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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먼지폭죽-도배일기21/강병길

也獸 2011. 1. 21. 16:40

먼지폭죽

-도배일기21

               강병길

 

 

두툼한 솜이불처럼 먼지  쌓인 장롱을 들어내다

쏟아지는 편지봉투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묵혀 두었는가 싶었는데

축의금 봉투였다

십 년은 족히 지난날의 축하가

먼지폭죽이 되어 터진다

즐거운 잔치에도 눈물 보이는 아쉬운 정서는

소리 없이 쌓여 있었다

 

차곡차곡 발길 닿은 순서대로

동그라미 안에 숫자까지 표시한 빈 봉투들

파먹고 남은 수박껍데기를 말려 놓은 듯 내용물 없는 봉투가

어떤 삶의 시작엔 발아의 거름이었으리라

 

쉽게 버릴 수 없는

답장을 보내지 못한 이름들을 추스르며 주인은 감회에 젖는다

허리도 펴기 전에 허공에 쓰는 엽서엔

비장한 먹물이 뚝뚝 흐른다

"이게 다 빚이여"

 

*이사 많이 다녀봐서 이런 속사정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이 시는 정서적 감염력이 크다. 무엇보다 '파먹고 남은 수박껍데기를 말려 놓은 듯'하다는 이미지가 좋다. 그런 봉투를 모아두는 나의 어머니도 그것을 갚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하여간 이삿짐은 한번 드러내야 숨었던 무엇이 드러난다. 그건 즐거움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하다.

*시집 <도배일기> 상재를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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