라 불러도 좋은 새살/더는 곪을 일도/쓰라릴 일도 없는 계절’(「겨울로 가는 길」부분, 『푸른 바람』)에 불과한, 도리어 긍정의 계절인 것이다.
3.
산 아래 볕이 잘 드는 야트막한 집에 사는 그는 ‘창 앞에 흰서리/날 흔들어 깨우고/수세미 머리 푹 꺼진 눈언저리/거울 속에 낯설’(「몸살」부분, 제1시집 『폭설』)어 하면서 머릿수건을 매면서 사막 같은 일상생활을 한다. 그가 자신이 사는 곳에서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밤새/모든 걸 덮어버린/소복보다 흰빛/멀고 먼 데서 왔을//몇 날/네게 갇히고 싶다
(「폭설」전문, 제1시집 『폭설』)
그가 꿈꾸는 것은 고립무원이다. 모든 걸 덮은 흰빛 속의 고립무원. 바로 그것을 염원한다. 그의 생의 자장 속의 큰 한 축의 염원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염원일 뿐, 머릿수건을 동여맨 그는 자신의 텃밭으로 가야 한다. 그의 집에 들기 전에 보이는 집 앞에 잘 가꾸어진 밭은 시의 밭 말이다. 그가 가꾸는 밭은 바로 시의 밭이다. 그 밭일은 어떤 의미인가? 시의 밭을 가꾸는 일이야말로 그가 낙타처럼 걸어가야 할 세상의 짐이자 무릎 관절을 구부리면 끝인 업의 길이다.
끝내/홀로 걸어야 하는//복사뼈 시린 길.
(「詩가 춥다」부분, 제1시집 『폭설』)
그는 그 길이 ‘복사뼈 시린 길’인 것을 안다. 그럼에도 시려도 가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가야만 한다는 당위도 충만하게 결부되어 있다.
물 가득 채운 항아리/들여다보면/고스란히 담겨 있는/나만의 하늘
(「시詩에 대한 생각·5」전문, 제1시집 『폭설』)
그에게 시는 ‘나만의 하늘’이다. 그러니 이 농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삶의 전부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아니, 성장케 한다.’는 김수이의 말에 의하면 시는 무가치한 잉여일 뿐인데, 그는 왜 그렇게 시에 집중하는 것일까?
이월의 밤
품으로 안겨드는 봄바람에
흔들림 없던 뿌리
詩의 속살과 만나
지금, 막
움 하나 틔운 땅속에
강력한 지진경보가 내렸습니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전문
그에게 시 한 편의 탄생은 ‘지진경보’와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시 농사의 위력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속살과 만나 움 하나 틔우는 시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러나 농부에게 농사가 가장 어려운 일이듯 시인에겐 시 쓰는 일이, 아니 시 농사를 제대로 짓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운 일이다. 내가 바라마지 않는 시는 내 가까이 있지 않고 건너편에 있다. ‘산들거리는 바람 타고/맨발로 단숨에 달려가지만/강렬한 희망뿐//바라만 보는/가질 수 없는’(「시詩에 대한 생각·2」부분, 제1시집 『폭설』) 것이 시다. 다가갈수록 멀어져 가는 얄미운 그대, 바로 시의 여신 뮤즈가 아닌가. 농사를 수확하고 나면 그것은 ‘남루하고 무른/켜켜이 허허로운’(「유혹」부분, 제1시집 『폭설』) 것들 뿐이다. 시 농사는 지을수록 절망만 가져온다.
꽝 대못을 친다 길고 긴 詩벌레들이 필사적으로 꿈틀대며 되살아나/나의 두 손을 묶고 몸을 훑으며 유유히 빠져나간다(「천형의 시간」부분)
‘울지 않’은 사실을 자랑삼아야 할 정도로 힘든 농사가 시 농사다. 나의 두 손을 묶고 게다가 몸을 훑으며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빠져나가는 존재가 바로 시다. 이 헛것이 시 농사다.
벼랑에 선/떼지 못하는 발바닥이 가렵다/드러난 뿌리 한 가닥 움켜쥐고/연필심을 깎듯 깎아본다/칼은 무디고/시간의 거미줄에 걸려/말라붙은 형용사가 늘어간다/꼼짝 못하는 너도/발바닥이 무척 가렵겠다/피가 나도록 긁어도/여전히 가렵다.
