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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시

고들빼기의 물길투영도/이정란

也獸 2008. 11. 9. 12:34

고들빼기의 물길투영도

                                   이정란

 

 

 

고산자는 방방곡곡에 찍은 발자국으로 대동여지도를 그렸다 첩첩산중 야수들의 울음소리며 설사병에 죽어간 아내의 신음, 어린 딸 배곯는 소리, 눈 속에 쓰러져 죽을 고비도 넘겼다

 

외적이 자주 침범하는데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들다니, 당장 잡아 가두어라?

 

봄 햇살이 유리를 뚫고 들어와 새기는 아련한 문신을 보며

 

고들빼기의 땅속물길투영도를 입안에 가두었다

투영도 참 정밀하여 혈관 따라 좍좍 뻗어간다

몸이 화해진다

입에 도는 쓴맛, 그를 긁어내지 못한 막소금 손톱의 피는 달다

 

 

 X-ray에 찍힌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시다. 음각으로 찍은 판화 같은 느낌이랄까.

 여기서 ‘쓴맛’은 위 내시경을 찍을 때, 그 윤곽을 잡는 역할을 하기 위해 먹는 하얀 약 같은 역할을 한다. 하얀 약이 잡는 윤곽처럼 고들빼기의 쓴맛은 ‘혈관을 따라 좍좍 뻗어’가 ‘땅속물길투영도’를 밝혀준다. 그것을 입안에 가둔 화자는 쓴맛에 복되리라. 그래서 몸이 화해지고 ‘손톱의 피는 달다’

 고산자의 생과 관리의 고지식함이 이 시에 육체성을 입힌다면 결정적으로 숨을 불어넣는 것은 ‘봄 햇살이 유리를 뚫고 들어와 새기는 아련한 문신’이다. 고산자와 고들빼기의 유사성은 가까운 것이지만 ‘투영도’는 가벼운 상상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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