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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비 끝/정병근

也獸 2023. 5. 4. 00:06

정병근 시인의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을 읽었다.

그는 시집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밤새 중얼거리는 것을 듣다가 도망친 적도 있다.)

중얼거린다는 것은 자동화된 습관이거나 행동이다. 전달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시와 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공간에 따라 달라지지도 않는다. 단지 중얼거림에는 옹알이 같은 몸(영혼이랄 수도 있는)의 진정성이 있다. 아마 그마저 없다면 그것은 중얼거림이 아니라 소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중얼거림에는 전언이 아니라 희노애락, 그러니까 감정의 굴곡이 있다. 감정의 깊이와 폭이 있다. 무시할 수도 없지만 알려고 달려든다고 해서 뭔가 캐낼 수도 없다. 그것이 중얼거림의 특징이다. 중얼거림에는, 되새김질하는 소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처럼 듣는 이나 보는 이에게 강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끌림이 있다.

오민석 해설자의 말처럼 서정의 전달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언어에 대한 사유이고, 사상의 배포가 아니라 그 이전의 말에 대한 궁구가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러 중얼거림 속에 유독 좋은 시 하나가 있었으니 시 비 끝이다.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아는 사람

 

내가 꿈에서처럼

 

걱정 없이 행복할 때

 

당신은 잠시 소꿉을 접고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홀로 울고 돌아오네

 

*시집이 여러 쇄 찍혀서 나한테 술 한 잔 사겠다고 했으면 좋겠다. 그는 게우 캔 맥주나 하나 마시니 나머지는 내가 다 마시면 된다. 축하한다.

 

#정병근 #중얼거리는 사람 #비끝 #윤관영 #부자부대찌개 #하선암셀프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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