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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장인수 시집 서평

也獸 2009. 11. 18. 20:30

장인수 시집 『온순한 뿔』

구름 속의 비 냄새를 맡는 천진과 야성의 뿔질

                                                       윤관영 자문위원

 

 

 ‘독자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사물을 관장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늘 사물과 대상보다 살짝 낮은 위치에서 바라보려는 난쟁이여야 한다(「시작노트」)’는 생각 때문일까. 장인수의 시는 쉽게 읽힌다. 그러나 깊다. 또 사물을 보는 시각이 새롭고 그를 통한 사유가 깊다. 장인수의 시는 쉽게 읽히나 가볍지 않다.

 ‘곯는 젖배를 문대며 엉금엉금 기어가/식혜 항아릴 쉰 밥알을 멍울멍울 빨어먹던 곳/거미가 실 끝에 묻혀오는 몇 톨의 달빛과/짠지처럼 푹 삭은 그늘이 살고 있던 곳/나는 그 시큼한 그늘을 핥으며 배를 채우곤 했다/그 그늘은 내 창자까지 밀려들어와 휘젓곤 했다’(「토광」)는 토광이 그의 시의 진원지이다. 그의 시를 산출하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을 지배한 공간인 토광에서 그의 시는 배태되었다.

 「바람, 바람, 바람」, 「바람의 직계」, 「소금」, 「死線을 뚫는다」, 「늑대」, 「별」등의 시에서 보듯 ‘어떤 사물’에 대한 ‘어떤 생각’이 형상화된 시보다는 어떤 상황이 만들어낸 자리에 있을 때 그의 시는 빛을 발한다. 풍경은 마음의 상태라는 아미엘(H.F.Amiel)의 말은 장인수의 시에 적용할 수 있는데 여기서 어떤 상황은 풍경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장인수는 그런 류의 시에 대해 그 가치를 못 느끼는 듯하다. 시 「할머니, 귀엽다」를 첫 시집에서 제외한 일이라든가 『시안』37호에 실렸던 시 「혀」가 빠져서 하는 말이다. 시 「혀」는 당시 필자가 리뷰한 시 「빵집에는 돼지가 산다」만큼이나 강렬했던 시로 장인수 시에 변화가 오는 단초로 본 적이 있었기에 그렇다.

‘시골에 갔더니/젖 빠는 소리가 요란하다/송아지, 강아지 모두 젖을 빨고 있다//앗! 에고, 이놈의 날벌레!/귀로 쳐들어간 날벌레 때문에 팔팔 뛰는 엄마/출렁이는 젖팅이!//어머니, 괜찮으세요?/아내가 놀란 듯 화들짝 부산떨 때/덩달아 애교를 떨며 출렁이는 아내의 젖팅이!/헉! 나는 젖 네 개의 출렁임에 넋을 잃었다//돌어켜보니/내가 빤 젖은 고작 엄마와 아내 젖뿐이었다/오! 불쌍한 인생//내 아랫도리는 이미 절반은 해탈했고, 절반은 포기했다/세상의 암컷이여/너희들의 아랫도리는 탐할 마음이 없다//하지만, 나의 혀는 아직도 맹렬한 블랙홀이다/세상 모든 젖꼭지를 따먹고 싶다/동냥젖을 얻어먹었던 심청이가 부럽다//방울토마토, 딸기, 포도, 오디와의 키스/나이가 찰수록 나의 혀는 많은 역할을 하고 싶어진다/세치 혀는 왕성하고, 용맹하고, 미쳤다//아내여,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우주를 다 핥고, 빨고 싶은 남편의 혀를!’

 좀 수다스럽고 격앙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 시에서 장인수의 변화를 읽었었다. 과잉에서 오는 아슬아슬한 맛도 이 시에는 있다. 그런데 제외했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문제는 어떤 상황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장인수 시는 용맹한, 왕성한, 묘사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2009 충북 진천

용대 마을의 장충남씨 댁 툇마루

햇살 고운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성기를 정성스럽게 핥고 있다

두 다리를 좌우로 쩍 벌리고 척추를 동글게 오므리고

혓바닥이 마르고 닳도록 자신의 음부를 핥고 있다

대청소를 하듯 점점 선명해지며 반짝이는 음부

제 몸의 정전기를 없애기 위해 핥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눈동자보다 더 깊이 반짝이는 음부

보석 같은 음부

69살의 장충남씨는

씨감자를 텃밭에 심느라 여염이 없다

⎯「보석」전문

 별난 해석을 요하지 않는 시다. 굳이 해설거리나 장치라면 ‘69’라는 성 체위, ‘장충남’이 남자이면서 ‘정충’을 연상시킨다는 것, 하필이면 ‘씨감자’냐는 것 정도다.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 남의 집에 들어가, 본, 우연히 지속적으로 관찰한 고양이의 행위가, 그 묘사가 생의 어떤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음부는 ‘보석’이고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보석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와인을 사들고 불쑥

