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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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비박/김은경

也獸 2013. 3. 27. 11:17

 

비박

     김은경

 

 

배낭이 무겁습니다

한쪽이 기운 그림자는 무력합니다

신도림행 전철은 좌측 방향

영하의 추위를 막아주는 장갑이 한 켤레 천 원입니다

전철의 무료를 달래는 몇 벌의 죄는 무상입니다

실종된 사람들이 철로에 가득합니다

실종된 엄마는 엔젤나이트에서 부킹 중입니다

파산한 아빠는, 영원히 실종해버렸으면 싶습니다

 

국철을 타고 산으로 갑니다

파도가 그리운 사람들은 허공에다 이어폰을 꽂습니다

피가 모자란 사람들은 술잔을 채우고

햇빛이 부족한 아이들은 햇빛을 원망하며 자랍니다

 

철로에 눈이 내립니다

심해에도 눈이 내립니다

선글라스 속 눈동자에도 내릴 겁니다

눈은,

 

배낭을 다시 부립니다

저만치 능선이 보입니다

끝은 어디인가요

얼마나 정상은 아득한가요

아이젠을 벗고 눈 더미 위에 지팡이를 꽂습니다

 

개의 혓바닥처럼 붉은 단풍이

나를 봅니다

나의 혓바닥엔 어느 날의

입맞춤이 고여 아직 따뜻합니다

 

컵라면이 알맞게 익을 동안 우리는 기도합니다

근위병처럼 선 낙엽송들이

어둠에 덮여가는 설산이

두터운 입술을 열어 자장가를 부르지 않아도

 

어떤 날카로움으로도 별을 짓이길 수 없는

새벽이 깊어갑니다.

 

*시집 <불량젤리> 출간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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