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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유선혜

也獸 2025. 2. 12. 22:25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유선혜

 

우리를 위한 집은 이 세상에 없나 봐.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골목길을 오르면서 네가 속삭인다. 장난스러운 표정과 목덜미를 따라 반짝이는 땀, 낮이 너무할 정도로 밝다.

 

은사님이 보내주신 밍밍한 사과즙

조각 얼음을 띄운 난꽃 향의 냉침 차

빛이 약하게 드는 테라스에서

너와 나눠 먹는 싱거운 미래

그런 건 없나 봐

 

우리의 미래 따위

 

집을 둘러보다 가장 안쪽의 방을 보며 너는 말한다. 여기는 아이의 방으로 하자. 천장에는 야광 별을 잔뜩 붙이고 나비 모양 모빌도 달자. 네가 웃으며 엉망으로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이제 그만 잘라버리라고 핀잔을 주고 싶지만

 

꿈 참는 마음

주무르지 않으려는 다짐

무섭도록 자라는 영귤나무

빛을 받지 못해 마르는

맨 아래쪽의 열매

가지치기를 미루며

우리를

방치하는

나날

 

그래, 그러자. 커다란 판다 인형도 사자. 대답을 하고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틀어보며 수압을 체크한다. 이 집은 남향이고 벌레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세면대 옆 실리콘에 곰팡이가 너무 많은 걸……

 

모든 곰팡이의 공통점은 습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녹차가 든 잔이 넘어지고 온 집 안으로 물기가 흘러 들어간다. 원래부터 축축했는지 그저 잔을 넘어뜨린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온통 젖어버린 건지 알 수 없어지고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유체꽃밭을 산책하느라 진흙이 묻은 장화를 널어놓은 화장실까지 온통 잠기고 곰팡이들은 포자를 뿌린다. 유성생식은 그런 징그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낳고, 태어나고, 자라고, 나는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타일 사이사이의 검은 자국들을 박박 문질러 닦는다. 너는 자꾸만 발자국을 남기고 곰팡이는 자라나고 우리의 미래는 끈끈하게 퍼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이 집이 완벽했다 하더라도 더 좁은 오르막길을 거쳐 다음 집을 보러 가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너는 내 손을 잡는다. 우리의 미래는 뛰어놀 거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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