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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죽은노꼬매오름/변종태

也獸 2010. 3. 16. 18:23

죽은노꼬매오름

              변종태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 구름인가

발끝이 보이지 않는 오름 정상에서

온통 안개 속에 파묻혀 서성인다.

주머니칼로 안개를 오려내서

창을 낸다. 환한 햇살 비쳐든다.

안개를 다듬어서 기둥을 세우고, 안개를

다듬어서 식탁을 마련하고, 안개를

씻어서 마알간 국물을 끓여내고, 안개를

고루 펴서 식탁보를 덮고, 안개를

가늘게 깎아 수저를 만들고, 안개를

섬세하게 다듬어서 여자를 마주 앉힌다.

앞에 앉은 그녀에게 뜨건

국물이나 한 숟갈 떠 보라고 권한다.

산 아래에서 들고 간 김밥을 꺼내놓고

안개국물을 들이킨다.

내장 곳곳마다 스며드는 안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녀에게 건네는 입안의 말들이

안개 되어 퍼진다.


*안개로 모든 게 다 된다. 오리고 다듬고 깎고 끓이고 덮고, 들이키고 다 된다. 그런 발상이 재미있다. ‘내장 곳곳마다 스며드는 안개’라니! 결국 안개는 ‘그녀에게 건네는 입안의 말들이’ 퍼진 것인가? 뿌옇다.


*시집 <미친 닭을 위한 변명> 출간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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