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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마당 깊은 집

也獸 2011. 1. 31. 17:31

 

 좋은 책은 독자에게 환기력이 큰 모양이다.

 마당 깊은 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주인공은 나와 같은 장남, 그가 그렇게 배 고팠다는 걸 보면 내게도 그 기억이 있다. 물경 20여년의 연배 차이가 있으니 나의 경험은 그 질과 양에서 아주 미미하겠지만 나의 어릴 적 배고픔을 떠오르게 했다. 하루 2끼의 식사와 감자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서 빼내면 동굴 같은 구멍이 보이던 밥그릇, 그 보리밥-또 벽에 바른 고운 흙을 떼어 먹던 기억, 좀 다른 점이라면 어머니의 엄격한 다그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하는 축이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것을 아귀차게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신문을 오래 돌렸다는 사실과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다니면서 (5월짜리) 시장통을 누볐던 사실 등등이 떠올랐다. 그것은 인천의 부평에서의 일. 무엇보다 '루핑'이란 단어에 걸렸다. 흔히 루핑집이나 판자집이라고 세칭 불리는 집에 살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자연적으로 흐르는 하수구는 검었고 모기가 들끓었고 당시에는 넝마주이라는 사람들과 고아원이 도처에 있었다.

 

 주인공이 학교 입학전의 신문배달얘기가 나오지만 승차권으로 불리는 차표를 왜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했는지, 학교를 못 다니는 입장에선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교복이 참 부러웠고 저주스러웠다. 물론 거기에 맞는 머리 모양도.

 

 내가 그렇게 그악스럽지 않았던 것은 복이자 화 같다. 양면성을 같는다. 어떤 면에서는 나를 여유롭게 했고, 타인에 대해 많으 이해와 포기를 쉽게 하는 걸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심부름과 신문 돌리기, 추운데서 자기, 장작 패기 등 귀찮은 일을 장남이어서 겪은 일이라면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노점 옷 구루마를 끓어다 주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일단은 시간에 맞추어서 가야하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엄청나게 구질구질했다. 게다가 옷 구루마는 펼쳐놓고 싸고 하는 것이 더디기 때문에 성질대로 얼른 미리어다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 어머니도 지독하게 장사해서 전세로 가고 나중에는 집도 사시고 했지만 - 그러다 나는 군대에 갔다. 휴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간 곳은 집이 아니라 어머니의 노점 구루마였다. 햇볕에 그을려 타서 노랗게 탈색된 이마 위에 머리칼이라니, 그 때 나는 눈물이 나왔던 것 같은데, 옆에서 '어 그집 장남이 왔네!' 이 소리에 다른 수다로 넘어갔겠지만.

 

 마당 깊은 집의 정태는 읽으면서 나와 비견되는 바가 많아 안타까웠다. 나도 오랫기간 동안 끝을 보다시피 노동운동을 했고 현장에 막바지까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시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 다른 후회 안할 선택을 한다고 한 것이 시골행이었다. 그것은 후회가 없다 지금도.

 

 김원일 선생의 마당 깊은 집은 어휘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밑줄을 긋고 봤으니 단어장을 만들 생각이다. 그의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듯 나의 어머니는 '젏어서 고생하더니 살만하니, 당뇨가 걸려 이 고생이다.' 하시면 드시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드시니, 나도 마음이 별로 안 좋다. 나는 길남이와는 달리 '안 먹으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다' 간만 봐도 살 찔 수 있는 일을 하는 지금, 좀 스스로에 대해 절제해야 한다. 만약에 길남이 어머니처럼 어머니가 나를 닦아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에 돌리는  쪽이셨다. 우리들에게는 '소대가리 같은 4형제'라 하셨고 오부자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가끔 하셨다. 말하면 뭐할까, 양말 한쪽 빨아 싣는 놈들이 아니었으니 고생이 자심하셨으니라는 것은 당연지사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나는 누구 노래인지는 몰라도 '마마마 뷰티풀 썬데이 디시스 마 마마 뷰티풀 데에에이~'가 자동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런 꼬방촌을 이 책이 환기했다. 낙지 머리 뒤집듯 내 머리를 뒤집어 본 지금에서, 참말 좋은 시를 써보겠다 다짐해 본다. 내가 쓴 시 한편 첨부한다. 지금은 어머니가 나를 아버지 이상으로 어려워하시지만 그 당시 어머니는 조금만 급하면 관영이인 나를 '가닝아~ 가닝아~' 목이 터져라 불렀고 나는 그런 어떤 분위기를 볼 메어지게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잘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신문팔이를 하던 그 시점에 나도 중학교를 못 갔고, 그리고 열여서 살 크리스마스 이브를 세고 나는 월 5,000원 한달에 한 번 노는 공구가게의 점원으로 팔려갔다. 가서도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시 첨부한다. 대가리 쓰고 쓰면 머리에 쥐나고 사실성이 떨어질까 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윤관영 부르기

—90년 중반 민작회원이 되었을 때 기이하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살갑게 불러 준 이가 현기영 선생이었다. 신출내기인 나를 기억하고 이름 불러주는 소설가 선생, 미스테리였다. 선생의 소설 「소드방놀이」에서 윤관영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가닝아! 가닝아!

파동 없이 직방으로

어린 내 귀에 꽂히던 어머니 소리

물속에서 숨을 참듯 사레 들린 몸의 지점에는

날 부르는 소리가 있다

간용아, 니가 엄만테 잘해야 도ㅑ 막내이모 소리

여, 이놈아! 그저 안타까운 아버지 소리

요사이 내 호칭을 잊은 어머니 소리

시멘트 육백 포 내리러 가는 트레일러 속에서 들었다

넘으 돈 묵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아러

가닝이 말고 큰아가 이제사 알아먹은 말

민주아빠… 낯 뜨거운 윤 시인님

'어이, 논술'에 이어

노래방 사장까지 왔다 내가 날 검색하면

윤관,만 쳐도 ‘영정’과 ‘장군묘’가 달라붙고

윤관영,을 쳐도 ‘정’이 달라붙는 나

나는 둔해 터져 숨 못 쉬는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날 부르는 여타 소리를 듣는다

그제야 그 장면이 들린다

 

어떤 때는 내가 날 불러 본다(싱겁게)

여어, 이 놈아(어떤 땐

낯 뜨겁게도 잘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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