―「날마다 습작」전문
이 대목에서 김수영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詩人이라는 혹은 詩를 쓰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큰 부담이 없다. 그런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事物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와진다. 그런데 이 의식을 없애는 노력이란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무척 힘이 드는 노력이다.’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어려운 것이 시 농사이니 이 농사는 지을수록 어렵고 늘 패배하기 일쑤다. 지어놓고 만족스러운 경우가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있기가 힘들다. 그래서 농사의 연장인 연필을 정성스레 깎아도 농사는 부실하고 그 자책으로 나는 가렵다. 오죽하면 농사꾼이 나는 ‘견습생’이요, 내 농사는 ‘습작’이라고 자신을 낮추겠는가. 물론 이런 이면에는 다른 기대가 있기에 현실적 고뇌를 견디며 열심일 수 있다.
혹시 누가 알까/길 어디쯤 지쳐 넘어져 있을 때/바로 그 때/당신의 모습이 보일는지.
(「다시 詩에 대하여」부분, 제1시집 『폭설』)
성공적인 농사. 바로 시의 모습이 보이는 바로 그 때를 기다린다. 그것을 기다리면서 실패한 농사를 가다듬고 가다듬는다. 마치 열무 농사를 짓고 열무단을 묶는 것도 아주 소중한 일이다. 그것도 일의 연장인 것이다.
말의 잎을 딴다/묵은 땅의 기운과 발품으로 자란 첫 잎/말맛의 물기와 버무려/불기운도 고르게 덖는다/여기쯤서 결정되는 詩의 향/팔팔 끓여 한 김 나간 물을 붓고/우러나는 동안 응시한다/영혼의 무늬마다 배어든 녹청/두 번 세 번 우릴 때마다 맛이 다르다/두 손으로 조심스레 따른다/그러고 나서야 숨을 쉰다.
―「퇴고」부분
그의 시 농사는 바로 찻잎을 따고 우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것이 먼저지만 말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집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피어난 메밀밭 같은 그의 시의 밭이 넓게 보인다.
4.
누구에게 있어서 세상이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 도(道)를 이룬 비운 마음일지라도 세상살이는 엄연히 객관실체로 존재한다. ‘오늘은 그믐달이 옅은 구름 속에 있어요/사람살이도 그’(「마음」부분, 『푸른 바람』)러해 삶은 시난고난 실재하고 있다. 그가 ‘어서 와/이 숲에 조그만 나무의자가 있’(「초대장」부분, 『푸른 바람』)다고 친구를 부르는 것도 이 세파의 흔듦 속에 있기에 그렇다. ‘홍옥껍질/꽉 깨물었을 때처럼/입 안 가득 향기로운/웃음 물고 있’(「옛 친구」부분, 제1시집 『폭설』)는 친구를 부르는 것도 세파에 흔들리는 자신을 세우는 방법 중의 하나다. 이것은 그가 그의 집을 가꾸고 살아가는데 지불해야 할 대가 같은 것이다. 그의 집과 그의 밭은 그가 가꾼 땀과 열정의 소산이다.
그는 가끔 산으로 가는 소로를 오른다. 집일에 지친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는다. 나를 가장 위로하는 존재는 제일의적인 존재는 선대 핏줄이다. 그들의 생을 회억하는 것만 한 힘과 위로가 없기에 그렇다. ‘대숲에 앉아/퉁소라도 부시나요/묵향에 취하셨나요//아직 남은 체온/아버지 손은/이렇게 따뜻하기만’(「보고 싶은 얼굴」부분, 『폭설』) 한 아버지를 느끼기도 하고 ‘반딧불이보다 더/빛나는 지혜로/험한 길 비추시는 당신’(「영원한 요람」부분, 제1시집 『폭설』)인 어머니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내 나이 때, 선대의 그가 외로웠을 어느 시점을 추억하는 것만 한 힘이 없기에 그렇다.
그의 산행은 그의 집을 벗어나 소로를 따라 아비와 어미를 추억하고, 궁극엔 산 정상을 향한다. 그것은 그가 야트막한 시의 집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마음과 더불어 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에 다름이 아니기에 그렇다.
