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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혁신을 부정하는 혁신/이덕주 본문
혁신을 부정하는 혁신
이 덕 주
혁신적인 시,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열망은 끝이 없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시의 지평을 향해 글 걸음을 떼는 시인은 오늘도 시의 길을 연다. 자신이 여는 길이 신천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신대륙을 향한 행보라고 신뢰한다. 신뢰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 자신의 마음으로 들여놓는 수많은 길. 저 길을 하나하나 호명해야 한다. 길마다 특별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 이름을 지닌 언어가 길을 만난다. 이름 없이는 서로 만나지 않겠다는 언어들. 그렇다. 시인은 지금 그들을 호명한다. 부딪히는 수많은 시의 길, 접속되는 혁신적인 언어 속에 다시 혁신적인 시가 탄생한다. 기표가 된 언어들이 부유하며 부딪히며 질서를 잡는다. 혁신으로 가는 길을 언어가 스스로 찾아간다.
혁신을 위한 시는 새로운 언어가 충돌하는 순간 촉발되듯 창출된다. 아이디어끼리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시의 운명이다. 인류역사의 혁신이 역사와 역사끼리 부딪히며 이질적인 혁신을 생성시켰듯이 모든 혁신은 혁신과 혁신이 다시 충돌하고 교류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탁월한 혁신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기 위한 인식도 동일하다. 인식과 인식끼리 부딪히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식이 탄생한다. 인식이 사슬처럼 연결되다가 스스로 사슬을 끊는다. 사슬이 끊어지는 통증의 순간 인식과 혁신의 융합으로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
오래된 사슬이 때로는 새로운 사슬을 거부하기도 한다. 자신의 운명이 아직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 새로움만이 혁신은 아니다. 전통에서 그 끝이 다다르지 않으면 다시 혁신한다. 스스로 회오리를 만들어 낸다. 그 회오리 안에 시인은 자신을 가둔다.
그들은 혁신을 부정한다. 혁신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한다. 가보지 않은 길, 전인미답의 길을 눈앞에 두고도 건너가지 않는다. 지금 자신들이 위치한 곳에서 아직 정점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고 여긴다. 그들이 새로운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혁신을 부정하면서 그들만의 혁신의 시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비평은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언제나 뒤바뀐다. 100년 전의 시와 지금의 시를 어떤 기준으로 비교하겠는가. 시비를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천 년 전 시가 지금도 계속 인구에 회자된다면 그 시가 더 시대에 맞는 시다. 시공을 초월한 시가 오래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혁신을 부정하는 것도 또 다른 충격의 혁신이다.
이를테면 고수의 흐리기 그런 거다 맛은 입맛, 입에 따라 다 다르다지만 맛은 있다 입맛대로지만 입맛을 넘는 맛이 있다 웃겠지만 귀맛이라는 게 있다 손맛, 그러니까 손맛 이전이다 전표를 보기도 전에 외쳐지는 것에 이미 손 가는 손맛,
이전에 귀다 보기 전에 듣기다 끓어 넘치기 전에 소리 나기 전에 아는 게 또 코다 코맛은 없지만 있다 이를테면 섹스도 음식 같은 것 몸맛이라는 게 있다 반복해도 난해한 글처럼, 반복하고 반복해야 하는 음처럼 자꾸만 숨어드는 至極한 맛이 또 있다 애초에 되어야 하는 청음처럼, 의심하는 입맛처럼 장치를 넘어선 극미가 세상엔 있다 절망하게 만드는 맛이,
이를테면 이를 말이냐처럼
음식에도 귀명창이 있다 귀가 먹는 맛이 있다 후각은 답이나 마비되고 시각은 속고 몸맛은 길들여진다
세상엔, 귀맛이라는 지극이 있다
ㅡ윤관영「귀, 세상을 맛보다」전문(『시와세계』가을호)
의식의 지극한 경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감각의 작용을 이해하여야 한다. 감각의 확장과 한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최신 생리학 연구(『감각의 박물학』다이안 애커먼, 작가정신)에 따르면 마음은 인간의 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과 효소를 따라 몸 전체를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마음은 몸 안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감촉, 맛, 냄새, 소리, 빛이라는 복합적인 경이로움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 세상을 맛보다」는 음식에 대한 시다. 하나의 음식이 시적 공간에서 조리되고 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자는 조리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연상하면서 내공을 들이고 있다. 인간의 내재된 공감각으로 가는 경로를 화자가 음식에 대한 감각에 반응하면서 확장하고 있다. 화자가 조리과정에서 시적 언어에 의해 발견하는 것은 “반복해도 난해한 글처럼,” 되고 있는 귀맛의 음미다. “반복하고 반복해야 하는 음처럼 자꾸만 숨어드는 至極한 맛”을 탐미하며 “애초에 되어야 하는 청음”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또한 “의심하는 입맛처럼 장치를 넘어선 극미가 세상엔 있다/ 절망하게 만드는 맛이,”라고 하며 ‘귀맛’에 대한 찬사를 ‘극미’의 언어로 대체한다.
‘귀맛’에 대한 ‘극미’를 확인시키기 위해 화자의 오감이 동원된다. 하지만 감각화 되는 오감의 대상을 화자는 다시 화자의 오감으로 부정한다. “보기 전에 듣기다”라고 먼저 시각을 부정한다. 이어서 “후각은 답이나 마비되고 시각은 속고 몸맛은 길들여진다.”며 후각과 시각과 촉각을 부정한다.
화자는 지금 조리된 음식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다. 화자의 청각은 음식이 속삭이는 내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 안에 숨겨져 있던 형태 없는 귀다. 인간은 소리에 기대 주변의 세계를 해석하며, 세계와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한다. 우주공간은 고요하지만 지구상에 있는 것은 거의 모두가 소리를 낼 줄 안다.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상의 근본에 대한 자각이다. 나아가 대상과 연결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다. 자신의 생에 대한, 존재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다. 화자의 청각은 그곳까지 침투한다.
화자가 듣는 음식의 소리는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탄생시킨 대상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외형의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내형의 바탕에 흐르는 존재의 소리를 감각하는 감각기관 그 기능의 극치다.
“세상엔, 귀맛이라는 지극이 있다”며 화자는 청각을 신뢰한다. 소리에 의지해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맛’까지 가는 ‘지극’에 대한 시인의 인식 아래 ‘귀명창’이 되어 귀로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이다.
음식의 조리과정을 시적 공간으로 유인하는 것은 음식을 직접 조리하는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이다. 때문에 시인이 식재료와 음식의 명칭 등 익숙한 언어를 이질적인 시적 언어로 변형시키는 일도 가능한 일이 된다. 그 또한 새로운 감각의 과정을 경유하는 시인만의 혁신의 세계가 될 수 있다. 혁신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전통의 장점을 가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와세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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