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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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열 번은 너무해/손현숙

也獸 2007. 12. 25. 19:10

 

열 번은 너무해

-손현숙

 

 

피자를 배달 시켰는데 쿠폰이 하나 따라왔다

자장면 한 그릇에도 스티커는 한 장이다

미장원에서도 보리밥 뷔페어서도 심지어 노래방에서도

열 번에 한번은 거저다

 

상술은 또 나를 은근히 꼬드긴다

"그거, 금방이에요."

내가 생각해도 그까짓 거 싶었다

어떤 날은 공짜에 홀려서

점심은 자장면 저녁은 피자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고지다

산을 오르다가도 팔부 능선에서 고꾸라지듯

다 모은 쿠폰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유통기한이 살짝 넘어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주 먹는 맛은 물리거나 질렸다

 

도장 찍듯 뻔질나게 찾아오고 문자하고 전화하고 메일하고

안달하며 질주하던 그에게서

소식이 뚝, 끊겼다

그가 나를 잃어버렸다

어찌 된 일인지 깜깜 등을 보인 그에게

나는 나를 더 이상 내놓을 것 없겠다

 

-

 이 시는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점포에서 10장을 모으면 주는 공짜는 그 모으기 어려움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모두가 다 잘 모아서 공짜를, 아니 거저를 잘 찾아먹으면 모든 점포에서 그런 이벤트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사귀고 만나고 소통하는 데도 그런 룰이 적용됨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화자는 '나는 나를 더 이상 내놓을 것 없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화자의 이런 고백은 10번이 넘어도 '나는 나를 더 이상 내놓을 것 없는'상태인지도 모른다. 10번이 되었다고 해서(다다르는 것 자체가 불가한 것이지만) 그와의 관계가 질적으로 전진될 거란 전망은 (상정한 본인도 거기까지 다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자신할 수) 없고 사실 이 시는 화자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백인 지도 모른다. 실상, 8부 능선에서 주저앉은 '그'가 현명한 자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잘못 돌진하면 그 마음만 읽히고 마는 것이 다반사다. 여자는 속으면서도 자신이 정한 횟수를 채우지 않는 남자에게 그 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전에 남자가 퇴각했을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아쉬움이랄 수 있겠다. 어쨌거나 애초에 직접적인 교류가 되는 여인은 그 후로도 그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나 선을 정한 여인의 경우, 그 선 전에 자신이 무너지면 자신을 질책하는 게 다반사고, 이 시처럼 다다르기를 기다리다가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면에서 그런 뻔질남이 주었던 믿음, 혹은 기대에 대한 일말의 배신감도 있다고 하겠다. 당당한 연애와 사귐은 횟수와 선이 아니고 그 내용이 아닐까. 코드가 맞는 사람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도 다 된다. 그게 진심을 바탕한 것이라면 ---

 여인들이여! 곧 썩어질 육신이란 말, 기억할 지어다(엉큼한 남자의 궤변이기도 한).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 염두에 두던 사내가 이제는 넘어져도 일으켜 주지 않는 시간이 오리니 ㅎㅎ

 나는, 이 야수는 발기 불능 전에 (8부 능선을 넘어가야 하나)넘어뜨리러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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