산등성이 올라/가까워진 하늘 바라보면/우주의 작은/그저 작은 티끌 되고//바람 따라 코끝에 와 앉는/들국화 향기에 취해/눈 감아보면/이름 없는 비석 뒤로 흔들리는 억새
(「수리봉 비가」부분, 제1시집 『폭설』)
산에 오르는 일은 그것이 따로 의미두지 않더라도 ‘티끌 같은 존재로’ 스스로 뒤돌아보게 하고 또 자연과 혼연일체 되어 ‘들국화 향기를 맡으’며 종국에는 ‘비석 뒤로 흔들리는 억새’를 보게 한다. 이것은 그가 예민해서라기 보다 산과 산행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한다. 그렇기에 그는 그렇게 자주 산에 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시의 밭을 가꾸는 것이리라.
초가을 수종사 삼정헌
찻물을 우리며
다포에 놓은 수를 들여다본다
나도 수를 놓고 있다
둥근 수틀에 팽팽하게 당겨진
무명천 위에 한 땀 한 땀
물봉선 꽃잎을,
착한 사람의 눈물을 새기고 있다
목숨 걸고 사랑하겠다며 흘리던 눈물
못내 버거워 시들어가는 얇디얇은 꽃잎
황홀하게 피어나던 꽃숨 닮은 어진 사람아
땀땀이 바늘 지나간 자리
우리 약속 꽃자리로 수놓이고
돌층계 아래 물봉선 지는 소리
두물머리에 섞여 끝 모를 곳으로 흘러간다.
―「물봉선 지는 소리」전문
산을 오르다 보면 산 좋은 풍경에는 반드시 절(수종사)이 있다. 절이란 세속에 있으나 세속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존립하는 제단 같은 것. 생의 발길을 멈춰 자신을 객관화 시키는 곳. 손바닥에 찻잔을 올려놓고, 그것을 자신을 마시듯 하는 시간이 어찌 없을 수 있으랴.
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착 가라앉은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 다포에 놓인 수조차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다포에 놓인 수가 팽팽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당겨 그 한 땀 한 땀이 마치 ‘물봉선 꽃잎’으로 환생해 착한 사람의 눈물로 현현한다. 착한 사람의 사랑은 지고지순한 것, 어찌 목숨을 걸지 않겠는가. 외려 사랑에 목숨을 걸어 시들었기에, 수 놓인 모습으로 황홀하게 피어나는 꽃숨 닮은 어진 사람이었기에 약속이 상기된다. 이 상기된 고양은 최고조에 달해 자연과 감응하여 ‘돌층계 아래 물봉선 지는 소리’를 듣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산에 가고 산에 가면 절을 거친다. 절의 통과의례를 기껍게 맞는다.
뒤란을 따라 산으로 가는 길이 그에게 있다면 세상으로 난 길도 있다. 멀리로는 ‘인사동 볼가 카페’에 가기도 하고 그의 집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기도 한다. 포장마차를 ‘겨울 거리에/소박한 집 한 채’로 보는 그의 눈이 맑다. ‘시인은 이슬을 마시는데 참이슬을 마신다’는 유머처럼 세파의 그를 위로하는 공간이 바로 포장마차다. 그가 그 공간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느낌은 그의 성정을 닮아 ‘유순한 빛’이다. 그곳의 분위기를 ‘유순한 빛’으로 읽으니 나머지들은 저절로 풀린다. 그곳엔 ‘훈훈한 마음들’이 존재하고 ‘낯선 사람/뒤따라 들어온/알싸한 바람’조차 어깨를 밀착시켜 더없는 인연을 만드는 고마운 여건이지 시련이 아니다. 포장마차는 그에게 어쩔 수 없이 가는 피치 못한 곳이 아니다. 그곳은 ‘겨울 거리에/소박한 집 한 채’다. 그 집에 들고 싶은 충동이 인다.
