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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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노을 만 평/신용목

也獸 2023. 3. 9. 00:09

폐염전에 비하면 내 자리는 너무 풍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지천으로 나는 풀은 지겨웠으나 과하게 풍부했다. 지치게 풍요했고, 집요하게 풍요했고, 지독하게 풍요했다. 내 걸음에 닿는 곳이 그랬다. 계곡에는 돌이 많았고 물은 흘렀고 주변은 녹색, 일색이었다. 왜, 인가? 내 자리가 산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랬나 싶다. 물 깊은 곳이어서 그랬나 싶다.

일찍이 찾아 정착한 자리가 그랬다면 부득이하게 자리한 서울도 풍요하다. 사람과 물질이 넘친다. 다만 내가 그 자리매김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불화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결핍은 나의 탓이지 주변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있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 바람은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말하자면, 없다. 아마 설핏 불가능을 눈치 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바라는 것 따위는 진정한 바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노을도 산 위로 넘어가는, 일찌감치 넘어가 서운한, 그런, 외려 산 빛의 녹색이 노을 색을 눌러 버리는 그런 검은 서정이었다.

 

노을 만 평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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