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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예쁜
당신/박수현 본문
당신
박수현
어느 오후에 공원묘지를 거닙니다 직사각형으로 요약된 삶들이 소풍객들마냥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죽음들이 무성해서 묘비 앞 베고니아와 제라늄은 명랑하게 웃습니다 덩굴장미가 오르는 검은 대리석 묘비는 다정도 무정도 아닌 푱정을 짓습니다 산딸나무 환한 그늘 아래로 풀뱀 한 마리가 스칩니다 나무는 아직 고요에 다다르지 못해 뱀의 흘림체에 발끝을 오므립니다 저쪽 묘비 위로 검은뺨오목눈이가 잠깐 앉았다 날아갑니다 슬픔들도 깃털처럼 공중에서 바래는군요 붉은 묘비 앞, 길고양이 한 마리가 망가진 오르골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어떤 묘비들엔 먹구름과 비가 더 필요한 말들이 아직 붐비고 있습니다 누가 돌아온 것일까요 종루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봅니다 눈가에 금계국 같은 노을이 몰려드는 저물녘, 몇 번이나 고쳐 읽었던 당신의 문장들은 가만가만 묘비 속으로 스며들고 있군요 다만 당신의 자욱한 고백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박수현 시인의 시집 『샌드 페인팅』은 5년이 넘었다. 이 시는 늦은 독후감으로 시 「사과」에 이은 수작이라 할 만하다. 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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