유순한 빛으로 매달린
백열등 때문인가
덤으로 주는 술적심 때문인가
훈훈한 마음들
포장 젖히고 들어서는 낯선 사람
뒤따라 들어온
알싸한 바람은
서로의 어깨를 밀고
건네는 술잔에 담긴
질긴 인연
스러지는 기억 속에 가두고 나서면
멀어지는 유순한 빛
겨울 거리에
소박한 집 한 채
(「포장마차」전문, 제1시집 『폭설』)
5.
그에게 세상은 사막이다. 그러나 그 사막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사는 단독자로서 그리워하는 이상향이자 또한 세상살이의 고난을 드러내는 모순된 이미지다. 그러나 그것은 선량한 단독자가 세상을 견디는 과정에서 인식된 것으로 거꾸로 그의 善根을 드러내 준다. 그가 포장마차를 ‘유순한 빛’으로 읽는 것이나 ‘물봉선 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단비 내린 오늘/낮게 엎드려 귀 대보니/네 심장소리가 부쩍 크게’(「새싹」부분, 『푸른 바람』) 듣는 이가 바로 그다. 선량한 그이기에 봄에 기울어 있으며 그 천착이 깊다.
꽃봉오리 터질 무렵 비
창 가득 오신 봄
비의 숨 닿는 곳
기억의 무늬마다 흔들리어
이제는 벙글겠구나 생각 말고는
얼었다 녹고
녹았다 얼었으니
단단해졌겠구나 생각 말고는
안간힘 썼을 가느다란 물줄기
뿌리 깊어지겠구나 생각 말고는
창밖보다 먼저 핀
동백꽃 무명수건 꺼내들고
창을 닦을까 말까 생각 말고는.
―「다만」전문
이 시는 참 단아하다. 꽃봉오리 터질 무렵 봄비 오는 정황속의 그가 선하다. 여기서 ‘생각 말고는’은 그 생각 말고는 더 생각할 것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벙글겠구나’ 외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고, ‘단단해졌겠구나’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고, ‘뿌리 깊어지겠구나’ 하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창을 닦을까 말까’ 하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봄비 맞는 꽃나무가 있는 정황이다. 꽃나무는 가혹한 겨울을 건너와 이제 꽃 피는 것. 무한 긍정과 찬사가 있을 뿐이다. 근사하지 않은가.
목련 한 그루
공중전화부스 옆 조등으로 걸린다
수화기를 든 담담한 손끝
어디다 먼저 알려야 할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기억나지 않는 전화번호
빛바랜 수첩을 뒤진다
쩡쩡 울리던 싯푸른 하늘
봄바람에
뽀얀 조등 하나 걸면 그만인 것을
아무데도 알리지 못하고 돌아설 때
싶은 곳에서 울리는 수신음
떠난 겨울 조문弔文을 쓴다.
―「봄 들머리」전문
봄 들머리에 백목련이 핀다. 공중전화부스 옆에 조등으로 핀다. 그러나 ‘조등’이라 하여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이 소식을 ‘어디다 먼저 알려야 할까’ 하고 빛바랜 수첩을 뒤지게 하는 반가운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깊은 곳에서 울리는 수신음을 듣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떠난 겨울 조문弔文을' 쓰는 것이다. 공중전화부스의 붉은 색과 백목련의 흰 빛, 그리고 목련의 만개를 반기는 마음과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조문을 쓰는 마음이 겹쳐 유화 같은 이미지가 섞여 피어오른다.
흰색, 대숲의 공명과 이승의 매듭 푸는 날
노랑, 눈물 흐르는 텅 빈 동공
주황, 창마다 내비치는 신문지 크기의 행복
빨강, 맹렬히 울어대는 매미의 목청
초록, 알싸한 아픔이 지나가는 자리의 맥박
파랑, 빛의 속도로 삼 년을 달려온 별의 크기
보라, 길을 잃어도 좋은 칡꽃 향기
회색, 보헤미안랩소디 부르는 우울한 동물
검정, 소통되지 않는 몸과 맘의 길
투명, 옹이 박힌 나무와 옹이 빠져나간 마음자리
그녀와 손잡고 사막으로 간다
그녀가 빨강과 주황은 집어 들지 않을는지 몰라
투명한 색 위로는 별들이 내려와 앉고 흰색과 잘 어울리는
파랑은 더욱 돋보일 테지
거기서 우린 더 이상의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림물감」전문
선량한 그는 야트막한 조용한 시골집에 살면서, 산을 오르고 절에 가고 시의 밭을 가꾼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차를 마시면서, 봄을 기다리면서 귀가 발달한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낸 시가 바로 위의 시 「그림물감」이다. 색과 색의 미세한 차이를 성찰의 힘으로 구분해 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힘이 아닌가 한다.
