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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사과합니다/이제야

也獸 2013. 1. 18. 00:42

 

사과합니다

              이제야



안부가 궁금하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착하게 안부에 답했습니다. 요즘엔 이런 제철과일이 나왔고 비에 과일 계급이 높아졌다면서요. 나는 과일 맛도 모릅니다.
오래 못 만났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정직하게 시간에 답했습니다. 몇 번의 밤을 보냈는지 답했고 벌써 10일이구나 손으로 셌습니다. 나는 3일까지 세다 말았고요.
근처에 왔어, 들른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성실하게 거리에 답했습니다. 지하철역 2번 출구보다 3번 출구 육교를 건너는 게 낫다면서요. 나는 가던 길로 가렵니다.
밥 사달라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푸짐하게 양에 답했습니다. 파란 얼굴에 좋은 보석 밥과 꽃 반찬을 얹어주면서요. 나는 미안하게도 좋은 것일수록 바로 소화합니다.
시간이 괜찮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세밀하게 초심에 답했습니다. 달 얼굴이 더 깨끗해질 때까지 차를 마시자고요. 나는 달 대신 형광등에 얼굴을 비춥니다.
다음은 무슨 말로 만났느냐고요. 그만하렵니다. 배도 안 부르고 시간이 흐르지도 않습니다. 계속 밤이었고 맛을 몰랐고 달은 어두웠고. 외로운 두 개의 팔이 네 개가 되려고 애쓰는, 만남 앞에 근거가 뱉어져야 하는, 그런 무책임한 두괄식 만남은 그만하겠습니다.
중심문장만 있었네요. 혼자여도 진실만 말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는 자꾸 사과합니다.

<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

 

*부대찌개나 먹으려고 우린 만났습니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 맛있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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