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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시, 마음의 시/현순영

也獸 2015. 12. 21. 23:20

 

몸의 시, 마음의 시

현순영

‘몸의 시’, ‘마음의 시’라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몸이란, 일을 하고 이웃을 만나는 ‘나’다. 마음이란, 몸을 벗어나려 하거나 몸을 벗어나 부유하는 ‘나’, 일과 이웃을 향하는 ‘나’가 아니라 자신을 파고드는 ‘나’다.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가 있고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가 있다. 물론 시는 몸과 마음이 합일되는 순간을 꿈꾼다. 윤관영의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를 몸의 시로, 김명철의 『바람의 기원』을 마음의 시로 읽었다. 몸에서 출발하거나 마음에서 출발한 시인들이 시로써 몸과 마음을 합일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윤관영은 ‘당신을 위한 한 상’을 차려냈고 김명철은 ‘잠긴 열린 집’의 주인이 되었다.

1. 당신을 위한 한 상

- 윤관영,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 시로여는세상, 2015. 6.

윤관영의 두 번째 시집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에 실린 시들은 귀에 쏙쏙 들린다. 시인의 개성 있는 어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매우 구체적인 체험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더 나아가 그 체험 속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입담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윤관영의 어조를 탐구하는 일은 좀 미루기로 한다. 그 일은 꼭 이번 시집을 두고 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인이 이 시집에서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체험과 그 이면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 체험이란 주방일이다. 주방일에 몰두하는 시인과 오후 세 시쯤 일손을 놓고 주방 쪽문을 향하는 시인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에는 시인이 주방일에 몰두하면서 발견하거나 깨달은 것들을 진술한 시들이 많다. 시인의 발견 또는 깨달음은 크게 두 부류로 갈래지을 수 있다.

 

먼저, 시인은 맛에 대해 깨닫는다. 예컨대, 「김의 끝에 가닿다」에서 시인은 물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끓이는 백비탕이 사실은 맹물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시간, 그 불 조절, 그 안절부절”이 백비탕의 재료들인 것이다. 왜 물을 끓일 때조차 마음을 졸여야 하는가? 물은 모든 음식의 “바탕”, “모든 맛의 원질(「물로 보다」)”이기 때문이다.

 

맛이 아름다움의 하나인 이상, 맛에 대한 시인의 깨달음은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 미학적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대저 손의 수고를 넘어선 잔인에서, 맛은 나온다”(「맛은 어디?」), “음식은 죽음을 가린 화장술이다”(「죽음도 영계가 좋다」), “맛을 내는 것 잡내를 잡는 것”(「물의 혈을 짚다」), “맛은 종합이다”(「어두워야 깊다」), “음식에도 귀 명창이 있다”(「귀, 세상을 맛보다」), “맛의 구중심처는 이처럼 살이 겨우나 붙어 있어서 체면을 버려야 그 맛을 볼 수가 있다”(「배를 치다」)라고 적는다. 이 문장들의 ‘맛’이나 ‘음식’을 ‘아름다움’이라고 고쳐 읽어 보자.

 

시인의 미학적 발견이 언어를 새삼 음미하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이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시인은 ‘접대, 대접’(「김의 끝에 가닿다」), ‘수타, 수작, 갈아마시다’(「맛은 어디?」), ‘맨물, 맹물’(「맨물의 자리」), ‘뚜껑 열(리)다’(「몇백만 년의 시간이 들끓는다」), ‘우거지’(「욕으로 치자면」), ‘갈비’(「배를 치다」), ‘튀기다’(「비껴, 빛나는 것들」)와 같은 말들을 새삼 음미한다. 시인은 결국 주방일을 하면서도 시를 썼던 것이다.

 

다음으로, 시인은 주방일을 하면서 자신이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즈막, 물 들다」를 보자. 멸치를 체에 치면서, 강낭콩을 까 볶아 군내를 빼 쌀에 섞어 밥을 지으면서, 밥을 푸면서, 나물을 삶으면서 시인의 손톱눈은 하얘지고 등짝은 오므라든다. 그는 그러면서 “가슴에서 폭죽처럼 터지던 꽃들이 잠잠해진다”고 말한다. 열망, 어떻게 살고 싶었던 열망, 무엇이 되고 싶었던 열망이 사그라진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실패나 낙오가 아니다. 시인은 하찮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는 우거지를 꽃보다 더 사랑하게 된 듯하고(「사단 후에 오는 것들」, 「오빠 믿지?」), 밥을 대하는 마음결들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밥에는 색이 있다」). 무엇보다도 쌀을 씻는 자신의 손에서 어머니의 손, 사랑과 겸허의 손, 손 중의 손을 떠올리게 되었다(「손이 된, 손이었다」). 

