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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오전 열한 시/서하

也獸 2010. 12. 31. 14:21

 

 

오전 열한 시

                서하

 

 

오전 열한 시,

벽 등지고 앞이 탁 트인 자리

햇살도 저 혼자는

서랍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햇감자 같은 손잡이가

잠시 제 몸 열어 보인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 사이로

나비처럼 눕는 햇살

한 귀퉁이가 가늘게 기우뚱한다

그저 담아놓기만 해도 좋았던 골목과

아이의 해맑은 껍질들이

한 마을을 이룬다

포개진 다리와 팔짱을 꼈던 팔들이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랍은 날마다 작아진다

돌돌 말아 놓았던 길 하나 펼쳐본다

지난해 걷어서 입혔던 바지가

열한 시처럼 덩그렇다

살다보면 축 늘어진 근심도

이처럼 짧아질까

나비처럼 누웠던 햇살의 팔과 다리

한 뼘씩 짧아져 있다

 

*오전 열한 시의 풍경이 모자이크처럼 짜여져 있다. 그것은 마치 멀리서 보는 모자이크처럼 상이 분명하다. 모자이크는 근경에서는 형상이 안 떠오를 정도로 무척이나 거칠어야 한다. 그래야 멀리서 볼 때 제대로 상이 잡힌다. 근경에서 좋게 느껴진 것은 멀리서 보면 형체가 흐릿하기 일쑤다. 이 시는 오밀조밀한 열한 시의 풍경이 스킬자수처럼 모양과 색감이 어울어져 포근하다. 좋다.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상재를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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