이 시는 색으로 읽는 그의 세상에 대한 해석의 시다. ‘길을 잃어도 좋은 칡꽃 향기’가 ‘보라’인 것도 새롭지만 (굳이 하나하나의 색에 대한 거명은 피하더라도) 이 시에는 그의 염원이 다 들어있다. 이 색깔들을 끌어안고 ‘손잡고 그는 사막으로 간’다, 그의 이상향인. 그가 빨강(맹렬히 울어대는 매미의 목청)과 주황(창마다 내비치는 신문지 크기의 행복)을 집어 들지 않을는지 모른다는 예측에서 보듯 다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투명과 흰색은 그에게 긍정적인 색이다. 이는 마치 繪事後素의 바탕이 있어야 이후 원하는 그림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상태는 투명과 흰색 위에 얹히는 파랑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그림을 기대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 일일지 모를 정도로 그가 완벽하게 생각하는 색의 상태다.
카샤비아를 입고
돌개바람 지나간 모래 위
맨발로 건너자
튀니지안 블루가 넘실대는 골목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맨몸으로 사랑을 나누자
붉은 도마뱀 기차를 타고
은밀한 협곡을 지나며
비밀스런 이야기도 속삭이자
어둠이 내리면
대추야자에 불을 지펴
잿더미 속에 빵을 굽자
가끔 태워서 바삭하고
온통 까끌까끌하게 구워진
서툰 시간을 곱씹으며
다시 사막을 건너자.
―「푸른 바람」전문
이 시는 그가 우리에게 내미는 사랑을 淸遊하자는 請誘다. 대개의 청유는 그 권유로 강압을 주기 십상이고 진부로 떨어지기 쉬운데, 그의 청유는 권하는 상대의 가치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기에 끌린다. 옳고 그름을 넘어선다. 바로 정서행위기에 그렇다. ‘맨발로 건너자’고 맨발의 그가 손을 내밀고, ‘맨몸으로 사랑을 나누자’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당당해 한다. 또 ‘비밀스런 이야기도 속삭이자’고 속삭이면서 ‘잿더미 속에 빵을 굽자’고 힘을 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사막을 건너자’고 말한다. 그것이 어떻겠느냐고 웃음을 짓는다.
6.
‘인간은 이상과 현실, 꿈과 실재, 성과 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자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생을 일구어 가는 존재이다. … 서로 이율배반적인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감내해야 하는 갈등과 고통의 무게도 비례해 증가하게 되듯(엄경희)’ 그의 시는 ‘폭설’과 ‘사막’ 사이의 진폭을 갖는다. 그 떨림 속에, 진자 운동 속에 그가 위치하고 있다. 그 속에 그의 動線이 있다. 그는 女情을 지닌 모성의 존재다. 그런 그가 이번에 펴낸 『파란 바람』(제2시집)은 그가 ‘폭설’과 ‘사막’ 사이에서 겪는 旅程에 다름 아니며 그 旅情이 餘情으로 형상화 된 것이 이 시집이다. 餘酲의 내가 이 시집을 제대로 읽었는지는 내가 나에게 내리는 의문이다.
현재 한국 시단의 시에는 화자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뿐 의미전달의 대상인 청자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의 자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 저에 취해 제 말만한다. 밀교적인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풍토 속에 그의 노래는 나직하고 소박하다. 청자와의 교감하려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대로 생으로 살아 있다. 정계영의 이 번 시집의 가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소설 『제인 에어』에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라도 걸어서 올라갈 기세로군 그래!’ 제인 에어의 포기하지 않는 고집을 보고 한 말인데, 이 말은 그에게도 들어맞는다. 사막을 걷듯 한발한발 고집스레 걸어온 길의 흔적이 이 시집이다.
이 시집을 본 후에는 불빛 유순한 포장마차에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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