 

윤관영의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는 이렇게 시인이 주방일에 몰두하면서 발견하거나 깨달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정말 좋은 시들은 시인이 주방일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탄생시킨 시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음식의 맛깔을 언어화하는 시인의 특기가 한껏 발휘되었으면서도 이 시집을 깊이 감상케 하는 시들이 있다. 「밥에 뜸이 드는 시간이면」, 「집밥」, 「쉰 살」, 「한 상 받다」가 그런 시들이다. 앞의 두 편 속에는 노동과 고독에 치진 존재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차리는 술상 또는 밥상이 있다. 뒤의 두 편 속에는 그런 존재를 위해 누군가 차려 주는 밥상이 있다. 그 두 가지 밥상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이 시집을 깊이 감상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시인은 밥에 뜸이 드는 시간에 주방으로 간다.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저녁 손님을 맞기 위해 밥을 안치고 뜸을 들이는 시간, 오후 세 시쯤일 것 같다. 그때 시인은 잠시 주방을 벗어나도 될 것이다. 그런데 잠시 일을 멈춘 그 시간에 꾹 눌려 있던 고독이 천천히 고개를 쳐든다. “고독을 대면할 시공이 없는 자의 절망적 고독”(「사내」). 시인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술상을 봐야 한다. 주방으로 간다. - 만약 그때 주방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다면 시인은 그 상에 앉고 싶어질 것이다. 안 차리고 대충 먹는 대중없는 밥, 대궁밥, 묵은 밥이어도 상관없다. 그들 틈에 끼어 고독을 나누고 싶을 것이다.

 

(「집밥」) - 가서, 시인은 묵밥이나 콩나물무침에 막걸리, 맵게 볶은 돼지껍데기에 소주, 아욱까지 넣은 올갱이국에 동동주를 마련한다. 술과 안주의 종류는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맛난 안주와 술로도 고독을 다스리지 못한다. 오히려 더 고독해진다. 그는 주방 쪽문으로 간다. “세상을 내다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자리”로.

 

또 다른 밥상이 있다. 시인을 위해 어머니가 차려 주시던 밥상이다. 이 시집의 4부에는 시인이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절을 쓴 듯한 시들이 있다. 시인은 어머니와 함께 장에 가서 호미를 고르고 어머니 댁 추녀에 못도 박아드렸다. 아들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가닝아!’(「윤관영 부르기」) 부르셨으리라. 옥수수, 가지 쪄서 무친 것, 삶은 양배추와 호박잎, 묽은 된장, 새끼 감자를 차려 주셨을 것이다(「쉰 살」). 김, 깻잎, 콩장, 두부, 고들빼기, 총각김치, 청국장, 달걀 후라이나 계란찜, 배춧국도 차려주셨을 것이다(「한 상 받다」). 어머니의 밥상은 충만하다. 생기와 물기가 돈다. 노고와 고독을 위무하고 힘을 준다. 

 

윤관영은 오후 세 시에 어머니가 차려 주시던 밥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그런 밥상을 받을 수 있기를, 그런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오늘 쉴 틈 없이 일했거나 고독했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소박하고도 알찬 밥상을 차려 놓고 당신을 불러 준다면, “다들 아는 당연한 맛”(「한 상 받다」)을 한 상 차려 놓고 당신을 기다려 준다면 어떨까. 아니면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그런 밥상을 차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시인은 이제 그런 밥상을 차려 보려 한다. 「손바닥 같은 꽃잎」은 말 그대로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다. 시인이 오후 세 시에 고독의 근원인 ‘부재하는 당신’에게 쓴 편지다. 시인은 그 편지에 약속 하나를 새긴다. 고독을 딛고 당신을 위해 한 상 차려내겠다는 약속. “당신, 이 봄 한 상 받으세요. 목련꽃 잎이 내는 상입니다.”

<시와사람>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