형 집에 갔더니

일곱 마리의 강아지들이 졸래졸래 뛰어나와

손가락을 핥고, 빨고, 야단이었다

엎어진 개밥그릇 위에 걸터앉은 나는

일곱 마리 혀의 애정 행각에 맡겨져

짐승의 어린 시간을 섞고 있었다

오늘은 형의 생일

어둠이 가장 사소한 영역에

소리 없이 스며들며

노을을 흩뿌릴 때까지

형은 소식이 없고

일곱 마리 애정은

신발끈을 고기처럼 물어뜯는데

노을의 붉은 혀는

조용히 마당의 테두리를 핥고 있었다

⎯「짐승의 시간」

 ‘어떤 사물’에 대한 ‘어떤 생각’을 형상화 한 시보다는 어떤 상황이 만들어낸 자리에 있을 때 그의 시는 빛을 발한다고 한 말이 딱 들어맞는 시가 위에 있는 시다. 그가 형의 생일을 맞아 아무도 없는 형의 집에 들었을 때의 상황이 이 시다. 강아지 일곱 마리와 보낸 시간, 그러니까 ‘어둠이 가장 사소한 영역에/소리 없이 스며들며/노을을 흩뿌릴 때까지’ 있었던 시간의 기록이다. 그의 시가 예각적이면서 사유가 깊다고 했는데, ‘일곱 마리 혀의 애정 행각에 맡겨져/짐승의 어린 시간을 섞고 있었다’는 ‘짐승의 어린 시간’이라는 부분이 이 시의 개성이면서 화자의 긴 시간이 가져온 깊은 사유가 아닌가 한다.

 그의 시에는 유난히 핥는 것이 많다.

 

앞니 몽땅 빠진 잇몸 사이로

뒤의 뻘이 들여다보이고

왁자한 썰물이 입술 주름 사이로 쭈글쭈글 지나간다

누런 콧물 훌쩍이며 벌서고 있는 다섯 살 녀석이

앞니 네 개 빠진 입술로 대뜸

“와! 할머니, 귀엽다.”

그 말을 잘못 들은 부엌의 아내가

식칼을 든 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어머, 정말 가엽네.”

⎯「할머니, 귀엽다」부분

 

 시 속의 시인은 지금 일요일 아침 집에서 아들 둘과 있고 아내는 요리 중이다. 아들이 티격태격하고 싸우다 엄마에게 혼나고 언뜻 본 텔레비전에서 장봉도 섬의 할머니가 나온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아들의 ‘할머니, 귀엽다’와 아내의 ‘할머니, 가엽다’이다. 이 빠진 할머니와 이 빠진(미운 일곱 살처럼 말 안 듣는) 둘째 아들이 대비 된다. 물론 여기서는 할머니 입술 주름 사이로 썰물이 쭈글쭈글 지나가는 형상력의 힘을 받는다. 이처럼 장인수의 시는 어떤 풍경에 풍덩 빠질 때, 그 풍경에 힘 입어 묘사라는 형상력과 깊은 사유가 나온다. 이 시도 첫 시집에서 빠지고 오탁번 선생의 리뷰에 힘 입어 이번 시집에 실린 것인데, 장인수 스스로가 이런 경향성의 시를 자신의 특징으로 안 보고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시골집에는

짐승이 뛰놀던 터가 있다

평상平床에 누워있으면

살살 발가락을 핥아대던 짐승

초등학교 때 염소를 쳤다

다섯 마리가 불어서

삼십 마리가 넘은 적이 있다

등교할 때 냇둑에 풀어놓았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퍼부은 날

우루루 학교로 몰려와

긴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비 그치고 내가 앞장을 서니까

염소들이 새까맣게 하교를 했다

염소는 수염이 멋있었다

암컷도 살짝 수염이 나 있었다

사실 염소는 새까맣고

주둥이는 툭 튀어나왔고

울음은 경운기처럼 털털거리고

아무거나 먹어치우고

두엄에도 잘 올리가는 천방지축이었다

얼룩을 좋아하고

뿔도 삐뚤어졌고

농작물도 닥치는 대로 뜯어먹고

신발 끈도 씹어 먹으며

나쁜 짓을 골라서 하는 골목대장이었다

하지만 먼 곳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높은 바위를 잘 타며

구름 속 비 냄새를 맡을 줄도 알고

꽃도 열심히 따 먹고

가시 달린 찔레순도

찔리지 않고 잘 씹어먹었다

무엇보다도 눈썹이 길어서

눈가에 하늘거리는 멋진 그늘을 가졌고

뿔은 온순한 고집이었다

염소도 식구였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온순한 뿔」

 

 이 시는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다. 물론, 그걸 제어하지 못한 천방지축은 아니다. 이 시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있고 도시와 시골이 있고, 체험과 생각이 있고 고향과 타향이 있다. 유년, 즉 과거는 그리 먼 과거가 아니기에 생생하고 생생하기에 그리운 현재다. 장인수의 시는 정제된, 혹은 계산된 이라 할 수 있는 엄격한 단정함 보다는 염소를 몰고 가는 헐거운 몰이 채 같은 흐트러진 이합집산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고전의 단순성과 간명성을 피상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피상적인 생각이다. 어려울 것 없으면서 깊이와 울림을 가지고 있어 소리와 깊이의 의젓한 균형이란 맥락에서 장인수의 시는 고전적 전범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좋은 시는 정서에 호소하든 감각에 기대든 이지에 설득하든 ‘넋의 떨림’을 유인한다. 시 「울음 곳간」, 「정곡」등은 좋은 시지만 절정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울음 곳간이라는 개성적인 사유에 이르지만 ‘마누라의 수다’로 떨어지고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을 정곡이라 명명하지만 자궁으로 들어앉히는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온순한 뿔에 이르기는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장인수 시의 자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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